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趙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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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趙憲, 1544년∼159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이고 의병장이다.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인이며,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 한 사람이다. 교서관 박사, 호조 좌랑, 예조 좌랑, 보은 현감, 전라도 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의병 700명과 함께 사망하였다.

 

1544년(1세, 중종 39년)

6월 28일,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응지(趙應祉)와 어머니 용성 차씨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황해도 백천, 휘는 헌(憲),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陶原), 후율(後栗)이다.

부친은 성수침(成守琛)문인이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아 집안 형편이 항상 곤궁하였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외아들 조헌을 공부시키는데 노력하였다.

 

1555년(12세, 명종 10년)

어촌(漁村) 김황(金滉)에게 경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561년(18세, 명종 16년)

영월 신씨(辛氏)와 결혼하였다.

 

1565년(22세, 명종 20년)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여러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요승(妖僧) 보우를 논박하여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 대궐 밖에 엎드려 임금의 응답을 기다렸는데 조헌만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의 성격이 강직하며 의리가 있고 인내심이 강함을 알 수가 있다.

다음해 온성도호부 훈도가 되었다.

 

1567년(24세, 명종 22년)

가을, 감시(監試)에 응시하여 삼장(三場)에 합격하였다. 11월, 교서관(校書館) 권지 부정자가 되었다. 그가 맡은 일은 경서와 서적의 인쇄 등이었다.

 

1568년(25세, 선조 1년)

정주목(定州牧) 교수(敎授)가 되었다. 정주는 평안도 서남 해안지방으로 옛날부터 오랑캐의 침입이 잦았던 지방이었다. 그 때문에 선비의 기풍이 거의 없었는데 조헌이 재임하여 교육을 크게 일으켰다.

 

1570년(27세, 선조 3년)

파주목 교수가 되었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에게 학문을 청하였다. 특히 주역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성혼은 조선의 학문에 놀라 외우(畏友, 경외스러운 친구)라 칭하며 제자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1년(28세, 선조 4년)

홍주목 교수가 되었다. 이때 해변에 은거중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을 만나 배움을 청하였다. 가을, 파주에서 율곡 이이(李珥) 만나 뵈었다. 이어서 송도를 유람하였다.

 

1572년(29세, 선조 5년)

교서관 정자가 되다. 6월, 자수궁(慈壽宮) 성숙청(星宿廳)의 잘못, 즉 궁정에서 불공을 드리는 잘못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특명으로 직책이 박탈되었다. 이지함과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고, 서기(徐起)를 방문하여 수개월간 강학하였다.

 

1574년(31세, 선조 7년)

5월, 질정관(質正官)으로 성절사 박희립(朴希立)을 따라 중국 연경(燕京, 북경)에 갔다. 이때 『조천일기(朝天日記)』를 써서 약 4개월간에 일어난 조선과 명나라 관련 일을 기록하였다. 11월, 중국에서 돌아와 명나라 제도 중 본받을 만한 8가지를 소개하는 『팔조소(八條疏)』를 올렸다.

조헌은 중국의 성대한 문물을 살펴보고 그것을 조선에 시행해 볼 생각으로 귀국한 뒤, ‘시무(時務)에 절실한 것’ 8조와 ‘근본에 관계된 것 16조’ 등 상소문 두 장을 준비하였다. 먼저 8조 소를 올리자, 임금이 답하기를,

“천 백 리 풍속은 서로 다른 것인데, 만약 풍기(風氣)와 습속이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고 억지로 본받아 행하려고 하면 끝내 소요만 일으킬 뿐 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여, 조헌은 16조 소를 올리지 않고 8조만 올렸다.(『선조수정실록』8권) 그 8조는 성묘(聖廟)의 배향에 관한 일, 내외(內外)의 관료에 관한 일, 귀천의 의관(衣冠)에 관한 일, 음식 연회에 관한 일, 사대부들의 읍양(揖讓)의 예에 관한 일, 스승과 학생의 예에 관한 일, 향약에 관한 일, 군대의 규율에 관한 일 등이다.

조헌이 올리려 했던 16조는 하늘에 닿는 정성(格天之誠), 근본을 생각하는 효도(追本之孝), 능침의 제도(陵寢之制), 제사의 예절(祭祀之禮), 경연의 규례(經筵之規), 조회의 의식(視朝之儀0, 간언을 듣는 법(聽言之道), 사람을 뽑는 법(取人之方), 음식의 절제(飮食之節), 국가의 곡식을 알맞게 쓸 것(餼廩之稱), 생산을 늘릴 것(生息之繁), 병졸의 선발(士卒之選), 조련을 부지런히 하는 것(操鍊之勤), 성지를 견고하게 하는 것(城池之固), 출척을 밝게 하는 것(黜陟之明), 명령을 엄하게 하는 것(命令之嚴), 총론으로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모범을 보이는 도 등이다.

