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익문(姜翼文,1568-1648)


 

강익문(姜翼文,1568-1648)                                  PDF Download

 

1568(선조 1)∼1648(인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관은 진주(晉州). 휘(諱)는 익문(翼文)이고 자는 군우(君遇), 호는 당암(戇菴)으로 합천 출신이다. 성이 강씨(姜氏)인 사람들은 본래 진양(晉陽) 사람인데, 그의 4대조 강승전(姜承顓) 때부터 합천으로 이사하여 거주하였다. 강희필(姜姬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인수(姜仁壽)이며, 아버지는 판관 강세탁(姜世倬)이다. 조부 강인수와 부친 강세탁은 자손이 귀하게 되었다고 해서 관작이 추증되었는데, 강인수는 사헌부(司憲府)에 강세탁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1589년에 진사가 되었고,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임명되어 세자 시강원의 설서(說書)를 겸하였다.

어려서 사부(詞賦)로 명성을 얻었고‚ 22세(1589)에 진사(進士)가 되고 39세(1606)에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였다. 1608년에 성균학유(成均學諭) 겸 강원설서(講院說書)‚ 1609년(광해군 1년)에 예조좌랑(禮曺佐郞)이 되었다. 4년간 정언(正言) 3회‚ 헌납(獻納) 4회‚ 지평(持平) 6회‚ 문학(文學) 5회를 역임했다. 1613년에는 장령(掌令)을 거쳐 필선(弼善)이 되고 다시 제용감정(濟用監正)‚ 그리고 사간(司諫)이 되었다. 이 해에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관련된 대옥사(大獄事)가 일어나 이덕형(李德馨)을 옹호하다가 정인홍(鄭仁弘)‚ 이성(李惺) 등과 대립하였다. 이것이 1613년 광해군 5년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인데,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이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洋甲) 등을 문초할 때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다는 진술을 받아내어 영창의 외조부이며 인목대비의 부친인 김제남(金悌男)을 사사시키고 영창대군을 서민으로 강등하여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죽인 사건을 말한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살해하자 상소를 올려 극언한 후 충원현감(忠原縣監)으로 좌천되었다가 9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풀려났다. 이듬해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를 거쳐 다시 제용감정(濟用監正)이 되었으나, 은퇴하여 안락한 여생을 보냈다. 통정(通政)으로 승급된 후 곧바로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향년 81세로 죽었다. 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추증받았다.

그는 평소에 사치를 싫어하여‚ 옷은 몸에 편히 맞고 음식은 입에 맞으면 만족했으며‚ 항상 자제들에게 ‘자기 일로 욕을 입지 말도록’ 타일렀다고 한다. 성품은 신중하고 성실하여 겉으로 꾸미는 것을 싫어하였고‚ 불선(不善)한 것을 보면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착하지 못한 자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령(宜寧)의 낙서(洛西)에 장사지냈는데, 정부인(貞夫人) 합천 이씨(陜川李氏) 또한 89세에 세상을 떠나 합장하였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강대수는 동도윤(東都尹)으로 세 번 결혼해 2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강휘연(姜徽衍)․강휘만(姜徽萬)이고, 사위 세 사람은 현감인 이당규(李堂揆)와 김정익(金庭翊)․이시격(李時格)이며, 또 서출의 아들 강휘윤(姜徽尹)과 사위 이명길(李命吉)이 있다. 차남 강대적(姜大適)은 강휘민(姜徽敏)․강휘중(姜徽重)․강휘망(姜徽望)을 낳았고, 사위 두 사람은 조화(趙璍)․오선기(吳善基)이며, 서출의 아들은 강휘준(姜徽俊)․강휘걸(姜徽傑)이다. 막내 강대연(姜大延)은 강휘정(姜徽鼎)․강휘진(姜徽晉)을 낳았고, 사위 세 사람은 이두추(李斗樞)․김옥(金鋈)․송정태(宋廷泰)이다. 공의 장녀는 별제(別提) 이여한(李汝漢)에게 시집가서 4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정유우(鄭有佑)․안시추(安時追)․이의겸(李義謙)․하자혼(河自渾)이다.

차녀는 참봉(參奉) 정유숙(鄭惟熟)에게 시집갔다. 이에 다음과 같은 명(銘)이 쓰여 있다.

“성실하면서도 곧았고 질박하면서도 순후하였으므로, 장수하는 길상(吉祥)이 있었을 뿐더러, 게다가 자손들까지 번성하였도다.”

지금도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812-16번지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 강익문이 받은 교지 <당암 강익문 교지(戇庵 姜翼文 敎旨)>가 보관되어 있다. 이것은 진주 강씨 은열공파 진천군 종중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교지는 모두 4매인데, 1589년 강익문이 진사 급제한 백패(白牌) 1매, 1606년 문과 급제한 홍패(紅牌) 1매, 1648년 예조참판 증직 교지와 예조판서 증직 교지 2매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어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2007년 6월 28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25호로 지정되었다. 문집으로는 당암집이 있다.

당암집은 강익문의 9대손 강두섭(姜斗燮)과 10대손 강봉노(姜鳳魯)가 주관하여 편찬한 문집으로‚ 필사본이며, 명확한 편찬연대를 알 수 없다. 문집은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집의 맨 앞에는 김도화(金道和)가 쓴 서문이 있다.

권1에는 강익문이 지은 「정기가부(正氣歌賦)」 1편과 3수의 시(詩)‚ 만(挽)‚ 발(跋)‚ 제문(祭文)‚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이 실려 있다. 권2에는 우선 부록으로 강익문의 가계와‚ 강익문의 17대조인 강민첨(姜民瞻)에 관한 고려사 열전이 실려 있다. 그리고 인조(仁祖)가 내린 어필전교(御筆傳敎)‚ 허목(許穆)이 쓴 묘갈명‚ 강두섭이 쓴 가장(家狀)‚ 장석영(張錫英)이 쓴 행장(行狀)‚ 수시(壽詩)‚ 여러 선비들과 강익문의 아들 강대수가 강익문의 신원을 위해 지은 상소문‚ 다른 사람들이 강익문에게 보낸 편지‚ 동도회화도(同道會話圖)‚ 동도회화록(同道會話錄)‚ 소유록(疏儒錄)‚ 상향문(常享文)‚ 강봉노(姜鳳魯)의 후지(後識)‚ 유필영(柳必永)의 발문이 실려 있다. 원래 강익문은 남긴 글이 많았으나 병란으로 대부분 소실되어 흩어진 유고(遺稿)를 모으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듯하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기언(記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