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헌찬(任憲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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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고종 13)∼1956년. 근현대의 유학자.

1876년 충청도 전의에서 부친 임좌모(任佐模)와 모친 경주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갑오개혁, 을미사변, 경술국치, 남북분단 등 격동기를 살다가 6.25 한국전쟁 뒤인 1956년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풍천이며, 자는 옥여(玉汝), 호는 경석(敬石)이다. 풍천 임씨는 명문가로 유명하다. 특히 조선 후기에 임성주(任聖周)는 성리학으로 저명하였고, 가깝게는 기호학파 낙론계열의 임헌회(任憲晦)가 산림의 종장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임헌찬의 부친은 초야에 묻혀 지냈지만 아들의 교육을 위해 무척 헌신적이었다. 눈이 많이 올 때면 항상 일찍 일어나 길에 쌓인 눈을 쓸어 아들이 서당에 가는데 조금도 지장이 없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1895년 명성왕후 민씨가 왜인들에게 시해를 당하자, 이후로 늘 소복을 입었으며 거실에는 ‘신와(薪窩)’ 두 글자를 써 붙이고 ‘와신상담’의 뜻을 새겼다고 한다.

‘와신상담’은 섶에 눕고 쓸개를 씹는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딤을 이르는 말이다. 일제로부터 당한 굴욕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임헌찬이 일생토록 시세에 영합하지 않고 올곧게 살면서 일제에 저항하였던 것은 바로 부친의 이러한 선비정신과 의리사상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다.

임헌찬은 처음에 과거시험을 위해 공부를 준비하였으나 갑오개혁과 을미사변 등 잇단 사변을 보고서 벼슬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였다. 그 뒤 학문을 계속하다가 1919년 6월에 계화도에 있는 전우에게 편지를 써서 문인이 되었다. 그는 편지에서

“동남으로 떠돌아다니느라 44년의 시간을 허비하였다.”

라고 하면서 제자의 반열에 끼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는 늘 자신을 늦게 학문을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만진자(晩進者)’ 또는 ‘만급제자(晩及弟子)’라고 칭하면서 전우와 사제간의 재회가 늦은 것을 아쉬워하곤 하였다. 전우는 임헌찬의 재주와 학문됨을 아껴서 거실 이름을 경석(敬石)이라고 지어주었다. ‘경석’은 석담(石潭, 율곡)을 공경하고 우러러보라는 의미이니, 제자인 임헌찬이 일생동안 나아가야 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 뒤 1922년 전우가 세상을 떠났으니, 전우의 가르침을 받은 기간은 3년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문들은 한결같이 임헌찬을 ‘경험이 많고 세상일에 밝으며 순박하고 인정이 두텁다’고 칭찬하였다. 그는 전우 문하에서 많은 인재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오진영(吳震泳)․송의섭(宋毅燮)․이유흥(李裕興) 등과 절친하게 지냈다.

임헌찬은 8권의 문집을 남겼다. 이 가운데 「농암잡지」와 「노주잡지」를 본받은 ‘잡지(雜誌)’와 상당한 분량의 서신이 있다. 그러나 행장․연보․묘지명 등이 수록되어 있지 않아 그의 생애와 학문을 자세히 살피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다행히 동문인 유영선(柳永善)이 지은 ‘묘지명’과 권순명(權純命)이 지은 ‘묘갈명’, 정헌태(鄭憲泰)가 지은 ‘행장’이 전해짐으로써 그의 생애를 참고할 수 있다.

그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일생동안 유교를 지키고 선양하며 실천하는 삶으로 일관하였다. 홍직필(洪直弼)의

“글 읽는 소리가 끊긴 곳에 집안의 명성도 끊어진다.”

는 말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장차 이 땅에서 유교의 종자가 없어지게 될 것을 염려하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 ‘독실하게 학문을 좋아하고 죽음으로써 도를 지키며 위태로운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산림에 은둔하여 후학을 가르치는 강학의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당시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유교계의 동향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1930년대 초에 안향의 후손인 안순환(安淳煥)이 꺼져가는 유교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녹동서원을 세우고 전국 각지의 우수한 자제들을 선발하여 차세대 유학자로 양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처사를 크게 칭송하였다. 더욱이 안순환이 1930년 중국 곡부에 있는 공자묘가 전란의 화를 입었을 때 선대 성현들의 영혼을 위무하고자 유생들을 파견한 것에 대해 “천하가 의롭게 여겼다”고 평가하였다.

