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현(趙光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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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현(趙光玹, 1553년〜1635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의병장이다. 선조 임금 때 진사가 되었으며 제릉참봉(齊陵參奉), 금성현령(金城縣令)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동생과 함께 율곡(栗谷) 이이(李珥)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어 동문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동인의 공격을 받아 탄핵을 당하였을 때는 이귀(李貴) 등과 상소문을 올려 적극 변호하다 자신도 탄핵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싸우고, 선조 임금을 수행하며 의주까지 가는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정묘호란 때도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553(1세)
명종 8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계진(季珍), 호는 금탄(琴灘)이다.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문하생 중 가장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부친은 여절교위(勵節校尉)‧참봉 조사필(趙士弼)이며, 형은 조광숙(趙光琡), 동생은 조광위(趙光瑋)이다. 동생과 함께 율곡(栗谷) 이이(李珥)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율곡에게 글을 배울 때 그는 학문에 조예가 깊어 율곡의 칭찬을 들었으며 수백명의 율곡 문하생 중에 가장 주목을 받았다.

1582년(29세)
선조 15에 과거 식년시(式年試)에서 합격하여 2등으로 진사가 되었다.

1585년(32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成渾) 등이 동인의 공격을 받아 탄핵을 당하자 그들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후 제릉참봉(齊陵參奉)과 금성현령(金城縣令) 등을 지냈다.

1587년(34세)
조광현은 이귀(李貴) 등과 함께 스승 이이가 억울하게 모함을 받는 일을 변호하기 위해서 상소를 하였다. 당시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이 점차 치열해지고 율곡과 우계가 동인들의 근거 없는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관리들이 중간에서 상소문을 막았는데 율곡 이이의 조카 이경진(李景震)이 다시 상소문을 작성하여 조광현 등이 올린 상소문과 같이 올렸다. 임금이 이귀를 불러 “너의 상소문을 보니 ‘경박하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다투어 일어나 억지로 말을 끌어다 붙였습니다. 당시 심의겸(沈義謙,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역자주)의 문을 출입하면서 조석으로 서로 어울렸고, 노비처럼 비굴한 태도를 가진 무리들이 몸을 굽혀 들어가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고 하였다. 또 ‘전일 심의겸에게 달려가 아부하던 무리들이 일시에 동인(東人)들에게 정성을 바치면서
1587년에 올린 조광현의 상소문(<伸寃牛栗兩先生疏>)
반기를 들고 심의겸을 공격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감추는 일이 없는 것이 옛날의 도리이다. 너는 낱낱이 들어 대답하라.”고 명했다. 이에 이귀는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세상을 떠난 스승 이이는 평생을 참됨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번 시론(時論)에 거슬리자 그릇된 비방이 백출(百出)하여 그것이 날마다 새롭게 생기고 불어났습니다. 이는 인심이 날로 격해져 사론(士論)이 허물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은 은혜를 헤아리지 않고 다만 이이(李珥)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성세(聖世)에 밝힐 수 있다면 신이 비록 만 번 죄를 받아 죽더라도 역시 마음에 달게 여기겠습니다. 성상(聖上)께서 하문하신 전교를 보니, 이는 바로 저희들이 가슴에 품은 말을 모두 속이지 않고 아뢸 기회입니다. 신들이 상소문에서 이른바 ‘경박하고 나서기 좋아한다.’는 사람은 백유양(白惟讓)ㆍ노직(盧稙)ㆍ송언신(宋言愼)ㆍ이호민(李好閔)ㆍ노직(盧稷)입니다. 이런 무리들에 대해 만약 두루 진달(進達)하고자 한다면 어찌 이 몇 사람에 그치겠습니까. 전일에는 심의겸과 관계를 맺고 있다가 그가 권세를 잃자 도리어 심의겸을 공격한 자들은 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ㆍ윤의중(尹毅中)입니다. 이 자들의 경우는 족히 이를 것도 없거니와 또 심의겸과 서로 아는 처지로 이이에 비할 바가 아닌 자로서는 이산해(李山海)와 같은 자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일 심의겸을 알았다는 이유로 이이의 죄를 삼는다면 먼저 이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단지 시론(時論)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들을 공격하지 아니하고 이이만을 논죄하니, 이것이 과연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겠습니까. 신들이 이산해(李山海)에게 유감이 있는 것은 이이가 심의겸과 같이 결탁하여 함께 일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산해는 반드시 알 것인데, 이산해는 이이와 평생을 사귀어 온 벗이건만 이이가 무고당하는 것을 좌시하며 지금까지 임금님의 앞에서 그 본심을 밝히는 말 한마디도 없습니다. 이는 필시 구원(九原)의 혼령이 유감스러워할 일입니다. 이산해가 심의겸에게 준 시(詩)에 따르면 ”봄이 찾아온 서울에서 거듭 서찰을 받아 보고, 산길 어두운 밤에도 익숙히 서로 맞이하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심의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글이겠습니까? 이것이 신들이 상소문에서 이른바 ‘조석으로 서로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노비처럼 비굴한 태도를 지녔다.’는 자는 정희적(鄭熙積)입니다.”
선조 임금이 이 글을 읽고 ‘너희들의 뜻을 잘 알았다’고 답하였다.

1592년(39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형인 참봉 조광윤(趙光玧)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월천군(月川君)의 군사와 호응하여 적들을 참획(斬獲)한 공을 세웠다. 또 선조 임금을 보위하여 의주까지 가는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601년(48세)
11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627년(74세)
인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1635년(82세)
사망하였다. 아들로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한 조종전(趙宗傳)과 조종칙(趙宗侙)이 있다. 해주(海州)의 소현서원(紹賢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금탄유고(琴灘遺稿)』가 있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1587년 3월 7일, 8일자 기사
김동섭, 「조광현(趙光玹)」,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