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李湛:1652∼1716)


 

이담(李湛:1652∼1716)                                           PDF Download

 

담의 자 는경화(景和), 호는성재(醒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10세손으로,  증조부는 첨추 이후재(李厚載)이고 조부는 장령 이형(李逈)이다.

아버지는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지낸 이중휘(李重輝)이며 어머니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녀인데, 후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그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이담의 부인은 광주 안씨(廣州安氏)인데 시호가 익헌공(翼憲公)인 안윤덕(安潤德)의 후손이다.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좇는다는 삼종(三從)의 도리를 존중하였으며,  않게 하였다.

이담이 별세한 뒤에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아들 현윤(顯允)에게 권유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한 것만 봐도 부인의 출처의리(出處義理)에 대한 식견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1724년 9월 15일에 향년7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고 공의 묘소 오른쪽에 부장(祔葬)하였다.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1669∼1745)이 쓴 묘갈명(墓碣銘)에 의하면,  이담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습이 단아하고 깨끗하며 성품이 온순하고 진실하여 자연히 도(道)에 가까웠으며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우암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날로 발전함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스승에게 극진하여 숙종(肅宗)때에 우암이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어 갔다가 곧 남쪽 변방으로 옮겨가자, 그가 여러 유생들과 함께 대궐앞에서 소리 높여 변호하였고, 이어서 천리 먼길의 유배지로 그를 따라갔다.  뒤에 우암이 제주도 로유배되자,  또 다시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때 외숙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1629∼1689)은 이미 화를 당하였고, 우암은 체포되어 상황이 다급하였는데,  이담이 틈을 타서 김수항의 묘도문(墓道文)을 우암에게 청하였다.   묘도문이 완성됨과 동시에 우암에게 후명(後命) 후명(後命):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죄인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는 일을 이른다. 이 이르니 우암에게······이르니: 1689년 1월 숙의 장씨(張氏)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의 호칭을 부여하는문제로기사환국이일어나서인이축출되고남인이재집권하였는데,이때송시열은  책봉을반대하는소를오렸다가제주도로 유배되었다.그러다가그해 6우로압송되어오던중정읍에서사약을받고죽었다.
바로 이 글이 우암 선생의 절필(絶筆)이 되었고 이담은 김수항(金壽恒)이 사사되자 그의 묘도문을 계기로 더 이상 글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이담은 광주(廣州)에 은거하여 세상과 왕래하지 않고 도서(圖書)와 역사책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1694년 정국이 바뀌어 조정에서 사산감역(四山監役)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駱山)의 성곽과 숲을 지키던 무관 벼슬 이름이다. 을 제수하니, 이담은 마지못해 나아갔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아산현감(牙山縣監)과 임천군수(林川郡守)를 지내기도 하였다.  아산에는 겨우 13개월 동안 부임하여 있었는데 고을이 잘 다스려져서 유애비(遺愛碑) 유애비(遺愛碑): 지방관의 선정을 칭송하여 세운 송덕비를 이른다. 가 있으며,  활과 갑옷을 잘 수선하여 포상 하였으나 적극 사양하여 면하였다.

뒤에 임천에 있을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임천에는 토호(土豪)들이많았는데, 이담이 강력히 제재하여 간악한 짓을 못하게하니,  백성들이

“백년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다.”

라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어사(御史)는 토호들의 말을 듣고 이담을 탄핵하였다.  취조하여 변론함에 털끝만한 문제가 없었는데도 다른 일로 얽어 면직되었다.

