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 어떻게 키울 것인가?


내 아이 어떻게 키울 것인가?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세대

요즘 인구가 줄어들고 앞으로도 더 줄어들 전망이어서, 나라에서는 젊은이들에게 결혼해서 아이 많이 낳으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혜택을 주는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그 정책은 아직 미흡한지 결혼할 생각조차 안하는 젊은이들이 넘쳐 난다.

젊은이들이 이렇게 혼인을 거부하는 데는 매우 설득력 있는 이유가 많다. 우선  일자리가 없어 수입이 보장되지 않아서 결혼을 못하는 경우다. 대부분의 일자리는 소수 인력이나 기계가 대신하고, 그나마 인력이 필요한 회사는 싼 임금을 찾아 해외로 이전한다. 고작 남아 있는 일자리는 임금도 적고 대우도 열악한 직종인데, 이 자리는 대개 외국인 노동자들의 차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망하는 직종은 경쟁이 치열한 대기업 사원과 공무원, 그리고 소수의 전문직이고, 그래도 좀 낳은 경우는 부모가 경영하는 작은 사업체나 일터를 물러 받는 정도이며, 그 나머지는 신분이 불안정한 서비스나 협력업체 직원이 되거나 아르바이트로 전전한다. 이렇게 좋은 일자리가 인구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혼인을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사실 서민들에게 경제가 이렇게 어렵게 된 데는 현행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경제적 잉여가치가 자본을 많이 소유한 사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법을 바꾸어 개혁해야 풀리는 문제인데, 법을 다루는 국회의원들이 이런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쩌다 운이 좋아 혼인을 한다고 해도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아이들의 양육비 못지않게 양육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큰 짐이다. 예전처럼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이 전업주부로서 활동할 때는 그래도 양육환경이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은 부부가 맞벌이를 해야 하니 양육환경이 열악해졌다. 그래서 경제적 비용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엄청 바쁘다.

아이가 더 자랐다고 해서 문제가 크게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아이의 성장에 비례하여 각종 교육비와 입시 준비, 또 아이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 예컨대 친구사이의 갈등, 각종 사고 등으로 부모는 또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청년이 되어서도 자녀의 혼인과 경제적 자립, 자녀와의 갈등 등으로 죽을 때까지 자녀로부터 해방되기 어렵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옛날처럼 효도가 일상화 된 때도 아니다. 자녀를 많이 낳아 키워도 결국은 대다수의 부모가 현대판 고려장인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러니 자녀는 낳아 키우는 일은 밑지는 장사가 아닌가? 요즘처럼 이해타산이 밝은 젊은이들이 뭐가 답답해서 혼인하려고 할까? 옛날에는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거의 막혀 있어서 혼인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인을 했지만,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어 경제적으로 독립이 가능할 경우, 누가 그런 힘든 결혼생활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겠는가?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인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특한 젊은이들도 있다. 비록 인구절벽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인기 없는 지방의 영세한 사립대학교를 제외하고 학교가 왕창 망했다는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래도 자녀를 낳아 학교에 보내고 있다는 반증일 테다.

그렇다면 이들은 앞으로 더 복잡하고 어렵고 종잡을 수 없는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살아갈 자신들의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옛날도 그랬지만 지금도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보다 좋은 환경에서 많은 수입이 보장되는 좋은 직장에서 일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 때문에 아직도 입시경쟁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세상이 하도 자주 변해서 어떤 직업을 택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좋은 학교부터 나오고 보자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생각도 학부모들의 불안감에서 나왔다는 점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부모들에게는 이런저런 걱정이 많다

이렇게 사회가 어렵고, 미래도 불확실하다보니 부모 입장에서는 여간 걱정이 많은 것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교육을 시켜야 할지 과거처럼 정해진 모델도 없다. 그나마 교과교육은 학교나 학원을 통해서 한다고 하지만, 정작 인성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거의 방치 상태이다.
더구나 내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그리고 학교에 갔을 때 안전하게 잘 있는지, 혹 친구와 싸우지는 않는지, 거기다가 혹시 따돌림을 당하고 있지 않는지 무척 고민이다. 아이가 좀 더 자라면 나쁜 친구들과 사귀지는 않는지, 부모 몰래 나쁜 짓이나 하지 않는지, 이성 친구를 잘못 사귀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우리 아이 어떻게 키워야 할지 정말로 고민이다.
간신히 대학에 들어가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고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대학을 나와서 취직은 할 수 있는지, 전공의 장래가 보장되지 않아 다른 전공으로 선택해야 할지, 해당학교가 일류학교가 아니라서 다시 다른 대학으로 편입학하거나 보다 좋은 대학의 대학원으로 진학해야 할지, 그리고 남자 아이라면 안전하게 군대에 갔다 오는 일 등 부모의 근심걱정은 그칠 날이 없다.

내 아이와 창의력

그렇다면 우리는 자녀들을 어떤 사람으로 키워야 할까? 미래 사회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숙고할 수밖에 없다. 흔히 미래는 창의력과 문제해결력이 뛰어난 사람이 성공한다고 다들 입만 열면 말한다. 그런데 창의력이나 문제해결력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것들은 또 다른 인성(人性)적 요소를 충족시켜야 나올 수 있는 문제들이다. 예컨대 물리학자가 어떤 원리를 발견한다고 하자. 이렇게 하려면 일단 창의력이 발휘되어야 하는데,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개 창의력이 금방 샘솟지는 않는다.
창의력이 발휘되려면 일단 그 일에 호기심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 그 일에 오랫동안 매달리는 인내심, 그 문제에만 온통 관심을 쏟는 집중력, 그리고 누구의 강요나 강압이 아닌 스스로 하려는 자발성,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남의 것을 베끼거나 모방하지 않는 정직성, 어떤 이론이나 편견에만 매달리지 않는 개방성, 그리고 그 연구를 스스로 해결하는 독자성 등 많은 인성적 요소가 기초를 이루어야 한다.

