김준업(金峻業)


김준업(金峻業)                                                             PDF Download

 

생몰년 미상. 인조(仁祖) 때의 사람이다.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여수(汝修). 호는 동계(東溪)이다. 전주 출신이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직제학 김영(金英)의 후손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자, 분연히 항소하였다. 이것이 ‘인목대비 폐비 또는 인목대비 폐모’ 사건으로, 1618년 조선 조정에서 대비였던 인목왕후를 대비에서 폐하고 서궁(西宮)에 감금, 유폐시킨 사건을 말한다.

1614년에는 일곱 명의 서자들이 강도가 되어 상인을 약탈하는 ‘칠서의 변’이 발생했는데, 이때 이이첨 일파는 사건을 확대시켜 이들이 김제남과 연합하여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를 근거로 김제남은 처형당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사형 당한다. 그 뒤 역적의 딸이며 역적의 어머니인 인목왕후가 대비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여론이 나오면서 1617년부터 인목대비의 폐비론이 나타나게 된다. 이후 경연과 정청에서 인목대비 폐비론의 가부를 논하게 된다. 이때 이이첨과 허균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폐비 여론을 주도하였다.

1년간의 논의 끝에 인목왕후의 폐비가 결정되었다. 이때 곽재우, 정구, 송갑조, 이여빈, 이항복 등은 전은설을 주장하여 친모자는 아니지만 선조의 후비와 아들들이므로 친모, 친형제의 의와 다름이 없다며 인목대비 폐비 반대와 영창대군을 구명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또한 남인이었으나 친북인계 인사였던 이덕형 등도 폐비론에 반대하였다. 고산 윤선도와 미수 허목 등도 인목왕후 폐비의 그릇된 점을 지적하다가 과거 시험 응시자격을 박탈당한다. 같은 북인대북이었던 기자헌 역시 폐비론에 반대하다가 같은 북인의 공격을 받고 면직되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폐비되어 서궁에 감금되었고, 인목왕후의 폐비에 저항한 서인 선비 송갑조는 비밀리에 서궁의 담을 넘어와 인목대비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서인과 남인에 의해 패륜아로 몰려 정죄당하게 된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항소(抗疏)하여 그 그릇됨을 극언하고 과거에는 응하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에 유일(遺逸)로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624년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하고 난이 평정된 뒤에 남은 곡식을 모두 국가에 반납하였다. 고향 전주에서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교육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이괄의 난은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반란이다. 이괄은 1622년(광해군 1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친분이 있던 신경유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23년 음력 3월에 서인의 주도로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괄은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반정 뒤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불만이 컸다. 그러던 중 1624년 음력 1월 문회․허통․이우 등이 이괄과 이괄의 아들 이전․한명련․정충신․기자헌․현집․이시언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 하지만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했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을 서울로 압송하기로 했다. 이에 난을 일으켜 한양까지 함락시켰다. 조선대의 내부 반란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을 도성으로부터 피난시킨 전무후무한 난이기도 하다.

또한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 김장생의 막하로 행재소(行在所)에 나갔고, 그 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척화(斥和)에 앞장섰다. 정묘호란은 조선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이다. 인조 즉위 후 집권한 서인의 친명(親明) 정책과 후금 태종의 조선에 대한 주전(主戰) 정책의 충돌에 기인한 싸움이며, 이로 말미암아 후금은 명나라와는 불가능하였던 교역의 타개책을 조선에서 얻게 되었다. 최명룡(崔命龍)·김동준(金東準) 등과 강학하여 삼현(三賢)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에 있는 보광사(葆光祠)에 배향되어 있다. ‘보광사’에는 동계 김준업 이외에 오무당(五無堂) 류정(柳頲), 이락당(二樂堂) 이지도(李至道), 연독재(聯牘齋) 이지성(李至誠), 모암(慕庵) 이언핍(李彦愊) 선생이 배향되어 있다.

‘삼현’ 중의 하나인 최명룡(1567∼1621)은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윤(汝允), 호는 석계(石溪)이다. 이우기(李迂棋)의 문하에서 많은 서책을 섭렵하였다. 변산사(邊山寺)에 들어가 10여년을 밖에 나오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역학에 깊고 수학에도 정통하였다 한다. 여기(餘技)로 그림을 그렸으나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유작으로 「선인무악도(仙人舞樂圖)」(국립중앙박물관소장)는 한쪽으로 치우친 편파구도(偏頗構圖)에 주제가 되는 신선들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어서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계(浙派系)의 소경산수인물화풍(小景山水人物畫風)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동준(1573∼1661)은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초명은 김동기(金東起). 자는 이식(而式), 호는 봉곡(鳳谷)이다. 할아버지는 생원 김구수(金龜壽)이고, 아버지는 생원 김희지(金熙止)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사건이 일어날 무렵 전주에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광해군의 처사에 부화뇌동하여 찬성하는 소를 올리려 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하였다. 161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의 추천으로 의금부도사로 임명되고 감찰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였고, 적군이 후퇴한 뒤 경기도 양성현감·감찰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전주의 석계사(石溪祠)와 인봉사(麟峯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사계집(沙溪集)」,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조선호남지, 호남지, 전북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