이담은 이에 식솔을 모두 데리고 광주로 돌아와서 벼슬길을 단념한 채 남을 원망하는 말이 없이 지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중풍을 앓게 되어 하는 수 없이 도성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1715년에 모부인(母夫人)이 별세하자 그 이듬해까지 그리워하여 눈물을 흘리며 몇 달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피로가 누적되어 마침내 9월 19일에 향년6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담은 지방관(地方官)으로서의 선정(善政)을 베푼 일 말고도 그의 효성(孝誠)과 청렴함을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  그가 지극한 효성과 순수한 행실이 있어 5세에 어머니를 잃고 계비(繼妣) 부인을 섬길적에 정성과 효도를 다하였다.  또한 부친이 말질 (末疾: 고치지 어려운병)에 걸려 여러해를 고생하였는데,  그가 좌우에서 간호하여 시종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상(喪)을 당하자 몹시 슬퍼하여 몸이 상할 지경이 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예문(禮文)보다도 더한 슬픔을 표출하였다.

또한 형을 아버지 섬기듯이 하여 정성을 다하여 모셨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물뿌리고 청소하는 예절을 지켰다.

또한 형 이재상(宰相)의 지위에 오르자,  간혹이 일로 요구하고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나무라고 물리쳐 용서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청렴한 것을 좋아하여, 옛 친구 중에 고위관직(高位官職)에 오른자가 있으면 일체 찾아가지 않았으며, 외직(外職) 한자에게는 반드시 생략 하였다고한다.  그의 이종 동생인 옥오재(玉吾齋)송상기(宋琦:1657∼1723)가 지은 만시(挽詩)에서도 그들이 평소에 얼마나 친분을 쌓으면서 살아 왔는 지가 잘 드러나 있다.
제목은 <이종형 임천 군수 이경화를 기린 만시 [姨兄李林川景和挽]>로 되어 있다.

이종사촌 종형제가 누구인들 없으리오만
兩姨群從世誰無
우리들의 깊은 정은 친형제와 같았다오
吾輩深情卽友于
시는 외숙 인해 접었어도 눈물 외려 마르잖고
詩廢渭陽餘淚在
애통한 맘 풍수에 어려 그 한몸이 고단했지요
痛纏風樹一身孤
영고성쇠 진작부터 부운처럼 여겼건만
榮枯久作浮雲看
오늘 와서 유명 달리 할 줄 어찌 알았겠소
存沒那知此日殊
어이하리 큰 형님은 홀로인 걸 슬퍼하니
何况長公悲隻影
한밤 외기러기 울음소리견 디지못 하리다
不堪中夜斷鴻呼

이담의 아버지 이중휘(李重輝)가 김광찬(金光燦)의 딸과 혼인하였으므로, 송상기와는 이종 형제가 된다.  원문의 ‘우우(友于)’는 형제 간의 우애를 말하는 것으로, 《서경》 〈군진(君陳)〉의 “형제 간에 우애한다.〔友于兄弟〕” 라는 말을 줄여 인용한것이다.  3구의 뜻은 이담이 외숙(外叔) 김수항(金壽恒)의 사사(賜死)를 계기로 시 짓기를 그만 두었지만 외숙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말을 묘사한 말이며, ‘위양(渭陽)’은 외숙을 의미한다.

《시경》〈위양(渭陽)〉에

“외삼촌을 배웅하러 위수까지 나왔는데, 무엇을 드릴까요. 수레랑 말을 드리지요.
[我送舅氏, 曰至渭陽. 何以贈之, 路車乘黃.]”

라고하였다.  4구의 뜻은 이담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말을 묘사한 것으로,  그가 다섯 살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역시 도곡(陶谷)이 지은 묘갈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4구의 ‘풍수(風樹)’는 풍수지탄(風樹之嘆)으로,  부모 잃은 자식의 아픔을 말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않는다.
[夫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라고 하였다.  7구는 이담의 백씨(伯氏) 이유(李濡:1645∼1721)가 홀로 생존하여 슬픔을 견디지 못한다는 말이며, ‘장공(長公)’은 맏형을 의미한다.  소식(蘇軾)이 소순(蘇洵)의 맏 아들이고,  그의 문학이 뛰어났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장공이라고 불렀던 데에서 연유한다.‘ 단홍(斷鴻)’은 무리를 떠난 외로운 기러기라는 말이다.
 <참고문헌>
이의현, 《도곡집(陶谷集)》.
송상기, 《옥오재집(玉吾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