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徐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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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徐渻, 1558〜1631)은 조선시대에 경상우도 감사, 평안감사,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위고 시각장애인 홀어머니 고성 이씨의 손에서 자랐다. 서성은 어릴 때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글을 배웠으며 율곡 이이를 존경하여 율곡이 탄핵 당했을 때는 적극적으로 변호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모시고 북으로 피난을 갔으며 이괄이 반란을 일으킬 때는 인조를 모시고 공주까지 피신을 하였다. 정묘호란 때는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그는 특히 문장과 그림 그리고 역학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인기(李麟奇), 이귀(李貴) 등과 교류를 하였다. 저서로 『약봉집(藥峯集)이 있다. 기울어져 가는 서성의 집안은 어머니 이씨와 서성의 비범한 노력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 가문으로 번창하였는데 100명이 넘는 과거 합격자와 수많은 고위 관리가 서성의 후손에서 배출되었다.

1558년(1세)
명종 13년에 외가가 있는 안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대구(大丘)이다.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이다. 언양현감(彦陽縣監) 서거광(徐居廣)의 현손(손자의 손자, 즉 증손자의 아들)이며,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서팽소(徐彭召)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서고(徐固)이고, 아버지는 퇴계 이황의 문인 서해(徐嶰, 1537〜1559)이다. 어머니는 청풍군수(淸風郡守) 이고(李股)의 외동딸이다. 어머니 이씨는 15세 즈음부터 시력을 상실한 여성이었다.
서성이 태어난 해에 부친 서해가 사망하였다.(향년 22세) 어머니는 서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작은 아버지 서엄(徐崦, 1529∼1573)의 지도를 받게 하였다. 서엄의 자는 진지(鎭之), 호는 춘헌(春軒)이다. 서엄 역시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다. 1555년(명종10년)에 서엄은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이후 1560년(32세) 별시(別試) 문과에서 급제하였다. 승문원 주서(注書), 예조 낭관(郎官), 함경도도사(咸慶道都事, 1566년) 등을 역임하였으며, 1568년(선조1년)에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는 사신을 접대하는 역관(驛館)의 관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성균관 사예(司藝)에 임명되어 유생(儒生)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역임하다가 1573년(선조6년, 45세)에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였다. 서성이 15살 때였다.
서성은 어릴 때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글을 배웠다. 또 율곡 이이(李珥)를 스승으로 모셨다. 구봉 송익필은 1580년대에 과거를 단념하고 고양의 구봉산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때 서성 외에도 김장생(金長生), 정엽(鄭曄), 정홍명(鄭弘溟) 등이 함께 글을 배웠다.

1583년(25세)
이해에 율곡 이이가 탄핵을 당했다. 서성은 율곡을 위하여 항소를 하고 변호하였다. 율곡은 다음해 1월14일(음력) 세상을 떠났다.

1586년(28세)
알성문과에 합격하였다.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에 임명되었다가 인천 향학훈도(鄕學訓導)로 차출되었다.

1590년(32세)
예문관의 검열, 봉교를 거쳐 홍문관의 전적(典籍)에 올랐다. 이후 감찰, 예조 좌랑, 병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과거시험 정시(庭試) 때 수석을 차지하여 선조 임금으로부터 말을 하사받았다.

1592년(34세)
이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병조의 낭관, 경기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북쪽으로 피난 가는 선조를 호위하다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다. 이 후 함경도로 길을 바꿔 왕자를 모시고 가는 일행에 참여하였다가 회령에서 그곳 주민인 국경인(鞠敬仁, ? 〜 1592년)의 반란으로 붙잡혔다. 국경인은 전주에 살다가 회령으로 유배당한 뒤에 회령부의 아전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조정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 당시 상황을 함경도 사람 장복중(張福重)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선조실록 25년 9월 25일 기사)
“나는 병조 좌랑 서성(徐渻)을 따라다니며 강원도 지방에서 군사를 모으다가 왜적에게 쫓겨 함경도 함흥부(咸興府)로 들어갔다. 이때 왜적이 대거 공격해 왔기 때문에 원임(原任) 의정부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황정욱(黃廷彧), 원임 승정원 우부승지 황혁(黃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허명(許銘) 등이 제1왕자(임해군臨海君)와 제5왕자(순화군順和君. 실재로는 선조의 여섯 번째 아들)를 받들고 북도의 회령진(會寧鎭)으로 피난하여 들어갔다. 북도 절도사 한극함(韓克諴)과 남도 절도사 이영(李瑛) 등은 만령(蔓嶺) 싸움에서 패하여 종적을 모르게 되었다. 적군의 기세는 점점 극성하게 되어 7월 26일 회령진을 함락시켰다. 이 때문에 왕자들과 김귀영 등이 한꺼번에 사로잡혔다.”

