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경(李基敬:1713~1787)


이기경(李基敬:1713~1787)                                PDF Download

 

남(湖南)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백심(伯心)이다. 1713년(숙종39)에 나주(羅州) 도림의 외가(外家)에서 태어났고, 전주 오목대(梧木臺, 고려 우왕 6년(1380)에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이성계가 개선하던 길에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1900)에 비석을 건립했는데,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비문은 고종황제가 직접 쓴 친필을 새긴 것이다. 이목대는 이성계의 5대 할아버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전주 이씨들은 이안사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다가, 함경도로 이사했다고 한다. 고종 광무 4년(1900)에, 이곳이 목조가 살았던 터임을 밝힌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고종의 친필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 비각은 당초 오목대의 동쪽 높은 대지 위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공사로 이 곳으로 옮겨 세웠다.<위키백과사전>)

아래에 있는 본가(本家)에서 성장하였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의 사연이 있었던 오목대 아래에 산다하여 아호(雅號)를 스스로 목산(木山)이라 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문장(文章)에 조예가 있었으나 일찍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꺼려하여 24세 때 도암(陶菴) 이재(李載)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덕에 그의 스승으로부터 정치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 핵심 내용은 곧 관직에 집착하지 말 것,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 시세(時勢)를 헤아려서 처신할 것 등이었다.

그는 27세가 되던 다소 늦은 나이로 1739년이 되어서야 문과 정시(文科庭試)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1746년(영조22)에 병조 정랑(兵曹正郎)에 임명되고 사관(史官)을 겸하였다. 이후, 이조 정랑(吏曹正郎),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 사간(司諫), 좌부승지(左副承旨), 대사간(大司諫), 충청감사(忠淸監司), 황해감사(黃海監司), 대사간(大司諫),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또 영조(英祖)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였지만, 영조는 그를 특별히 총애하였다. 영조가 자신과 이기경을 후한(後漢)시대 광무제(光武帝)와 엄자릉(嚴子陵, 광무제와 유년기에 동문수학하였던 절친한 친구였다. 광무제가 그의 재능을 높이사서 관직을 제수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수용하지 않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면서 여생을 마친 사람이다.) 에 비유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영조가 그를 얼마나 아끼고 총애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다. 그가 3도(三道) 감사(監司)를 역임한 뒤에 낙향(落鄕)하여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영조는 간간히 그의 근황을 묻곤 하였는데, 측근에 있던 신하가 아뢰기를,

“목산은 고향에서 글을 읽으며 지낸다고 합니다.”

라고 아뢰자, 영조가 크게 노여워하여 이르기를,

“어찌 그러한 인재가 한가하게 글만 읽고 지낸단 말인가? 즉시 조정의 빈자리를 찾아 목산에게 제수하라.”

라고 엄한 분부를 내렸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영조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은 탓에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한동안 유배생활을 겪기도 하였다.

그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함께 등용하는 것은 부당하며, 의도적 형식에 치우쳐서 붕당(朋黨)으로 인한 화가 커졌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영조의 탕평정책(蕩平政策)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상과 소신을 밝힐 때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의 강직함을 나타내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가 있다. 영조가 특별히 아끼는 마음으로 벼슬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특별채용이 아닌 정당한 시험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던 것이다.

안성 군수(安城郡守)로 재임할 당시에 겨우 4일이 지났는데, 우윤(右尹)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이를 두고 목산은 부당한 처사라고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일로 인해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임금의 명을 거부하였다는 죄목으로 금오(金烏)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다음날 그를 다시 등용하였다. 그럼에도 연거푸 제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다른 신하들은 다시 등용을 거절하는 중죄임을 거론하였다.

이를 두고 영조는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를 쉽게 여긴다
[難進易退]’

가 분명한 사람이니, 너무 강박하지 말라고 이르며 특별히 그를 불러 격려하였다. 여기에서 소신을 위해 자신의 관직을 버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목산의 고집스러움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겠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또 동료 관원을 구원하는 경우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의리에 입각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우윤(右尹)으로 있을 때 권진응(權震應)을 구원하는 상소에서도 그러한 면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영조실록》 47년 4월조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 조정은 전적으로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중세(中世)에는 명유(名儒)가 배출(輩出)되어 나라의 보배 구실을 하였으며, 울연(蔚然)하여 한 시대의 현인(賢人)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공명과 이익을 추구하는 학설이 성행하자 세속(世俗)으로 전해지는 피해가 심해져 지금은 독서(讀書)하는 종자(種子)가 끊이지 않아 겨우 보존하기는 하지만 밑바닥에 있는 치양(穉陽)과 같은 격이니 이를 부지하게 하고 보호한 연후라야 거의 원기(元氣)를 만회(挽回)할 수 있게 되어 망하여 없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병인년에 전하(殿下)께서 유현(儒賢)을 초연(招延)하여 특별히 총재(冡宰)로 임명하였는데, 신이 그 당시 연중(筵中)에서 소환(小宦)에게 부축하여 궁전(宮殿)에서 내려가도록 명하는 일을 직접 보고서 신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감탄하기를 전하께서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융성함이 여기에 이르렀다고 여겼었습니다. 그러다가 계미년에 이르러 또 삼가 듣건대 성상(聖上)께서 산림지사(山林之士)를 예(禮)로 대우함이 아주 끊어졌다고 하며 또 지난해와 같은 대우에 비교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보고 듣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며 용동(聳動)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애석합니다.

