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崔命喜, 1851~1921)


 

최명희(崔命喜, 1851~1921)                               PDF Download

 

최명희 초상
최명희 초상
명희(崔命喜, 1851~1921)는 조선시대 말엽에 전라북도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이다. 율곡 이이(李珥)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기호학파 성리학자 간재(艮齊) 전우(田愚)와 사제 관계를 맺고 그의 학문 전통을 이었다. 그는 특히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손수 경작하면서 꾸준히 독서를 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생활을 실천하였는데, 한일합방이라고 하는 국치를 당하여 궁핍하고 나약한 조선의 청년들에게 대장부의 기상을 불어넣고자 노력하였다.

1851년(1세, 철종 2년)에 태안군 근흥면 율현(栗峴) 석전리(石田里)에서 아버지 최원병(崔元炳)과 어머니 경주 이씨(李氏) 사이에서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자는 성범(性範), 호는 노백(老栢)이다. 경주 최씨인 최명희의 집안은 서산, 태안 지역의 전통 있는 집안으로 근흥면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부친 최원병은 간재 전우가 이름을 써준 만수재(晩修齋)에서 기거하며 학문을 탐구하였다.

1859년(9세, 철종 10년)에 서당에 나가 공부를 시작하였다. 어려서부터 생활이 어려워, 나무심기를 좋아하였는데, 권력으로 인명을 구하거나 살릴 수는 없지만 초목을 배양하면 그것에 의지하여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자신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서당에 갔다가 늦은 저녁에 돌아오면, 굶주림이 심하고 추위도 극하여 얼어버린 발이 갈라지는 듯하였고, 현기증이 나 엎어질 정도가 되어도 여전히 배움을 향한 마음은 줄어들지 않았다. 매양 솔잎으로 굶주림을 헤아리고, 몽당 붓으로 나뭇잎에 글자를 썼다.”(⌈노백집․행록⌋)

1863년(13세, 철종 14년), 증조 외할머니의 상을 당했다. 이즈음부터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였는데, 항상 먹을 것이 부족하고 힘들었다.
1865년(15세, 고종 2년), 이언식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얼마 뒤 바로 할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1868년(18세, 고종 5년), 이수사(李水使)의 문하에 들어가 과거 공부를 하였다. 이즈음 두 번째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에 올라갔다.

1876년(26세, 고종 13년), 송명옥(宋明玉)에게 가서 과거공부를 하였다. 이윽고 당시 이름이 높았던 임헌회(林憲晦, 1811-1876)를 찾아가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당시 충청도 아산, 공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임헌회는 송치규(宋穉圭)와 홍직필(洪直弼)에게 배웠고, 율곡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한 유학자였다. 임헌회 제자 중에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도 있었는데, 전우는 부친과 함께 공주로 이사하여 매일 스승을 모시고 배움에 매진하고 있었다. 임헌회는 새로 배움을 청하러 온 최명희에게 ‘본래 마음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불실본심(不失本心)’이란 글자를 써주며 격려하였다. 이후 귀향하면서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10년 객지살이 포부가 원대하였으나 (十年爲客經營大)
한걸음으로 귀향하니 부귀가 가볍네. (一步還山富貴輕)

1877년(27세, 고종 14년), 지난 해 11월에 스승 임헌회가 사망하였다. 이에 스승의 제자 간재 전우를 찾아가 스승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전우는 당시 최명희보다 10살 많은 37세였는데, 노백재(老柏齋)란 호를 지어 주었다.

1881년(31세, 고종 18년), 부인 이씨가 하직하였다. 집안 살림이 너무 어려웠는데, 외숙부가 논을 주어 생활이 다소 여유롭게 되었다. 그는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독서를 하는 등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생활을 지속하였다. 다음해 안좌익(安佐益)의 딸과 재혼하였다.

1884년(34세, 고종 21년), 스승 전우와 함께 옥량(玉梁), 선유(仙遊), 대야(大冶) 등 여러 곳을 유람하고 속리산 화양동에 있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왔다.

