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규(鄭冕奎, 1850-1916)


 

정면규(鄭冕奎, 1850-1916)                                  PDF Download

 

면규(鄭冕奎, 1850-1916)는 경상도 합천의 삼가현 출신으로 유학자 노사 기정진의 제자이며, 기정진에게 성리학을 배운 정재규(鄭載圭)의 사촌 동생이기도 하다. 그는 사촌 형인 정재규로부터 기정진의 학문을 이어받아 주리설(主理說)을 더욱 발전시키고, 한주학파(寒洲學派)의 학자들과도 폭넓게 교류를 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1850년(1세, 철종1년)에 합천의 삼가현 묵동마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주윤(周允) 호는 농산(農山)이다. 아버지는 정방찬(鄭邦纘)이며, 사촌 형 정재규(鄭載圭, 호 노백헌老栢軒, 1843-1910)는 대유학자 노사 기정진의 대표적인 제자였다. 기정진은 순창(전라북도) 출신의 성리학자로 리일원론적(理一元論的) 세계관에 입각하여 리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한 학자이다. 그는 특히 태극(太極)의 본래 모습은 오상(五常)의 리(理)에 불과하다고 보고, 인성(人性)을 초월하여 따로 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기정진의 제자인 노포(老圃) 정면규(鄭冕奎, 1804-1868)와 초계 정면규(鄭冕奎)는 한자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이다. 노포 정면규는 본관은 진주이고 삼태(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下古里)에서 태어났다.

1855(6세, 철종6)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어린 정면규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려서 부친을 잃었지만, 네 어머니가 살아계시니 참으로 다행이다. 나는 네 어머니가 너를 반드시 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네 어머니처럼 정숙하면서도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부지런하며 효성이 깊고 자애로운 사람은 본적이 없다. 너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어라.”(⌈농산문집⌋15권「先妣孺人密陽朴氏遺事」)

어린 정면규는 그러한 할아버지의 말씀을 항상 잊지 않았다. 가족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커서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사촌 형 정재규를 따라 학문에 정진했다. 그가 목표로 삼은 ‘위기지학’이란 ‘위인지학(爲人之學)’ 즉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학문과 구별되는 것으로, 자기 수양을 위주로 한다는 뜻이다. 대인관계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며, 선현의 학문을 스스로 실천해나간다는 뜻이다.

학문이 깊어지자 사촌형 정재규는 정면규를 데리고 장성으로 가 기정진에게 소개시켰다. 정재규의 학문 정도를 살펴본 기정진은 “좋은 재주를 가진 선비다.”라고 칭찬하였다. 그곳에서 수일을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온 정재규는 더욱 학문에 정진하고 기정진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강학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896(47세, 고종 33), 단발령이 실시되었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형 정재규가 “이는 우리 선비들을 모두 죽이려는 징조다. 죽어야 된다면 차라리 한 곳에 모여서 죽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정면규가 그 뜻을 받아 실행하려고 하였으나 단발령 실시가 느슨해져 포기했다.

1901(52세, 광무 5), ⌈노사문집⌋이 간행되자 일부 제자들이 노사 기정진의 학설이 율곡의 학설과 다르다고 ⌈노사문집⌋ 폐기를 주장했다. 기정진은 말년에 「외필(猥筆)」 등의 문장을 써서 자신의 주리설(主理說)을 더욱 강하게 발전시켰다. 율곡은 ‘이기묘합(理氣妙合)’을 주장했으나 주기론적인 경향이 강했다. 정면규는 이러한 기정진의 학설을 옹호했다.

1905(57세, 광무 9), 11월 17일 일본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당시 ‘한일협상조약’이라고 불린 이 조약은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불평등조약이었다.

정면규는 “편하게 앉아서 관망하는 것은 의리에 맞지 않다.”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고 사촌형 정재규와 함께 주변 선비들을 이끌고 최익현(崔益鉉)을 찾아가 막을 방법을 논의했다. 최익현은 당시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나중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거병하여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정면규도 충남 노성(魯城)에서 의거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외부의 방해로 실행하지 못했다. 이후 장성으로 가 스승 기정진 묘소에 참배하고, 산중에 은거하면서 ⌈노사집⌋을 읽으며 성리학 연구에 몰두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그는 주자의 학문만이 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최익현은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된 뒤 그곳에서 사망했다.

1911(63세, 일제시대), 항상 곁에 모시고 따랐던 사촌형 정재규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세였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억누르고 정해진 예법에 따라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렀다.

1916(67세, 일제시대)에 사망했다. 경덕서원(景德書院)에 배향되어 있으며 ⌈농산문집(農山文集)⌋ 15권 8책이 전한다. 이 문집은 1920년에 제자 남정우(南廷瑀)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농산문집(農山文集)⌋에는 시 121수, 문장 397편, 잡저 17편 등이 수록되어 있고, 제문 26편, 묘지명 20편, 묘표 10편, 묘갈명 22편, 기타 행장, 유사 등 많은 분량의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시문은 한말의 격변기에 민족적 주체의식을 드러낸 작품이 많다. 또 기정진(奇正鎭), 정재규(鄭載圭), 최익현(崔益鉉), 기우만(奇宇萬) 등 300여명과 주고받은 서신이 수록되어 있고, 서(書)에는 스승 기정진과 주고받은 문답을 적은 글, 사촌형 정재규와 주고받은 문답을 적은 글 등이 있고, 경전·이기설·인물성론(人物性論)·예설(禮說)·역리(易理)·시사(時事) 등에 관한 논술이 많다. 그는 스승 기정진의 주리론을 계승하여, 모든 기의 작용이 결국은 리(理)로부터 명령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하고, 오직 리만이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유리론(唯理論)을 적극 천명하였다. 그는 기정진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촌형 정재규로부터 리를 중시하는 학풍의 영향을 받았으나 또 한편으로는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 1818-1886)을 따르는 한주학파(寒洲學派)의 학자들, 예를 들면 곽종석(郭鍾錫, 1846-1919), 허유(許愈, 1833-1904) 등과도 폭넓게 교류를 하였다.

<참고자료>

강동욱, 「농산 정면규」, <경남일보>, 2006.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