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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후의 조정 분위기와 효종의 사망

10. 이후의 조정 분위기와 효종의 사망

 

조익의 문묘 종사 건의에 대한 효종의 대응은 지나친 면이 있었다. 조정에서 주요 관직을 장악한 서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효종은 이미 일정한 선을 넘고 있었다. 좌의정 조익에 대한 조심스럽지 못한 발언이 그렇고,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문에 대한 대응도 그렇고,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는 상소문에 대한 임금의 이해할 수 없는 비답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남인 유생들이 율곡과 성혼에 대해서 왜곡과 거짓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을 모른 척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두둔하는 것이 서인 관리들과 유생들은 가장 참을 수 없었다.
임금에 즉위한 뒤부터 항상 북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효종의 입장에서도 서인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째 아들인 자신이 인조 임금의 뒤를 잇는 것을 그들이 반대했던 것도 그렇고, 기회만 되면 소현세자의 셋째아들에 대한 언급이나, 소현세자 부인인 강빈의 복권문제를 거론한 것도 그랬다. 그들은 임금의 왕위 계승에 대한 약점을 거론함으로써 자기들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자신들의 주장을 더 강하게 내세우는 발판으로 삼는 것 같았다. 영의정까지 지낸 김자점은 임금이 비밀리에 추진하는 불벌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까지 하였다.
서인들은 또 현실에만 안주하고 이미 몰락한 명나라만 찾고 있는 것도 효종으로서는 불만이었다. 이 세상이 넓은 줄을 모른다. 오직 성리학과 수양과 도덕, 그리고 주자만을 내세우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의 관리 누구 하나 머리를 맞대고 천하대세를 논할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불만인 것은 그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율곡 이이의 사상이 임금의 권한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북벌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한데 그들은 임금을 상징하는 ‘리(理)’가 독자적으로 어떤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편다. 모든 것은 ‘기(氣)’로 상징되는 신하들과 관리들이 중심이다. 임금은 그들의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하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의 사상은 사실상 ‘신하(氣)들이 행동(發)을 하면 임금(理)은 거기에 편승(乘)할 뿐이다’는 것을 뜻했다. 그들은 그러한 임금을 원하고 있었다.
효종 2년 이후 『효종실록』에 보이는 율곡과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효종 2년(1651) 5월 25일: 예조가 부묘할 때 교서를 반포하자고 청함
2) 효종 2년(1651) 6월 6일: 민정중이 왕도·언로 확대 등에 대해 아룀
3) 효종 2년(1651) 7월 20일: 대동법 시행·금법을 어긴 대신 등에 대해 논함
4) 효종 3년(1652) 3월 23일: 구인후·오준·임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5) 효종 3년(1652) 11월 17일: 홍무적·최욱·윤겸 등이 인피를 청함
6) 효종 3년(1652) 11월 23일: 형조에서 처형할 자들의 사형을 면하게 하다
7) 효종 4년(1653) 2월 9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꿴 일을 대신들과 논하다
8) 효종 4년(1653) 2월 13일: 재변을 해소시킬 방도를 구하게하다
9) 효종 4년(1653) 8월 8일: 사국에 이기발을 논핵한 대관을 조사하라 하다
10) 효종 6년(1655) 3월 10일: 좌의정 조익의 졸기
11) 효종 7년(1656) 1월 26일: 민정중 등이 재변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하다
12) 효종 8년(1657) 10월 19일: 강관을 불러 심도(心圖)에 대해 논하다
13) 효종 8년(1657) 10월 20일: 주강에서 성인의 심법(心法) 등에 대해 논하다
14) 효종 8년(1657) 11월 12일: 송준길이 신하를 의심하지 말 것을 아뢰다