 

12월, 유희춘(柳希春)과 함께 교서관에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교정하였다. 이즈음 그는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모두 암송하여 주위사람들로부터 ‘이 책을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조헌뿐’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명나라에 다녀온 뒤 조헌은 「질정록」과 『동환봉사(東還封事)』(1698년 8조소와 16조소를 합친 책)를 지었다. 후자는 공안(貢案, 공물 기록 장부)의 폐단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쓴 글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재산이란 누구나 다 갖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사정을 헤아림 없이 전유하려 든다면 백성들이 일어나 쟁탈하려 들것이다.”고 지적하고 재산을 백성과 골고루 나누는 것에 대한 위정자의 솔선수범을 강조하였다.

이즈음 그는 이러한 시를 썼다.

 

오늘 아침 말을 타고 임명(臨溟)을 지나는데

오래된 역참에서 깊은 생각에 견딜 수 없구나.

가문 기운은 날마다 곡식과 흙을 태우는데

창문으로 드는구나. 들에서 부는 피비린내 바람

흉년의 농사 무엇을 의지하며

일 년 내 가꾸어도 계산은 막막하네.

허다하게 오고가는 서울의 관리들

원컨대 백성 구제하는 좋은 대책 생각하기를 (「次聖居翁韻」)

 

1575년(32세, 선조 8년)

교서관 박사, 호조 좌랑, 예조 좌랑, 전적, 감찰 등을 거쳐 12월에 통진 현감이 되었다.

 

1577년(34세, 선조 10년)

겨울, 통진 현감으로 재직 중 잘못을 일으킨 노비를 장살(杖殺, 매를 때려 죽임)하여 부평(富平)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이때의 유배는 간신배들의 탄핵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조경진 12)

 

1578년(35세, 선조 11년)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유배지에 있어서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1580년(37세, 선조 13년)

4월, 유배지에서 석방되었다. 윤4월, 보령으로 가서 이지함의 상에 곡하였다. 이어 명곡서당에 머물며 강학하였다. 가을, 해주 석담으로 율곡선생을 찾아가 수개월간 강학하였다. 그의 호가 ‘후율(後栗)’인 것은 율곡을 존경하여 ‘율곡(栗谷) 선생의 뒤를 잇는다’라는 뜻이다.

 

1581년(38세, 선조 14년)

봄, 공조 좌랑을 거쳐 전라도 도사(都事)가 되다. 당시 관찰사는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이었다. 조헌은 정철을 평소에 멀리하였는데 성혼과 이이의 권유로 만나게 되어 서로 친해졌다.

다음해 종묘서(宗廟署) 영(令)에 임명되었다가, 8월에 보은 현감이 되었다.

 

1584년(41세, 선조 17년)

1월, 스승 율곡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조선사회의 붕당이 격화되었다. 정여립이 이이와 성혼을 모함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헌의 친구 이발(李潑)이 정여립에 동조하자 조헌은 그와 절교하고 스승들의 무고함과 정여립의 흉악함을 논박하는 상소문을 거듭 올렸다. 당시 임금이던 선조는 이러한 상소를 받아주지 않았고 조정의 관료들은 조헌을 서인의 앞잡이로 몰아 배척하였다. 그래서 조헌은 관직을 버리고 옥천으로 내려가 살 것을 결심하였다.

겨울, 대계(臺啓, 사헌부나 사간원의 대간들이 관리의 잘못을 임금에게 보고하는 글)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옥천 안읍 율치산에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정사를 짓고 ‘후율정사(後栗精舍)’라 칭한 뒤에 강학을 하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이즈음 조헌은 간신배들이 나라를 그르치게 한다고 호소하고 폐단을 극복하는 상소문을 대궐 문 앞으로 나아가서 올렸으나 오히려 왕의 진노를 사 길주 영동역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하지만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을 하자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1586년(43세, 선조 19년)

공주목 교수가 되었다. 10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이즈음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封章後有旨回諭 有感而作 秋」)

 

백성들 병고와 임금님 은혜는 잊어서는 안 되지만

어찌 한해에 두 번이나 상소문을 올린단 말인가

아름다운 말씀이 멀리 외로운 신하에게 내리시니

밝은 조정에 백번 절하고 감격의 눈물 쏟아내네

 

1587년(44세, 선조 20년)

여름에 사직하고 옥천으로 돌아왔다.