1920년 국어학자 권덕규(權悳奎)가 ≪동아일보≫에 「가명인 두상에 일봉(假明人 頭上에 一棒)」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가짜 명나라 사람 머리에 몽둥이 한 대’라는 의미로, 명나라를 숭배하는 조선 후기 유신들과 사림을 비판한 것이다. 권덕규는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고, 그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 의종(毅宗)의 연호를 고집하던 당시의 유학자들을 가리켜서

“심장도 창자도 없는 지나(중국) 사상의 노예”

라고 표현하며,

“충효의 가르침을 제 땅과 제 민족을 위해 쓰지 아니하고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다른 놈에게 바치니, 그 더러운 소갈머리야 참으로 개도 아니 먹겠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한국 유교계의 사대모화(事大慕華), 즉 ‘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흠모하고 따르려는 사상’적 성향을 비판한 글로, 당시 유교에 대한 불만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전국 유림의 거센 저항이 일어나 ≪동아일보≫ 불매운동까지 벌어졌으며, 박영효 동아일보 사장이 물러나기에 이르렀다.

유교에 대한 이러한 감정은 뒤로 오면서 더욱 적대감으로 발전하였는데, 1931년 변호사 이인(李仁)이 한 잡지에서 공자를 ‘공부자(孔腐子)’ 또는 ‘공구(孔仇)’라고 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러한 일에 대해 당시 전우 문하에서는 격하게 반발하였다. 왜냐하면 권덕규가 송시열과 전우를 ‘사대모화’의 화신으로 지목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임헌찬은 분연히 일어나 가까운 동학들은 물론 각지의 유림에게 통지를 보내 이들을 성토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각종(李覺鍾)과 이인(李仁) 두 난적이 공자를 ‘공부자(孔腐子)’ 또는 ‘공구(孔仇)’라고 운운하였는데, 차마 무슨 말을 하리요. 그들의 소행을 살펴보니 실로 박영효와 권덕규 두 난적과 동일한 죄악이다. 머리를 베고 살을 저미더라도 죄를 씻기에 부족하다.”

임헌찬은 성현을 모독한 죄야 말로 난적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이런 무리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울분을 토로하였다.

임헌찬의 성리설은 율곡학파의 ‘심시기(心是氣)’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성즉리(性卽理)’의 대명제를 부각시켜 전우의 ‘성사심제(性師心弟)’와 ‘성존심비(性尊心卑)’설을 계승한다. 전우의 ‘성사심제’설은 오희상의 ‘성이 심의 주재가 된다(性爲心帝)’는 설에서 나왔고, ‘성이 심의 주재가 된다’는 것은 율곡의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설에 근거를 둔다.

성리학의 대전제인 ‘성즉리’와 기호학파의 전통인 ‘심시기’를 하나로 연결시킨 것이 바로 전우의 ‘성사심제’설이다. 임헌찬은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설을 배우는 사람들이 반드시 준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임헌찬은 『대학』에 나오는 명덕(明德)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당시 일부 학자들이 명덕을 성 또는 리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하고, 역대로 명덕을 성으로 본 전례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주자가 『대학장구』에서 명덕에 대해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불매하여 온갖 이치를 갖추고서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 而應萬事者也.)”

라고 하였는데, 만약 명덕을 성(리)으로 해석하면 ‘리가 리를 갖춘다’는 말이 되므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율곡어록」에 나오는 명덕의 주자 주석 가운데

“‘구중리(具衆理)’를 성이라 한 것은 온당하지 않고 심이라 해야 한다”

는 율곡의 말에 근거하여 ‘명덕은 곧 심이요 심은 곧 기이다’라고 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결국 명덕을 리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며, 이진상과 같은 심학자들이 명덕을 리로 해석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명덕은 기인 심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명덕 역시 기의 영향 하에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경석 임헌찬의 학문과 사상」(최영성, 『간재학논총』4, 간재학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