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집(兪彦鏶, 1714-1783)


유언집(兪彦鏶, 1714-1783)                                  PDF Download

 

언집은 자는 사호(士鎬)이고 호는 대재(大齋)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아버지는 한성부우윤 유직기(兪直基, 1694-1768)이다. 정조 때 영돈녕부사에 오르고, 정조 묘정에 배향된 유언호(劉彦鎬)는 그의 동생이다. 권상하(權尙夏)·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유직기가 『소학』의 「가언」과 「선행」편에 해당하는 내용을 정리한 것을, 유언집이 편집한 『대동가언선행』은 송대에 나온 『소학』의 「가언」과 「선행」 체제를 따라 조선 유학자들의 글에서 필요한 자료를 뽑아서 편집하였다.

대동가언선행』은 아동 교육서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본받을만한 훌륭한 일들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은 대체로 『격몽요결(擊蒙要訣)』·『성학집요(聖學輯要)』·『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등에서 해당 내용을 뽑아 정리하였다.

유직기가 책을 엮으면서 우리나라 인물들의 언행과 덕행을 채택한 것은 중국과 차별되는 독자적인 문화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총애했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는,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은 소학의 사다리요, 유직기가 편집한 『대동가언선행』은 『소학』의 날개이다. 그 말이 모두 깊고 알기 쉬우니, 『소학』을 읽을 때 항상 참고하면 그 효과가 매우 클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유언집은 학행이 있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정조 1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유언집이 사직 상소를 올리자 정조가 다음과 같이 비답했다.

“그대가 일찍이 도관(道關)에 계합(契合)하고 학문에 잠심(潛心)하여 조예(造詣)의 공부와 의리(義理)의 정밀함은 본래 깊이 알았던 바이고 우연히 듣게 된 것이 아니었는데, 그대가 어찌 한결같이 지나치게 사양함이 이렇게 심한 데에 이른단 말인가? 그리고 그대의 소장 가운데 과업(科業) 운운한 것은 진실로 또한 지나치다.

퇴계(退溪)·율곡(栗谷)도 유독 과목(科目) 중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내 뜻을 마땅히 그대의 아우에게 유시(諭示)할 것이니, 그대는 신병의 차도가 있음을 기다려서 곧바로 길에 올라 내가 옆자리를 비워두고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1778년(정조 2) 경연관이 되었으며, 1783년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어 원자를 보도(輔導)하였다. 그 뒤 이조참의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정조실록⌋ 7년 조에 유언집이 졸하자, 정조가 이에 하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유신(儒臣)은 내가 모앙(慕仰)하는 바이었으나 내 성의가 부족한 것 때문에 마침내 한 번도 조정으로 불러내어 함께 국가 일을 하게 되지 못했다. 매양 그의 아우가 고감에 따라 그때마다 쏠리고 있는 이 마음을 표해 왔었는데, 어찌 오늘 그가 장서(長逝)하였음을 듣게 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당면한 지금 세상의 도의가 풀려 버리고 민생에 대한 근심이 몹시 다급하므로, 이런 때를 바로잡아 구제해 가는 방책에 있어서 그윽이 임하(林下)에서 독서(讀書)하는 선비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하물며 이 유신은 나이와 덕이 모두 높아 조야(朝野)가 의지하며 중시했었으니, 내가 기대하며 바라게 되는 바가 더욱 어떠했겠느냐? 이제는 그만이게 되어버렸으니 다시 말을 한들 무엇하겠는가? 성복(成服)한 뒤에는 마땅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겠는데, 제문(祭文)도 마땅히 친히 짓겠다. 무릇 은졸(隱卒)에 관한 범절을 한결같이 고 장령(掌令) 김종후(金鍾厚)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연이어 사관이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유언집의 자는 사집(士集)인데, 유언호(兪彦鎬)의 형이다. 젊어서부터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노닐었고,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했었다. 드디어 초복(初服)에 당하여 경학에 통달하고 덕행이 있음으로써 선발되어 벼슬이 이조참의에 이르렀으나 여러 차례 불러도 나오지 않았고, 몸이 고되도록 학문 연구를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 졸하였다.”

 

편서(編書)로는 『오복명의(五服名義)』가 있다. 이는 고금의 예제(禮制)를 참작하여 다섯 가지 상복의 이름과 그에 대한 뜻을 적은 책이다.

정현(鄭玄)·주희(朱熹) 등 중국의 예학자는 물론 김장생(金長生)·박세채(朴世采) 등과 성리학자이며 예학자인 이황(李滉)의 학설을 망라한, 오복에 관한 예설을 집대성한 책이다.

인용된 참고도서는 ⌈주례(周禮)⌋·⌈의례(儀禮⌋를 비롯,⌈가례家禮)⌋·⌈개원례(開元禮)⌋·⌈정화례 (政和禮)⌋·⌈개보례(開寶禮)⌋ 등과⌈당률(唐律)⌋·⌈당예의지(唐禮儀志)⌋·⌈송사예지(宋史禮志)⌋·⌈대명집례(大明集禮⌋·⌈대명회전(大明會典)⌋·⌈상례비요(喪禮備要)⌋ 등 두루 참고하였다.

이 책은 정구의⌈오복연혁도⌋와는 달리 군신관계의 상복부터 다루지 않고 부자관계의 본종복부터 설명하였다. 또한 단순한 도표가 아니라 왜 그러한 상복을 입는지 그 이유와 의의를 설명하였다. 이는 중국의 모방에서 벗어나 독자적·의식적으로 오복의 예설을 준행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