15) 효종 8년(1657) 12월 4일: 송준길이 대관에게 너그럽게 대할 것을 청하다
16) 효종 9년(1658) 9월 9일: 송시열과 송준길 등을 인견하고 시사를 논하다
17) 효종 9년(1658) 12월 17일: 『심경』을 강하고 시사에 대해 의논하다
18) 효종 10년(1659) 2월 10일: 김속 등이 이이의 서원에 액호의 하사를 청하다
19) 효종 10년(1659) 윤3월 28일: 김장생·이이 등의 서원에 액호를 내리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효종 2년 이후 부터는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 건의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리들과 유생들은 이제 효종을 상대로 그러한 건의가 의미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서인 측 관리들과 효종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고 갈등이 쌓이게 되었다.
서인 측 관리들과 유생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효종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임금’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청나라를 일으킨 홍타이지, 즉 청태종의 모습이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군사를 이끌고 대륙 정벌을 나서는 그런 군왕의 모습이 효종이 흠모하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그런 덕치의 군주가 아니라 오랑캐, 야만족의 추장과도 같은 패권을 휘두르는 군주의 모습이었다.
1655년(효종 6년)경부터 효종은 송시열, 송준길 등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냈다. 기존의 서인 관료들과는 이미 많은 것이 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효종의 스승이었으며, 송준길은 송시열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이들도 율곡과 성혼을 스승으로 삼는 서인파였지만 당시 관직에 있던 서인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산림세력이었다. 이들은 산당이라고 불렸다. 효종은 이들과 기존 관리들 사이를 조종해나가면서 국내 정치의 안정과 함께 북벌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효종 8년경부터 이들 산당계 인사들이 정국 운영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때 정국을 주도한 인물이 산당의 영수 송시열이었다. 이 당시 『효종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송시열과 송준길 관련 기록은 효종이 이들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효종은 율곡의 문묘 종사는 거부했지만 서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율곡에 대한 존중의 의사 표현은 산발적이지만 표했다. 효종 2년 이후에 『효종실록』 등장하는 율곡에 관한 기록은 대개는 그러한 내용이다. 송준길과 송시열이 가끔 율곡에 관해서 논한 내용도 일정한 선을 넘지 않았다. 즉 효종이 싫어하는 문묘 종사 이야기는 피하고 일반적인 제도나 조치를 이야기할 때만 지난날 율곡이 제안했거나 시행했던 사례를 예로 드는 정도였다. 효종이 이에 맞장구를 치는 모습은 문묘종사 문제로 서운하게 생각하는 서인 유학자들의 서운한 마음을 다독여 준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다.
효종은 1659년(효종10년)에 이조판서의 직책에 있는 송시열과 북벌계획 논의를 위해 독대를 하기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송시열은 국왕의 수양과 양민(養民)을 강조하고, 북벌의 원칙론을 주장하였으나 효종은 구체적으로 군대양성과 적극적인 북벌 준비를 주장하였다.
이해에 효종은 율곡을 모시는 서원에 액호를 하사하는 등 마지막 호의를 베풀었다. 어떻게 보면 효종으로서는 율곡은 학문적으로 자기 스승이기도 하였다. 스승인 송시열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율곡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의 제자이며,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에게도 학문을 배운 바 있었다. 효종의 액호 하사는 인간적으로 율곡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이해 5월 효종은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다 갑자기 사망하였다. 향년 41세였다.