회령지방에서 국경인 등이 조선의 왕자들과 관리들을 사로잡아 왜군에 넘긴 것은 군대를 모집하러 나온 왕자들이 현지 백성들에게 이유 없이 횡포를 부리고 잔혹한 행동을 일삼아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13세의 어린 나이였던 순화군은 성격이 아주 나빠 평소에도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는 사이코패스 기질을 가진 인물로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불법을 저질러 나중에 조정 관리의 탄핵을 받았다. 1601년에 그는 조정 관리들의 건의로 ‘순화군’이라는 군호(君號)까지 박탈당하였다.
서성도 임해군·순화군·황정욱 등과 함께 왜적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졌다. 하지만 그는 홀로 왜군들의 진영에서 탈출하여 경성(鏡城)으로 들어갔다. 이후 현지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아 함경도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도와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 등을 잡아 죽이고 길주에 주둔한 왜적을 물리쳤다. 또 명천(明川)으로 진격하여 적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이 공로로 전적에 제수되고 사병을 모집하는 소모어사(召募御史)로 임명되었다.
당시 구원병으로 조선에 들어온 명군(明軍)이 군사 전략을 세우기 위해서 자세한 조선 지도를 요구하였는데, 접반관(接伴官)의 임무를 맡고 있던 서성은 명군에게 조선의 지도를 제공하여 왜군과의 전투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후 지평, 병조 정랑, 성균직강 지제교 등에 임명되었다. 이해 자신을 키워준 숙모 송부인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594년(36세)
봄, 지평, 직강, 내섬시 등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그는 병조 정랑에 임명되어, 군대의 병사들과 군량미를 관리하였다. 또 순안어사(巡按御史)에 임명되어 삼남(三南) 지방을 순찰하였다.

1595년(37세)
경상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삼가현(三嘉縣)에 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여 민심을 진정시키고, 쌍충묘(雙忠廟)를 세웠다.

1596년(38세)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병조 참의, 승문원 부제조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강원 감사(監司)가 되었다.
이해 조정의 간신들이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1567년〜1596년)의 공을 시기하여 김덕령이 반역할지 모른다고 무고를 하여 선조는 조정에 김덕령을 잡아 오도록 명하였다. 이 때 동부승지의 관직에 있었던 서성이 그 책임을 맡았다. 서성이 전주에 도달하여 살펴보니 도원수 권율이 이미 김덕령을 진주의 감옥에 가두어 둔 상태였다. 이때 서성은 임금에게 보고서를 올렸는데, 거기에 김덕령이 이몽학의 난 때 토벌의 명령을 받고도 ‘나흘 동안 머뭇거리며 성패를 바라보았다.’(四日遲留, 觀望成敗)라는 취지의 보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선조 임금이 직접 국문에 참여한 이 사건으로 김덕령은 사형을 당하였다. 그런데 서성이 보고한 내용이 김덕령의 죄를 확정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비난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김덕령은 성혼(成渾)의 제자로, 서인계열에 속했으며, 서인의 주류였던 정철(鄭澈)의 동향인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동인출신 고관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1597년(39세)
병조 참의, 좌부승지, 도승지, 첨지중추를 역임하고 다시 병조로 돌아왔다. 황해도 감사가 되었다.

1599년(41세)
이해, 함경도 감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사임했다. 가을에 호조 참판, 평안도 감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도승지, 한성부 판윤, 형조 판서 등에 임명되었다. 이 즈음 도승지 자격으로 경연에서 선조 임금에게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비난하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비판하다 임금의 미움을 받았다.

1600년(42세)
이해 서성은 평안도 감사로 있으면서 우리나라에 기자의 화상(畫像)이 없다는 이유로 중국 원나라의 화가 조맹부(趙孟頫)가 그린 <기자대무왕진홍범도(箕子對武王陳洪範圖)>를 구매하여 평양의 인현서원(仁賢書院)에 보관하도록 조치하였다.

1603년(45세)
병조 판서가 되었다가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다시 함경 감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북방의 여진족들이 갑자기 침입하여 첨사 김백옥(金伯玉) 등을 살해하였다. 서정은 그들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고 나가 싸웠다. 이때의 토벌작전에서 특별한 전공이 없이 패배하였기 때문에 그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1607년(49세)
경기도 감사(監司)에 임명되었다.

