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직필(洪直弼)-2


홍직필(洪直弼)-2                                                       PDF Download

 

171776(영조 52)∼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홍긍필(洪兢弼).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이다. 서울 출신이며, 병마절도위 홍상언(洪尙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홍선양(洪善養)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이간(洪履簡)이다.

작년에 이어서 여기서는 홍직필의 시 몇 편을 소개한다.
임헌회는 홍직필의 시문에 대해 그의 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문장이 끝없이 넓고 성대하여 어떤 이가 그 요령을 묻자, 선생께서

‘유학자의 문장은 막힘이 없는 것이 중요하다. 문장에 빠진 자들은 기량이 정밀할수록 심술도 무너진다. 경계로 삼아 본받지 말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시도 아건(雅健)하고 충담(冲淡)하며 조탁을 즐기지 않았다. 쉽게 미칠 경지가 아니라고 모두들 말한다.”

임헌회에 따르면, 홍직필의 시는 강하의 물줄기가 성대한 기세로 하류를 향해 거침없이 흘러가듯이 문장이 막힘없는 기세로 시원스럽고 기운차게 이어져 내려간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고 평가한다.

아래의 시는 1823년에 창작한 「고한(苦寒)」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食不充腸衣不完  (식불충장의불완)
밥이 부족하고 옷도 부족하니

雪中凍殺幾袁安  (설중동살기원안)
눈 속에서 몇 원안이 얼어 죽었을까

安得邊生九州被  (안득변생구주피)
어찌하면 변생(邊生)의 구주(九州) 이불 얻어

帲幪寒士破愁顔  (병몽한사파수안)
한사(寒士)를 덮어 시름을 풀어줄까

 

시 속에 나오는 원안(袁安)은 후한 때의 선비로 낙양에 많은 눈이 내리자 굶주려 집안에 쓰러져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폭설로 양식이 귀해진 백성들이 음식을 구하러 동분서주하는데, 차마 이런 어려운 시절에 자기까지 남을 찾아가 양식을 구할 수는 없다고 하여 배를 곯았던 것이라고 한다. 홍직필은 당시 조선 사회에 이 원안처럼 기근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는 기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걱정하고 있다. 홍직필이 이에 대해 실천 가능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였지만, 당시의 힘겨운 시대 현실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부정부패로 사회 불안이 극에 달하던 19세기 전반은 실제로 기근에 괴로워하는 가난한 백성들이 살던 곳을 이탈하여 유리걸식하다가 반란을 꿈꾸는 극단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비록 도학과 예학에 침잠하고 있지만, 시사를 등져서는 안된다고 믿었던 홍직필에게 이런 시대의 시련은 어떻게든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현실 속에서 홍직필은 대상을 차별하지 않는 보편 교육과 하층민까지 아우르는 적극적인 문학적 응대를 통한 계몽으로, 이런 난국을 타개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던 듯하다.

아래의 시는 1845년에 지어진 「애채신(哀採薪)」이라는 시이다.

 

原上荷鎌者  (원상하겸자)
언덕에서 낫을 들던 그 사람

採薪終夕還  (채신종석환)
나무해서 밤늦게 내려와

擔肩向城市  (담견향성시)
메고서 저자로 향해 가는데

妻子自呼寒  (처자자호한)
처자는 추워서 울부짖겠지

 

1845년이면 홍직필이 「고한」을 지은 뒤로 다시 22년의 세월이 흐른 70세 때이다. 긴 세월의 간극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고단함에 지친 백성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무하는 나무꾼이 정작 자신의 집에는 군불을 지피지 못해 처자(妻子)를 추위에 떨게 만들어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을 담담하게 노래하였다. 시 속에서 주인공 나무군은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로 풀어내지도 않고 구체화된 사건으로 보여주지도 않지만, 위의 상황은 충분히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1840년에 원나라 장양호(張養浩, 1270~1329)의 「애유민조(哀流民操)」를 본떠 12절로 창작한 「속유민조(續流民操)」도 홍직필의 현실 인식을 잘 보여준다. 한 부분만 소개한다.

 

哀哉流民   (애재유민)
가련하다 유민들이여

顔貌不忍覩  (안모불인도)
얼굴을 눈뜨고 볼 수 없고

號咷不忍聞  (호도불인문)
울음을 차마 들을 수 없네

世無汲長孺  (세무급장유)
세상에 급암(汲黯)이 없는데

誰復發倉囷  (수복발창균)
누가 다시 나라의 창고를 열까

 

홍직필은 시의 서문에서, 장양호가 지은 「유민조」의 글 뜻이 애절하여 정말 오늘날의 광경을 말한 것 같아서 그 체를 본받아 이 시를 짓는다고 하였다. 고단한 백성의 삶을 목도하고 이를 기록하기 위해 노래의 형식을 빌렸음을 말한 것이다. 오늘날의 광경이란 무엇인가? 곧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고 차마 귀로 들을 수 없는 유민들의 가련한 모습과 처량한 울음소리이다. 홍직필은 1840년 4월에 심능용(沈能容)에게 보낸 편지에서, 심각한 기근으로 팔도의 백성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먹여주기를 기대하지만 한 사람도 구제되지 못하고 길과 들에서 굶어죽고 있다고 하였다. 더욱이 이를 해결할 의지를 가진 위정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절망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 보인다. 홍직필은 부족하나마 시를 통해 이들의 아픔을 대변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홍직필은 1843년에 지은 「원맥(原麥)」에서는 추수할 때가 가까워진 보리밭에서 보습을 잡고 일하는 농부가 정작 그 보리로 양식을 삼을 수 없는 현실의 모순을 노래하였고, 1845년에 지은 「애구작(哀驅雀)」에서도 논에서 참새를 쫒는 농부의 굶주림을 노래하면서 농부의 배에서 우레 소리 같은 배곯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여러 시에서 당대의 모순과 백성의 아픔을 노래하였다.

이처럼 홍직필은 시를 통해 가난과 추위에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을 대변하고 위정자를 경계하였던 것이다. 홍직필이 전적으로 문학에 전념했던 문인은 아니지만, 문학적 의미를 갖는 많은 분량의 작품을 남겨두었다. 그는 학자로서 학문 탐구에 매진하고 후진 양성에 심혈을 다하면서도 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홍직필은 유학의 도가 미약해지고 풍속이 쇠퇴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의식이 바로 그의 시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매산 홍직필의 儒道 존숭과 警世의 시문창작에 관한 고찰」(신영주, 「한문고전연구」제30집, 한국한문고전학회, 20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