그 말하는 바가 성상의 마음을 씻지 못하여 은혜와 예우를 끝까지 못하도록 만들게 되어 미워하고 냉대하며 사기를 꺾이게 하여 일생을 마치게 하였고, 기타 남의 죄에 연좌된 것을 지금까지 석방하지 않아 경의(經義)를 연구하며 도(道)를 지닌 인사(人士)로 하여금 다시는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도록 하셨는데, 전하의 평소 유술을 숭상하던 마음이 어찌하여 앞뒤가 그렇게도 판이(判異)하며, 미워하고 좋아함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어긋나서 행동거지가 합당함을 잃어버린 데로 돌아가게 되셨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말이 나의 뜻에 거스름이 있거든 반드시 도(道)에 구하며
〈마음에 거슬린다는 것으로 거절하지 말며〉

말이 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있거든 반드시 도가 아닌 것에 구하라.
〈뜻을 따른 것이라 하여 들어주지 말라〉’

고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인군(人君)이 말을 듣는 성대한 절차입니다. 더구나 산야(山野)에서 진언(進言)하는 체모는 자체가 조신(朝臣)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대체로 그들이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예우(禮遇)에 감격하여 숨김이 없는 의리를 다하려고 하는데 이는 그들의 본심(本心)이므로 성실하고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이니 진실로 용서하셔야 하고 처벌해야할 일은 아닙니다. 신은 아마도 일월(日月)이 우연히 비춤을 빠뜨리는 경우가 있어도 천지(天地)에는 오히려 유감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을 듯합니다.

지금부터 이뒤로는 암혈(巖穴) 사이에서 빛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면서 거침없이 유자(儒子)라는 이름을 버리고 숨기게 되니, 이런 풍토를 자라게 하고 그치지 않게 한다면 사학(斯學)이 어떻게 끊어지지 않겠으며, 세상의 도의가 쇠약해지고 허물어지며 사람의 마음이 잘못된 곳으로 빠져드는 것을 장차 어떻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고 지나친 계교로는 오늘날의 국사(國事)는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에 한 가닥의 머리털까지도 병(病)이 들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중에서도 원기(元氣)가 떨어지고 빠뜨려진 것이 현재의 가장 위태롭고 나쁜 증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하께서 한번 마음을 바꾸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초선(抄選)하는 제도를 설치하고 예(禮)로써 용서하는 것은 바로 국조(國朝)의 아름다운 제도이니 설령 한마디 말의 망발(妄發)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마 갑자기 최절(摧折)을 가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듯한데, 더구나 이번에 진언(進言)한 사람의 본래 마음은 다만 스스로 그의 뜻을 편 것에 불과할 뿐인데, 먼 바다 가운데로 귀양을 보내어 형극(荊棘)을 더함으로써 광경이 근심스럽고 기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산수(山藪)가 독충(毒蟲)과 악수(惡獸)를 포용해 주는 아량을 성조(聖朝)께 매우 기대하고 있습니다.”

충언을 했을지라도 임금의 심기를 거슬려 귀양을 가게 된 사람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여 거들다가는 자칫 자신도 위험에 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안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동료 관료의 발언이 틀리지 않았음을 역설하였다. 설령 그가 한 말이 망발이라 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그의 포부를 편 것에 불과한 것인데 그를 저 먼 해도(海島) 위로 귀양을 보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승지에게 이 상소문을 읽도록 명하고, 그 내용이 《유곤록(裕昆錄)》(1764년에 영조의 명에 의해 간행한 책으로,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책의 지속적인 추진을 통해 당파와 상관없이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겠다는 영조의 의지가 담긴 책이다.) 을 범(犯)한데다 권진응(權震應)의 죄가 없음을 변명하며 구원하였다는 것으로, 그의 관직을 해임하도록 명하고, 당일로 고향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다시 삭직(削職)하도록 명하고, 상소를 받아들여 올린 승지도 함께 체차(遞差)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황만 보아도 영조가 이 일로 인하여 얼마나 노여워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기경의 이러한 성품 때문에 전북 익산(益山) 사천리를 포함하여 해남 등 모두 4번의 유배(流配)와 복권(復權)을 거쳤으며, 정조(正祖) 때에는 정조 음해라는 모함을 받아 유배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그 뒤 정조가 그의 억울함을 알고 복권(復權)을 시켜주었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소임을 다하면서도 임금이 내리는 벼슬을 마다했던 것은 그의 소신과 스승의 가르침도 있었지만,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직접 가르친 서연관(書筵官)으로써 당쟁(黨爭)의 제물로 희생된 사도세자의 처참한 최후를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는다.

그의 저서 《음빙행정력(飮氷行程曆)》은 1756년 청(淸)나라에 서장관(書狀官)(사행(使行) 수행원의 기강을 감독하고 매일 기록을 작성하여 정리해서 국왕게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으로 다녀와서 쓴 일기체 여행기로, 청나라의 정치동향과 사회실상이 담겨있으며, 분량이 많고 정보가 정밀하다.

이 글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보다 10년 앞선 것으로 북학자(北學者)들의 《연행록(燕行錄)》이 나오기 이전 조선 지식인들의 대외인식을 잘 보여준 기록으로, 후대 《연행록》들과 비교연구하기에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일기에는 만주족인 청(淸)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또한 명대(明代)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고 감격하기도 하고, 중화(中華)의 정신을 찾고자 애썼던 기록으로 보아 그의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의식이 보다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그의 생애의 전반에 걸쳐 60권에 달하는 문집을 남겼다. 특히 그 중에 <서연록>과 <목산록(木山錄)> 등은 사적(史籍)으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으며 그의 6대 후손이 그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그는 북경(北京)에 머물면서 남천주당(南天主堂) 외 여러 곳을 탐방하여 청나라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고, 국자감(國子監)에서 태학생(太學生)과 필담(筆談)을 나누기도 하였다. 이 기록에는 남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 유송령(劉松齡) 신부와 대화를 나누고 파이프 연주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만났던 유송령 신부는 10년 후 홍대용이 다시 만난 신부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