1608년(50세)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동인에서 분파된 대북파 관리들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상대적으로 서인과 동인 중 남인계열의 관리들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서성은 추부(樞府, 이전의 중추원)에 임명되었다. 이 해 산능(山陵, 임금의 무덤) 건설을 감독하였는데 나중에 견고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 파직되었다.

1609년(51세)
공조 판서, 참찬에 임명되었다. 개성부 유수(留守, 정이품의 외관직)에 임명되었다.

1611년(53세)
참찬에 임명되었다.

1612년(54세)
김직재(金直哉, 1554년〜1612년)의 모함으로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김직재는 아들 김백함(金白緘)이 왕을 제거하고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일으켰다고 하여 부자가 사지를 찢는 형벌을 받아 사망하고 가산을 몰수당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던 소북파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무고 사건이었다.

1613년(55세)
이해에 광해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대북파가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켰다. 이들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여 역모하였다는 이유로 유교칠신(遺敎七臣, 선조가 승하하면서 어린 영창 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유명을 내린 일곱 명의 신하)으로 지목된 한응인(韓應寅), 신흠(申欽) 등을 체포하여 유배시켰다. 서성도 이때 연루되어 단양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서성은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고초를 받다가 1623년 인조반정 때까지 11년간의 귀양살이를 하였다.

1615년(57세)
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다음해 영해로 유배되었다.

1618년(60세)
어머니의 3년상을 마쳤다. 유배지가 원주로 바뀌었다.

1622년(64세)
부인상을 당하였다.

1623년(65세)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서인 일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인조)을 임금으로 옹립하였다. 관직에 복귀되어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관리들을 이끌고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한 한효순(韓孝純)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참찬이 되었다.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을 때는 북인 정인홍 일파를 처벌하는데 공을 세워 포상을 받았다.

1624년(66세)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봄에 임진강을 건너 한양으로 진격했다. 인조 임금은 수원을 거쳐 천안, 공주까지 피신을 하였다. 이때 서성은 임금 일행을 호위하면서 같이 이동하였다. 이 공으로 그는 나중에 대사헌이 되었으며, 한양이 수복되었을 때 복귀하여 판중추부사,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김장생, 정엽 등과 함께 스승 송익필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1627년(69세)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기로사는 연로한 고위 관직자들을 예우하기 위해서 설치된 부서였다. 이해에 후금이 침입해 왔다.(정묘호란) 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종묘 제조(提調)의 자격으로 묘주(廟主,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1628년(70세)
유효립(柳孝立)의 옥사(獄事)사건을 처리하다 견책을 받아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후 참찬으로 복직되었다가, 장악원, 혜민서의 제조로 임명되었다.

1629년(71세)
6월 5일(음력) 숭례문 바깥 남지(南池) 부근 홍사효 집에서 열린 기로회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때 참석자들은 홍사효(洪思斅, 1555∼?)를 비롯하여 강인(姜絪), 이귀(李貴), 서성(徐渻) 등 원로들이었다. 이 기로회 모임은 사적인 것이었으나 기록으로 남겨 그 그림이 현재까지 전해져 온다. 화가는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기룡(李起龍, 1600∼?)이다. 당시 이 같은 노인들의 기로회 모임이 민간사회에 널리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1631년(73세)
인조 9년 4월에 사망하였다. 포천 설운리에 장사를 지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봉집(藥峯集, 약봉유고藥峯遺稿)』이 있다. 이 책에는 170여 수의 시가 실려 있으며, 임진왜란 때의 경험을 서술한 시, 단양 유배 때 지은 시, 중국 사신의 접반관이 되었을 때의 시 등이 실려 있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선조 25년 9월 25일 기사
정조실록 정조 5년 7월 23일 기사
이장희, 「서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1997
반윤홍, 「순화군(順和君)」,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서성 행력」,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 콘텐츠>(https://www.krpia.co.kr/)
안휘준 집필(1996), 조인수 개정(2013), 「이기룡필 남지기로회도(李起龍筆南池耆老會圖)」,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서정욱, 「강원도 관찰사만 10명을 배출한 한국 최고의 명문가」, <프레시안>, 2019.6.19.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인문학으로 보는 장애인 ‘고성 이씨 부인’ 남편과 사별 후 음식사업으로 집안 일으켜」, <에이블뉴스>, 2017.4.10

서성이 71세 때 참석한 기로회 모습. <남지기로회도(李起龍筆南池耆老會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1호). 기로회 장소는 남대문 바깥 남지의 홍사효 집이다. 아래쪽 정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서면 양쪽에 두 쌍의 버드나무가 보이고 중앙 연못에 연꽃이 가득하다. 그 안쪽에서 12명의 노인들이 음식 대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