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柳永善)


유영선(柳永善)                                                            PDF Download

1893년(고종 30)∼1960년. 근현대의 유학자.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희경(禧卿), 호는 현곡(玄谷)이다. 유영선은 갑오개혁과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893년에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나,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일제강점기에 청장년의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광복을 맞아(53세) 인생의 후반기를 보냈으니 일생의 대부분을 혼란기에서 보낸 셈이다.

아버지는 유기춘(柳其春)이고 어머니는 광주 이씨이다. 5세 때 할아버지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2세 때는 할아버지를 따라 당시 고부 영주산에서 강학 활동을 하고 있던 전우(田愚)를 찾아가 스승의 예를 행하고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전우는 영남의 곽종석과 함께 조선 말기의 끝자락을 장식한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였다. 처음 전우에게 나아갔을 때에, 전우는 유영선의 나아가 어리기 때문에 몇 년을 기다렸다가 공부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유영선이 눈물을 흘리며 떠나지 않자 전우가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18세 때에 전우와 함께 군산도에 들어갔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유영선은 스승을 모시고 산속으로 들어가 통곡하며 침식을 잊으니 목이 메이고 말이 막혀서 몸을 보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20세 때(1912)에는 전우를 따라 계화도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성기운(成璣運)․권순명(權純命)․오진영(吳震泳) 등과 전우의 문집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28세 때인 1920년 11월에 전우의 문집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전우를 모시면서 배운 공부는 유영선의 학문적 성취와 성리설에 대한 견해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30세(1922) 때 전우가 죽자 심상(心喪, 마음으로 하는 상례) 1년을 입었다. ‘심상’은 상복은 입지 않으면서 상중에 있는 것과 같이 처신하는 것을 말한다. 심상은 대체로 제자가 스승을 위해 하는 것으로, 스승과는 혈연관계가 없지만 슬퍼하는 마음이 친자식 못지않기 때문에 심상을 한다.

당시 전우를 모신 제자들이 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서도 화도(華島) 삼주석(三柱石)이라 불렸다. ‘화도 삼주석’이란 전우의 문하를 지탱하는 세 돌기둥이란 뜻이니, 당시 전우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전우의 문인에 관한 내용은 1962년에 나온 『화도연원록(華嶋淵源錄)』이 가장 자세하다. 이 연원록은 「관선록(觀善錄)」․「급문(及門)」․「존모록(尊慕錄)」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여기에 등록된 인원이 모두 2,338명으로 전우의 직전제자 범위에 든다고 볼 수 있다. 유영선의 학문이나 사상 형성에 있어서, 특히 조부인 유지성(柳志聖)의 영향이 컸다. 그는 손자인 유영선을 일찍부터 맡아 가르쳤고,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수천 권의 서책을 집안에 마련할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유영선이 전우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함으로써 이이-송시열-이재-김원행-홍직필-임헌회-전우로 이어지는 기호학파 낙론계열의 주요한 학통을 계승한다. 조부인 유지성은 간재와 친밀할 뿐만 아니라 학문적 교유도 잦았다. 아버지 유기춘은 임헌회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이러한 집안의 학문 배경으로 인해 유영선은 임헌회와 전우의 학문을 어려서부터 접할 수 있었다. 더구나 조부가 직접 전우에게 교육을 부탁함으로써 유영선은 전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9년을 한결같이 수학하여 그의 학통을 이었다. 말년에는 자비를 들여 현곡정사를 지어 후학들을 양성하였는데, 전국에서 찾아온 제자들의 수가 수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신사범(申思範)․임종수(林鍾秀)․정헌조(鄭憲朝)․유제경(柳濟敬) 등이 있다.

유영선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태극도설」․「기질명덕설」 등과 관련하여 주고받은 서신을 분류하여 『성리유선(性理類選)』(44세, 1936)을 편찬하였으며, 『담화연원록(潭華淵源錄)』(48세, 1940)을 지어 공자와 주자를 계승하여 이이-송시열……전우로 이어지는 도학의 학통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 집안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한 저서로 『훈자편(訓子編)』․『규범요감(閨範要鑑)』 등이 있다. 특히 예학에 밝았는데, 『사례제요(四禮提要)』(60세, 1952)는 관혼상제의 예학에 관해 총 정리한 저술이다.

“관혼상제는 인간이 인간되는 도리로써 한번 예를 잃으면 오랑캐로 돌아가고, 두 번 예를 잃으면 짐승에 가깝게 된다”

라고 하여 관혼상제를 따를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사후에 아들에 의해 『현곡집』(1978) 32권 16책이 출간되었다. 유영선은 고창에 용암사를 건립하고 전우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 이 용암사에 배향되었다.