인성은 창의력의 바탕

바로 인성이 제대로 되어야 창의성도 발휘된다. 필자가 아는 작은 회사의 CEO나 대학의 인사를 맡은 교수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임용대상자의 인성을 먼저 본다고 한다. 실력이나 업적은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 대개 주관적 판단에 의지하는 인성을 우선시 한다는 것은 인사를 정실(情實)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으나 설명을 자세히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물론 우리 사회에 부조리한 정실에 의한 인사가 있었기 때문에 의구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창의성 또는 문제해결의 바탕이 되는 인성의 덕목을 살펴보면, 결국 인성이 좋은 사람이 실력도 있고 능력도 뛰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좋은 인성은 창의성의 밑바탕만 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직업을 스스로 찾는 진취성, 기존의 직업을 끈기 있게 이어가면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적극성, 친구와 사회에 대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친화성, 좋은 가치와 보편적 선을 위해 헌신하는 희생정신의 발휘,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비록 소박하지만 남과 협력하며 자신의 삶을 여유 있게 사는 협력정신이나 포용성의 발휘 등도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인성과 관련이 있다.

옛날의 유교식 교육, 지금의 인성교육

인성에 대해서 흔히 세간에서는 고리타분한 옛날 유교적 덕목을 주입하거나 『명심보감』 따위를 달달 외게 해서 길러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글의 의도는 이런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기획하였다. 조선시대는 그런 책들을 달달 외면 그대로 인성함양에 적용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에 옛 성현들의 가르침대로 그대로 외고 실천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옛날처럼 달달 외고 그대로 실천했다간 남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성관련 교재를 외고 쓴다고 해서 훌륭한 인성이 길러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체로 위선자가 되기에 딱 알맞다. 마치 기독교의 성경을 곧이곧대로 사회에 나와서 사는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경우와 흡사하다. 현실은 과거의 고전이 만들어질 때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하여 오늘에 맞게 교육시켜야 한다.

소아수지와 인성교육

소아수지(小兒須知)』는 율곡 선생이 쓴 책이다. 이 책은 『율곡전서습유(栗谷全書拾遺)』 권4의 「잡저(雜著)」에 들어있다. 책의 제목이 그러하듯 어린이가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어린이를 위한 책에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이 있는데, 이 책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격몽요결』은 학문을 시작하는 초학자를 위한 것이라면, 이 『소아수지』는 그것과 별도로 아이들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누구나 지켜야 할 인성교육의 기초로서 소아에게 반드시 주지시켜야 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그러나 한편 모르기는 해도 『격몽요결』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이 책을 언제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자(이름 : 朱熹, 1130~1200)의 『동몽수지(童蒙須知)』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선생도 주자의 내용을 참고하여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몽’은 ‘소아’와 같은 뜻이니 두 책의 제목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소아수지』의 내용을 더 구체화 한 것이 『격몽요결』로 보인다. 내용이 중복된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시에 『격몽요결』을 언급하겠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떻게 스스로 알아서 말씀을 지키겠는가? 성현의 말이니 그대로 따르라고 해서 순순히 지킬 아이는 거의 없다. 이는 반드시 부모나 스승의 지도가 병행되어야 함을 뜻한다. 더구나 이 책의 분량은 매우 적어 총17개의 짤막한 글로 되어 있다. 대부분 아동이 경계해야 할 내용이다. 원문으로 보자면 채 한 쪽도 되지 않아, 어쩌면 가장 내용이 짧은 책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니 부모나 스승 된 사람은 선생의 이 간략한 내용을 보고 실정에 맞게 더 보태서 지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필자는 총17개의 내용을 하나씩 풀이하면서 설명할 계획이다. 채 한 줄도 안 되는 글을 가지고 이렇게 길게 설명한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옛날의 글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또 옛날의 글이라고 해서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기에, 현대의 인성교육에 적용할 때는 그 때에 맞는 ‘시중(時中)’의 논리나 방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옛 성현을 욕되지 않게 하는 길이다. 무조건 외고 따르게 한다고 해서 아이들이 그렇게 하겠는가? 그렇게 하면 아들은 되레 ‘성인은 성인이고 나는 나이다’라고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실천하려고 노력하겠는가?

그것만은 아니다. 이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아이들이 아니라 그 부모나 교사에게 해당되기 때문에, 선생의 주장을 현대 교육적 관점에 맞게 해석할 필요가 있고, 또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내용을 손익(損益)할 필요도 있다. 더구나 옛날과 지금에 있어서 교육철학의 차이점도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전이 다 그러하지만, 그것을 금과옥조로 믿고 따르기보다 거기서 내가 무엇을 취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또한 현재 우리의 인성교육에 대한 뚜렷한 모범 답안이 없기에 옛 성현의 말에서 보편적으로 적용할 가능성을 찾아 설명하겠다.
17개의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고 따로 번호를 붙여 소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