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현(李宜顯: 1669~1745)


이의현(李宜顯: 1669~1745)                               PDF Download

 

의 호는 도곡(陶谷),  자는 덕재(德哉)이며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지낸 이정악(李挺岳)의 손자이며,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이세백(李世白)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의 손녀 사위이다.  명망있는 가문에서 성장한 그는 김상헌의 증손인 김창협(金昌協)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였다.
율곡의 문하생이었던 김장생(金長生)과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시열의 문하생이었던 김창협으로 학맥이 이어진다.

이의현의 어린시절은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이 경쟁하고 또다시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던 때였다.  그는 1694년 26세의 나이로 별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기 전까지 아버지와 여러 스승으로 부터 수학하였다.  아버지로부터 《훈몽자회(訓蒙字會)》, 《사략(史略)》, 《당시(唐詩)》, 《소학(小學)》등을 배웠으며,  당시 대사간(大司諫)이었던 이혜(李嵇)윤이건(尹以健) ,윤이성(尹以性)형제에게도 수학하였다.  11세에는 이모부(姨母夫)인 이수실(李秀實)에게 《사략(史略)》7권을 배웠다.  12세에는《효경(孝經)》, 《논어(論語)》, 《시경(詩經)》, 《사기(史記)》를 배우고,  당시(唐詩)한유(韓愈)의 시(詩)를 읽었다.

13세에는 우홍성(禹弘成)의 집을 왕래하며 공부하였다.
15세가 되던 1683년에는 김창협을 빈객(賓客)으로 모시고 관례(冠禮)를 올렸으며 그해1 0월에 관찰사를 지낸 함종어씨(咸從魚氏)  진익(震翼)의 딸과 처음 결혼을 하였다.  이후 황해감사(黃海監司)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해주(海州)로 갔으며 그 뒤 평양(平壤)과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지내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21세가 되던 1689년에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하여 서인(西人)이 실권(失權)하고 남인(南人)이 득세하였다.  이때 아버지를 따라고양(高陽)의 원당(元堂)으로 이사했다가,  그 이듬해에 경기도 광주로 이사하여 시(詩), 산문(散文), 변려문(騈儷文) 등의 공부에 주력하였다.  그 뒤 기사환국 때 장희빈에게 쫓겨 났던 인현왕후(仁顯王后)가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맞이하여 다시 중전(中殿)의 자리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베푼 별시(別試)가 있었다.

이때 아버지인 이세백과 김창협의 요청에 따라 과거에 응시한 결과 합격하였다. 그 뒤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비롯하여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 청요직(淸要職) 을두루거쳤다.

35세 되던 1703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9세 되던 1717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두 3년 동안의 상복을 입으며 효를 다하였다. 1720년에는 동지정사(冬至正使)가 되어 연경(燕京)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이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이때 남긴《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誌)》에 그의 학문과 문학세계를 보여 주는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이의현은 처음부터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名聲)을 얻는 길로 나가고싶어 하지 않았다. 스승인 김창협에게 이러한 뜻을 보일 때마다 초심을 잃지 말라는 스승의 말에 따라 매일 책을 보며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벼슬길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심경이 잘 나타나 있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1721년(신축)부터 이듬해인 1722년(임인)까지 계속된 옥사로 노론의 사대신(四大臣)으로 지목받던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이 죽임을 당하는 등 노론세력이 소론에게 축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의현도 김일경(金一鏡) 등에게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운산(雲山)으로 유배되어 3년간을 보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신임사화(辛壬士禍)로 규정하는데, 장희빈의아들이소론의도움을받아경종(景宗)으로즉위한다음해부터 벌어진 사건이었다.  유배 기간 동안에 이의현은 학문에 대한 열정을 다시 되찾아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포함한 여러 책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경종이 죽고 노론(老論)의 지지를 받던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1725년에 그는 사면령(赦免令)을 받아 운산에서 돌아왔다.  그리하여 영조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영조는 그에게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  벼슬을 주어,  이재(李縡), 이병상(李秉常)을 이어 세번째로 문형(文衡)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172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실각하여 양주(楊州) 도산(陶山)으로 물러나 있다가 이듬해인 1728년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도산에 본거지를 두고 생활을하며 중국에 다녀 오기도하였다.  1735년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미 벼슬에서 마음이 멀어진 상태였으므로 다시 도산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인생의 말년이던 1740년에는 둘째 부인송씨(宋氏)에게서 난 외아들이 요절하는 슬픔을 겪었다.  이의현은 자신의 삶을 정리한 기록으로 1735년에서 1742년에 걸쳐 <자표(自表)>와 <자지(自誌)>를 남겼으며,  1744년에는 일생의 연대기인 《기년록(紀年錄)》을 완성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도곡집(陶谷集)》의 <유지(遺識)>에서 그의 저작물의 목록을 알 수 있다.  그의 저술은 다음과 같다.

<만부(漫瓿)> ,<장소록(章疏錄)>, <계의장첩등록(啟議狀牒等錄)>,    <응제록(應製錄)>, <금석록(金石錄)>, <일혜록(壹惠錄)>, <술덕록(述德錄)>, <지과록(志過錄)>, <잡술록(雜述錄)>, <간독록(竿牘錄)>, <여췌록(餘贅錄)>, <당후일기(堂后日記)>, <병정일록(丙丁日錄)>, <잠필록(簪筆錄)>, <연행일록(燕行日錄)>, <서천일록(西遷日錄)>, <사고(私考)>.

또한 자신의 일생을 16단계의 분기(分期)로 구분하고 16종의 시집을 (詩集)을 엮었다.  그 시집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형탑록(螢榻錄)>, <표직록(豹直錄)>, <앵천록(鶯遷錄)>, <오번록(鰲藩錄)>, <조갱록(蜩羹錄)>, <작얼록(鵲臬錄)>, <용곡록(龍谷錄)>, <연사록(燕槎錄)>, <우세록(牛歲錄)>, <복사록(鵩舍錄)>, <학귀록(鶴歸錄)> ,<호구록(狐丘錄)>, <여적록(驢跡錄)>, <홍추록(鴻樞錄)>, <태배록(鮐背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