 

1589년(46세, 선조 22년)

4월, 도끼를 지고 대궐에 나아가 만언소를 올렸으나, 유언비어로 백성들을 혼란 시켰다고 하여 조정의 미움을 받아 함경도 길주 영동역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일본 통신사 파견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1월,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대궐에서 만언소를 올리던 시기의 일화가 이렇게 전해진다.(『중봉문집』4, 「遺事」)

 

“선생이 도끼를 메고 대궐에 들어가 엎드려 상소하던 때에 종각 옆 민가에 기거하고 있었다. 선생은 밤이나 낮이나 초연하여 근심이 있는 기색이라 주인이 그 까닭을 물었으나 선생은 대답하지 않고 오직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때 마침 그 집은 기울어 장차 무너지게 될 우려가 있어서 주인은 큰 나무로 지주를 세워 장차 무너질 것을 방지하려 하였다. 선생은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이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슬프다! 주인의 집은 이 나무라 있어 넘어지는 것을 부지하여 앞으로도 수년간은 지탱할 수 있겠으나 만약 나라가 장차 기울면 누가 그것을 부지하겠는가?’ 하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하니 옆에 있던 사람도 선생의 이 충의에 감동하였다.”

 

1590년(47세, 선조 23년)

고운사를 유람하였다. 여름, 금천사에서 강학하였다. 이해 겨울 12월, 영남을 유람하고, 경상도 관찰사 홍성민(洪聖民)을 만났다.

 

1591년(48세, 선조 24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사신을 보내와 명나라를 칠 길을 내놓으라고 하여 조정에 소동이 일어났다. 이때(3월경) 조헌은 옥천에서 상경하여 도끼를 지고 대궐로 나아가 일본 사신을 참수하고 명나라에 보고할 것을 상소하였다. 대궐문 바깥에서 3일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 대둔산을 유람하였다. 11월, 공암으로 가서 서기(徐起)의 상에 곡하다.

 

1592년(49세,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어머니를 청주 선유동으로 피신시키고 돌아왔다. 5월, 격문을 지어서 병졸을 모집하였다. 제자 김절(金節), 김약(金籥), 박춘검(朴忠儉) 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소집하여 보은 차령에서 북상하는 왜적을 퇴각시켰다. 6월, 제자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약 1,600여명을 모아 8월, 청주에서 영규(靈圭)의 승려군과 합류하여 왜적을 격파하고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 당했다. 불과 700여명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하여 다시 영규의 승군과 합류하여 8월 18일, 금산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금산전투)

금산의 전투에서 그는 의병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오늘은 다만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생사와 진퇴에 있어 의로움(義)이라는 글자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이 전투에서 그는 의병 700여 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1593년 『선조실록』(46권, 선조 26년 12월 27일) 기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세자(광해군)가 진주와 금산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명단을 책으로 만들어 시강원(侍講院)에 내렸다. 그리고 그들 가속(家屬, 가족과 딸린 식구)을 불러 그들 모두에게 면역첩(免役牒, 부역을 면제하는 증서)과 쌀·콩 등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시강원이 건의하였다. ‘기민(飢民)들을 공주(公州)의 사례에 따라 구제해야 합니다. 조헌(趙憲)의 두 아들이 이곳에서 떠돌면서 마을에서 걸식을 하고 있으니 특별히 은전을 내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그대로 하라. 즉시 음식물을 계속 지급하도록 감사에게 문서로 전달하라’고 하였다.”

1603년 유생들이 금산의 순절(殉節) 장소에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1604년(선조 37년), 선무원종공신 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錄勳)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1609년(광해군 1년)에 충청도 유생들이 사액을 청하여 표충사(表忠祠)라는 사액을 하사받았다.

1649년(인조 27년)에 ‘문열(文烈)’의 시호를 받았다.

1656년(효종 7년)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김상헌(金尙憲)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다.

1663년(현종 4년) 7월에 조정에서 예관을 보내 금산군에 있는 순의단(殉義壇)에 사액(賜額)하고 제사를 올렸다.

1665년(현종 6년) 묘표(墓表)를 개수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이 비면(碑面)을 쓰고 송시렬이 음기(陰記)를 지었다.

1666년(현종 7년) 호남 관찰사 민유중(閔維重)이 문집을 간행하였다.

1669년(현종 10년) 3월, 금포 유생 이만춘(李萬春) 등이 상소하여 서원의 액호(額號)를 청하니 임금이 ‘우저(牛渚)’라는 액호를 하사하였다.

1710년(숙종 36년) 청주 유생이 전장의 유적지에 비석을 세웠다.

1734년(영조 10년)6월, 조정에서 자손 중 적손(嫡孫, 큰집 자손), 지손(支孫, 작은 집 자손)을 가리지 않고 관리로 등용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천일기(朝天日記)』의 간행을 명하였다.

1740년(영조 16년)7월, 임금이 5대손 조혁(趙㷜)을 면담하고 선정(先正, 훌륭한 조상)의 행적에 대해 물어보았으며, 운각(芸閣, 서고)에 명하여 문집을 간행하여 자손과 서원에 보급하도록 명하였다.

1748년(영조 24년) 교서관(校書館)에서 문집을 간행하였다.

1754년(영조 30년), 영의정 이천보의 요청으로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조헌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조경진, 『조헌 시에 나타난 선비정신 연구』, 세종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

박병헌, 『중봉 조헌의 학문과 시세계』, 동국대학교 석사논문,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