1896년(46세, 고종 33년), 스승 전우가 태안으로 옮겨 안면도 연천서당에 기거하였다. 최명희는 수창리에 서당을 세워 스승에게 강학을 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전우는 태안군 근흥면 수룡리(당시 수창동)에 5년 동안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해 현지에서 유풍을 크게 일으켰다. 나중에 전우가 천안으로 이사하자, 최명희는 다시 그곳에 서재를 마련해주었다. 2년 뒤,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1901년(51세, 광무 5년) 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이 무렵부터 같은 성씨인 최익현(崔益鉉, 1833-1868)과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다. 최익현은 이항로에게 배웠는데 그보다 18세 연장자였다. 최익현과 경주 최씨의 족보에 대해서 논하고,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1904년(54세, 광무 8년) 최익현이 난세에 처하는 방법을 물었다. 최명희는 주경야독하면서 몸을 닦고 죽음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난세를 당하여 무조건 상황을 개혁하려는 자세보다는 하나의 이념으로 응집할 수 있는 힘을 배양한 다음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스승 전우의 입장도 그런 것이었다. 다음해 최명희는 미국으로 유학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7년(57세, 광무 11년) 일본이 고종을 퇴위시키고, 강제로 조선 군대를 해산시켰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였다. 최익현은 그 전 해에 의병을 일으켜 무성서원에서 궐기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체포되어 경성주재 일본군 사령부에 감금당하였다가 대마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이해 최명희의 아들 최흠이 스승 전우를 태안으로 모셨는데,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이 밀고하였다. 최명희는 관청으로 불려가, 다음과 같은 심문을 받았다.

왜군 : 우리는 시민들을 보호하는데 그대는 오히려 우리를
토벌하고자 하여 민정(民情)을 혼란시키니 무엇 때문인가?
최명희 : 그런 일은 없다.
왜군 : 간재가 태안에 있으니, 사사로이 거병을 의논한 것이 아닌가?
최명희 : 내가 간재선생을 태안에 오도록 한 것은 단지 옛 도를 토론하며 종교적인 모임을 갖고자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의병을 일으키려고 해도, 군대 통솔에 익숙하지 않고, 병사를 모집하기도 어렵고, 무기가 구비된 것도 없으며, 양식을 모아둔 것도 없다. 그러므로 조용하게 도(道)를 간직하여 산으로 들어가거나 바닷가로 가서 한 해를 마칠 계획뿐이었다.
왜군 : 삼고초려를 하면 나가서 의병을 일으키겠는가?
최명희 : 만약 유비가 삼고 초려하여 좌우에 관우와 장비 같은 장군이 있을 것 같으면 어찌 할 뿐이었겠는가?

이러한 대화를 끝내고, 최명희는 석방되었다. 왜군은 최명희에 대해서 의병 궐기의 의도를 의심하기는 했지만 최명희가 의병궐기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으며, 또 장차 그럴 위험은 없다고 파악한 것이다.

1910년(60세, 융희 3년) 경술국치를 당하였다. 이후로 그는 연회에 나가지 않고 망국의 백성이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하고, 오직 통곡만을 일삼았다. 둘째 부인 안씨도 이즈음에 사망하여 슬픔이 컸다. 하지만 학문 공부는 매일 그치지 않았다. 종일토록 책을 몸에 지니고 있었으며, 저녁에는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의관을 바르게 하고 입으로는 경전을 읽고 마음으로는 그것을 해석하면서 새벽을 맞이하였다.
이 당시 한일합방 소식을 들은 스승 전우는 대성통곡 한 후 다시는 육지를 밟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그는 전북 계화도(繼華島)에 머물렀는데, 망국의 슬픔을 가슴에 담은 선비들로 붐볐다. 10여 채의 서재에 200여명의 선비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최명희도 가끔 노구를 이끌고 그곳까지 가서 스승의 강학을 들었다.

1921년(71세, 일제시대) 10월 22일에 사망하였다. 스승 전우가 사망하면 그를 위해 사당을 지어주리라 결심을 하였지만 스승 보다 먼저 세상을 하직하였다. 유고집으로 노백재유고(老柏齋遺稿)가 있다. 이 문집은 필사본으로 2권으로 되어 있는데, 1937년에 오진영(吳震泳)이 편찬하였다.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 안양사(安陽祠)에서는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스승 간재 전우와 함께 노백 최명희를 기리는 제사를 올린다.

<참고자료>
이형성, 「노백재 최명희의 학문과 사상」, 「간재학논총」9집, 2009.
윤기창, 「태안 안양사서 전우·최명희 선생 추모 춘향제」, 「금강일보」, 2013.4.15
작자미상, 「안기리 안양사」, 태안군 유형자료-유교문화, <도서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