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저(姜敏著,1651-1705)


 

강민저(姜敏著,1651-1705)                                  PDF Download

 

1651(효종 2)∼1705(숙종 31).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관은 진주(晉州). 자는 내숙(來叔), 호는 모산재(茅山齋)로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茂長) 출신이다. 아버지는 함양군수를 지낸 강필주(姜弼周), 어머니는 황주 변씨(黃州邊氏) 변태윤(邊泰允)의 딸이다. 강희맹(姜希孟)의 8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 강계오(姜繼吳)가 전라남도 영광에서 대대로 살다가 처가와 외가가 있는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 정착하였다.

강민저는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의지가 굳고 문장이 탁월하여 37세 때인 1687년(숙종 13) 정묘소(丁卯疏)를 올려 민생 문제와 풍속의 퇴폐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정묘소’는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宋時烈)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에 대해 자세하게 열거하여 스승인 송시열을 변호한 글이다.

43세 때인 1693년(숙종 19)에는 「자경문(自警文)」을 지었다. 율곡도 「자경문」을 지은 적이 있는데,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20세 되던 해 봄에 외가인 오죽헌으로 돌아와, 자신이 살아갈 인생의 이정표를 정립하고, 그 목표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워 스스로 경계하는 글이었다. 율곡의 글은 11조항으로 되어있었다. 먼저 뜻을 크게 가져야 한다는 입지(立志),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므로 과언(寡言), 잡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심(定心),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근독(謹獨),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일을 처리할 때 적용하기 위한 독서(讀書), 이로움을 탐하는 마음을 살피기 위한 소제욕심(掃除慾心), 해야 할 일은 정성을 다하라는 진성(盡誠), 항상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고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정의지심(正義之心), 스스로를 돌이켜 깊이 반성하고 남을 감화시키려는 감화(感化), 충분한 수면(睡眠), 꾸준히 노력하는 용공지효(用功之效)가 있다.

이듬해에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이 다시 희빈으로 강하될 때였다. 강민저는 온건하게 처리하려고 하는 남구만(南九萬)을 장희재(張希載), 민암(閔黯)과 함께 죽여야 한다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 서인으로서 1694년(숙종 20)에 장희빈을 옹호하던 남구만을 탄핵하다가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박탈되었고, 이듬해 다시 남구만 일파의 죄를 규탄하는 소를 올렸다가 진도(珍島)에 유배되었으나 그로 인해 ‘곧은 선비’라는 칭호를 얻었다.

잠시 강민저가 남구만 등의 죄를 규탄하며 임금에게 올린 상소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군신과 부자의 의리는 천지의 이치이고 사람의 윤리입니다. 그러므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있어 임금은 아버지와 같고 왕후는 어머니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은 세상의 도의(道義)가 비록 땅에 떨어졌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천성은 본시 없어지지 않았으니 인현왕후께서 이미 폐출되셨다가 도로 복위(復位)되실 적에 기뻐하고 경축하는 마음이 귀천과 중외(中外)의 차이가 있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천리와 인륜에서 나온 마음입니다. 만약 혹시라도 자식으로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해치게 되고, 신하로서 임금과 모후(母后)를 해치게 된다면 그의 죄는 진실로 천지 사이에서 달아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흉악한 사람이 터무니없는 것을 날조하여 글로 표현해서 버젓이 대궐 안에 흘러들어가서 예람(睿覽)까지 거치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가짐을 논한다면 곧 대역무도하니, 이는 바로 춘추(春秋)에서 말한 난신적자로 누구라도 죽여야 할 자들입니다. 다시 국모(國母)를 책봉(冊封)하던 날 맨 먼저 두 사람의 머리를 베어 도성(都城) 문에 내건 뒤에야 천지의 대의(大義)를 밝히고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할 수 있을 것인데, 아직도 그들의 죄악을 밝히지 않아 생사(生死)의 중간에 두고 있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러한 상소문을 보면 그의 언사가 몹시 강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민저는 3년 만에 풀려 나온 뒤에는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여러 번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혼탁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수 간에 모산초당(茅山草堂)을 짓고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등 당대의 명유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시문을 남겼다. 1705년 향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경학과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에 역점을 두어 연구하였다. 남구만에게 보낸 서찰인 「상남상(上南相)」은 18장에 달하는 장편의 명작이며, 또한 우국충정의 내용이 담긴 많은 시를 남겼다. 저서로는 모산집(茅山集)이 있다.

모산집은 시문집으로 모두 3권 2책인데, 목활자본이다. 1911년 7세손인 강연수(姜淵秀)에 의하여 편집하여 간행되었다. 권두에 송병순(宋秉珣)의 서문과 권말에 방손인 천수(天秀)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민대학교 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179수, 권2에는 소 4편, 권3에는 서(書) 9편, 부록에는 행장·묘표·동국문헌명신록(東國文獻名臣錄) 등이 있다. 시의 「우차차산견증(又次次山見贈)」은 안연(顔淵)의 안빈낙도의 정신을 본받아서 수행하는 이들을 찬양한 것이다.

이 가운데 「갑술소(甲戌疏)」․「을해소(乙亥疏)」는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와 후궁인 장희빈(張禧嬪)에 대한 일련의 사건에 관하여 적은 내용이다. 「정묘소(丁卯疏)」는 숙종 당시의 퇴폐적인 풍속에 관하여 정화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서 가운데 「상남상(上南相)」은 인현왕후와 장희빈과의 처리가 부당하므로, 당시의 영의정인 남구만(南九萬)을 규탄함과 아울러 6조목의 소신을 밝힌 내용이다. 부록의 「동국문헌명신록(東國文獻名臣錄)」은 기사사화 때에 화를 입은 신하들의 명부를 열거하고, 그의 죄상을 기록한 것이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모산집(茅山集), 숙종실록(肅宗實錄) 등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