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金命喜)1788~1857


김명희(金命喜)                                                             PDF Download

 

1788(정조 12)~1857(철종 8) 조선 후기의 학자.

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원(性源), 호는 산천도인(山泉道人) 또는 산천(山泉)이다. 김노경(金魯敬)의 아들이며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동생이다. 송계간(宋啓榦)의 문인이다.

1810년(순조 10) 진사(進士)가 되고 벼슬은 현령(縣令)에 그쳤다.     1822년(순조22)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일행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해동 금석원(海東金石苑)」의 저자인 유희해(劉喜海)와 진남숙(陣南淑) 등과 교분을 맺고 귀국 후에도 그들과 편지·글씨를 교환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요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그의 형이며, 그의 형인 김정희와 함께 글씨가 뛰어났다. 김정희는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또한 그는 난초도 잘 그렸다.

특히 김명희는 ‘차 만드는 법’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둔사 승려인 향훈에게 채다와 제다에 이르기까지 6개 항목에 걸쳐 소상하게 「다법수칙(茶法數則)」을 써 주었다.  향훈에게 채다(采茶)와 제다법(製茶法)에 대해 6개 항목에 걸쳐 써준 내용이다.
이것은 초의의 「다신전(茶神傳)」과 함께 조선 차문화사의 대단히 중요한 글이다.  아무튼 김명희가 인용한 차 관련 서적들을 보면 ‘대관차론’, ‘복원별록’, ‘다소’, ‘다전’ 등 차의 고전들로서 차에 관한 지식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김명희는 왜 향훈에게 차를 만드는 법을 소상하게 설명하려고 했을까. 여러 추측을 해볼 수 있지만 이는 결국 사찰에서 차 만드는 법이 제대로 전수되어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선의 주류문화는 어디까지나 선비문화였고, 차문화의 전통을 그나마도 선비들에게서 찾아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라나 고려조에는 사찰에서 선진 외래문화가 융성했지만 조선조에서는 사찰이 주류에서 밀려난 까닭에 차문화도 변방에 속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차문화는 선비사회를 통해서 보지 않으면 쉽게 단절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다법수칙」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용은 채다(採茶)와 제다(製茶)에 관한 여섯 항목의 짤막한 글이다. 글 끝에는 다음과 같은 후기가 적혀 있다.

“다법 몇 항목을 써서 견향(見香)에게 보인다. 이 방법에 따라 차를 만들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면 부처님의 일 아님이 없을 것이다. 산천거사.”

여기에서의 산천은 바로 김명희를 말한다.  김명희가 견향(見香), 즉 대둔사 승려 향훈(香薰) 스님에게 써준 것이다. 여기 적힌 방법대로 차를 만들어서, 이를 통해 중생을 이롭게 하고 나아가 부처님 전에 공덕을 쌓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여기에 적힌 여섯 항목의 내용은 김명희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권27에 실린 「만학지(晩學志)」권5, 「잡식(雜植)」조의 차 관련 내용 중에서 간추린 것이다.  김명희가 직접 중국 다서를 보고 베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원문을 대조해보니 서유구가 옮겨 적으면서 생략한 대목이나 원본과 다르게 적은 몇 글자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서유구의 저술에서 추려 적은 것이 분명하다.  김명희의 「다법수칙」은 송대(宋代)와 명대(明代)의 5종 다서에서 한 두 항목을 초록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1, 2, 3, 5는 모두 찻잎 따는 요령과 시기를 다룬 채다(採茶)의 내용이고, 4와 6은 차덖기에 관한 내용이다.  그밖에 보관이나 찻물, 차 끓이기에 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 글이 단지 차를 따서 덖는 과정에 도움을 주려고 필사된 것임을 말해준다.

다법수칙」의 채다법(採茶法)와 초다법(炒茶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채다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루 중에는 동트기 전에 찻잎을 따야 한다.

둘째, 찻잎을 딸 때는 손톱으로 끊어야지 손가락으로 짓무르게 하면 안 된다.

셋째, 일년 중에는 곡우(穀雨)를 전후한 시기가 채다의 가장 적기다. 시기가 좀 늦더라도 맛이 밴 뒤에 따야 향이 좋다.

넷째, 잎은 연녹색에 둥글고 도톰한 것이 상품이다.

다섯째, 채취한 찻잎은 맑은 물에 즉시 담궈두는 것이 좋다.

 

또한 초다법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여린 잎을 오래 덖거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덖으면 안 된다.

둘째, 한 솥에 한꺼번에 덖는 분량은 4냥 이하가 적합하다.

셋째, 화기가 지나쳐서 태우면 절대로 안 된다. 넷째, 쇠솥의 날 비린내가 배거나 기름기가 스며도 안 된다.

다섯째, 찻잎을 덖을 때는 나뭇가지를 써야지 통나무나 잎을 쓰면 안 된다.

여섯째, 찻잎을 고루 섞어 주려면 손가락에 대나무를 깍지 끼워 쓰면 좋다.

일곱째, 차를 덖다가 향기가 올라 올 때 덖기를 멈추어야 한다.

여덟째, 곁에서 부채질을 해서 열기를 걷어내 주어야 한다.

이상은 김명희가 향훈 스님에게 준 「다법수칙」 6항목의 내용이다.

내용은 찻잎 채취의 방법과 시기를 적은 채다법과, 찻잎을 덖을 때 주의 사항을 적은 초다법으로 구분된다.  이 글은 향훈에게 채다와 초다의 방법을 일러주기 위해 김명희가 중국 차서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다. 이는 앞서도 말했듯이 초의를 비롯하여 여러 승려들이 다투어 차를 만들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렇다 할 제다법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 조선 차문화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정작 김명희 자신은 제다에 경험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차의 생태나 성질도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국의 다서를 읽음으로써 그 과정을 체득했고, 이를 향훈에게 요령있게 가르쳐 주어 그가 만든 차 맛이 한결 더 높은 수준에 이르도록 기여한 공이 있다. 실제 김명희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다시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저 이론으로 섭렵한데 그친 서유구에 비해 김명희의 「다법수칙」은 바로 향훈에게 전해져서 실전에 적용되었다. 초의의 「다신전」과 함께 김명희의 「다법수칙」이 차문화사에서 의미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숭정3경술증광별시문무과전시방목(崇禎三庚戌增廣別試文武科殿試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