유영선은 집안의 학문 배경과 전우를 사사하면서 성리학을 자신의 주요 학문으로 삼았다. 유영선의 성리학적 특징은 기호학파의 전통적 입장인 ‘리는 무위(無爲)하고 기는 유위(有爲)하다. 성은 무위하니 리이고 심은 유위하니 기이다’는데 근거하여 자신의 성리학 이론을 전개한다. 성리학은 이 세상의 존재를 리와 기의 범주로 설명한다. 리는 원리 또는 법칙을 가리키고, 기는 구체 사물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호흡되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기의 영역에 포함된다. 반면 리는 이러한 기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이유 또는 근거가 된다. 이처럼 리는 원리이고 법칙의 개념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냄새도 없는 개념이다. 때문에 이러한 리의 성질을 ‘무위(無爲)’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말 그대로 함이 없다는 것으로, 작용의 성질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대로 기는 구체 사물이기 때문에 작용의 성질을 가지므로 유위(有爲)라고 말한다. 즉 어떤 행함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리의 개념을 두고 조선의 유학자들은 정의를 달리한다. 유영선처럼 리를 철저히 ‘무위’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리를 지나치게 ‘무위’의 개념으로 해석할 경우 리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또는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을 우려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래서 리의 무위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리가 실제로 이 세상의 모든 기적 존재를 주재하는 주재성 또는 능동성을 강조하게 된다. 실제로 기의 세계를 주재하기 때문에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리에 능동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리가 실제로 인간의 심의 작용을 주재하여 인간의 마음이 올바르게 작용하도록 돕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의 경우, 사람의 몸을 주재하는 것은 마음인데, 이 마음이 몸을 주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리의 실제적 주재성을 확립하여 현실세계의 혼란을 야기하는 기의 활동을 철저히 차단해나갈 것을 강조한다. 율곡의 학문과 이론을 계승한 율곡학파에서 주로 전자를 주장한 반면, 퇴계의 학문과 이론을 계승한 퇴계학파에서는 주로 후자를 주장한다.

유영선을 율곡계열의 학자로 그의 이론은 철저히 ‘리가 무위하고 기가 유위하다’는데 근거하여 전개된다. 리는 무위하므로 작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의 몫이 된다. 따라서 성리학에서의 주요 이론인 리의 동정(動靜, 움직이고 고요한 것)문제 또한 반대한다. 동정하는 것은 결코 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영선은 ‘성은 무위하므로 리이고, 심은 유위하므로 기이다’는데 근거하여 자신의 심성이론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심과 성을 서로 다른 별개의 물건으로 구분하고, 성은 높고 심은 낮다는 ‘성존심비(性尊心卑)’의 이론을 전개한다. 성은 형이상의 개념이기 때문에 높은 것이 되고, 심은 형이하의 개념이기 때문에 낮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은 순수한 리이기 때문에 순선한 것이지만, 심은 리와 기가 합쳐져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이 함께 한다. 또한 심은 유위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로 규정하고, 심은 기이므로 항상 성을 근본으로 삼을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스승인 전우 ‘심본성(心本性)’의 이론적 요지이며 또한 유영선의 성리학적 특징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심본성’은 심은 어디까지나 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심은 기이니 선과 악이 함께 있으므로 항상 순선한 성을 표준으로 삼아야 악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영선은 왜 심이 성을 근본으로 삼을 것을 강조하는가.

이것은 당시에 심을 리로 규정하여 판단과 행위의 기준으로 삼는 당시 ‘심즉리’를 주장하는 심학파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심학파의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심즉리’를 주장한 이진상(李震相)과 그의 제자 곽종석(郭鍾錫)이다. 이들은 인간의 선한 행위의 근거를 직접 심에서 구함으로써 그 실천을 더욱 강조하고 보편화시킨다. 이들처럼 심을 리로써 규정할 경우, 자칫 심이 내리는 판단이 자의적으로 해석됨에 따라 현실의 모든 일들을 주관적으로 판단되어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예컨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결국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객관적 기준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고, 나의 생각과 판단을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그러나 내 마음의 생각과 판단이 옳다는 이러한 주장은 자칫 지나치게 주관적인 경향에 빠져서 객관적인 기준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나의 입장에서 옳다고 판단되는 일이 상대방 입장에서 그른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표준이나 기준이 애매모호해진다는 말이다.

때문에 유영선은 어떤 일에서나 도덕규범에서나 객관적 표준을 수립할 것을 강조한다. 그 객관적 표준은 바로 심이 성을 근거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곧장 리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성에 근본할 때만이 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의 리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객관적 도덕표준을 가리킨다. 이에

“성을 높여서 스승으로 삼는 것은 바른 학문이 되고, 심을 믿고 자만하는 것은 이단의 학문이 된다”거나 “심은 기에 속하니 심이 감히 멋대로 써서는 안되고 반드시 성으로 근본을 삼으니, 이것이 학문의 바뀔 수 없는 정론이다”

라고 강조한다. 심은 어디까지나 기이기 때문에 심을 믿고 자만하면 이단의 학문에 이르게 되니, 반드시 성을 스승으로 삼아 따르고 높여서 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본성’을 주장하고, 이러한 ‘심본성’에 근거하여 성은 심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성존심비’를 주장한 것이다.

 

[참고문헌]: 『현곡집』(유영선, 여강출판사, 198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상사에서 간재학의 위치」(금장태, 『간재학논총』1, 간재학회,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