9. 조익의 항변과 효종의 격노

9. 조익의 항변과 효종의 격노

 

조익의 상소문 이후로 한동안 조정은 문묘종사 문제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서 또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임금의 생각에는 서인들의 임금 탐색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9월 15일 함경도에서 율곡과 성혼에 대한 문묘 종사를 요청하는 상소문이 조정에 전달되었다. 그 지역 유생 이후빈 등이 올린 것이었다.
이러한 상소문에 대해서 임금은 다음과 같이 답을 내렸다.

“너희들의 상소 내용을 보건대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아, 여름에 밭매는 것보다 힘든 아첨은 옛사람이 부끄럽게 여긴 바이다. 비록 서울에 있는 유생들 집단(즉 성균관의 유생들)과 친교를 맺어 아첨을 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억지를 써가며 알지 못하는 바를 어찌 감히 이처럼 한단 말인가? 나는 매우 통탄스럽고 해괴하게 여긴다. 남의 사주를 받아 임금의 동향을 살피려 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모자란다. 너희들을 법대로 조치해야 마땅하나 지금은 우선 용서해 주니,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상소문에 대한 임금의 답변으로서는 상당히 엄한 것이었다. 효종은 함경도 유생들이 서울 지역 유생들의 사주를 받아 이러한 상소문을 올렸다고 보았다. 적어도 서울 유생들에게 지방 유생들이 아첨하기 위해서 그리고 임금의 동태나 의도를 살펴보려고 이러한 일을 추진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문묘 종사 요청은 거부하였다. ‘너희 죄는 죽어도 모자란다’고 하였으니 거부 정도가 아니라 문묘 종사 요청에 대해여 극도의 반감을 표출하였다고 해야할 것이다.
임금의 답변을 받아들고 담당 관리 ‘정원’(政院,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여러 가지 사항들을 임금에게 보고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리)이 나갔다. (대궐 바깥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유생들이 임금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관리가 다시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바깥의 상황을 전달하였다.

“(그들이 있는 곳이)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유(儒)라고 이름하는 이상에는 모두 관대하게 용서하는 것이 곧 선비를 대우하는 임금의 도리입니다. 지금 북방 유생들이 최근 나라의 걱정이 심해진 것을 알지 못하고 감히 이 상소를 올렸으니, 신들도 적절한 때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수십 명의 유생들이 머나먼 천리 길을 묻지 않고 이렇게 와서 대궐에 호소하였는데, 성교(聖敎, 임금의 답변)가 지극히 엄하여 사기(士氣, 선비의 기개)가 꺾인 나머지 먼 지방 사람들이 부끄러워 죽고 싶어들 합니다. (저는 임금과) 아주 가까운 자리에 있으므로 구구한 심정을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보고에 대해서 효종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였다.

“사론(士論, 선비들의 여론)이 어그러지고 조정이 어지러워진 것이 전적으로 이것(문묘 종사 문제) 때문이다. 나라가 이것 때문에 망할 것인데, 그들을 대우하는 도리를 어찌 평화롭게 할 수 있겠는가? 계사(啓辭, 상소문)의 뜻도 어긋나지 않았는가? 나는 도저히 그들의 상소를 인정하지 못하겠다.”

효종은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그들의 상소문 자체가 잘못되었으며 자신은 이제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단언한 것이다. 임금은 그리고 당시 조정이 어지러워지고 선비들의 여론이 어그러진 것이 전적으로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 때문이며, 이 때문에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라고 하였다. 참고 있던 효종의 인내심이 폭발한 것이다. 효종으로서는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 문제로 인하여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아울러 효종은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 건의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서 자신은 반감까지 가지고 있음을 드러냈다.

다음날 9월 16일, 상황을 지켜보던 조익이 또 건의서를 올렸다. 효종 임금에게 그는 유생들을 좀 더 너그럽게 대해줄 것을 요청했다. 조익은 이 당시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승진해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어제 북방에서 온 유생들에게 임금께서 내린 비답이 다소 과하다는 뜻을 동료들과 의논하여 보고를 드렸습니다. 보고 드린 내용이 신의 뜻에는 미진한 바가 있기에 다시 이렇게 번거롭게 해드리는 바이니, 삼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조익은 효종이 함경도 유생들에게 내린 답변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이미 임금에게 보고 하였다는 것이다. 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함경도 유생들이 상소를 올린 뒤에 조정안에서는 고위 관리들과 임금 사이에는 빈번한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익은 그런데 좀 더 보충하기 위해서 이러한 상소문을 올린다고 하면서 다시 율곡과 성혼의 문제를 거론하였다.

“예로부터 성명(聖明)한 제왕이 세상을 다스리고 사물에 응하는 방도는 오직 시비와 선악과 사정(邪正, 잘못과 올바름)을 평등하게 살펴서, 버리고 취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견주어 차이를 두려는 사사로움이 그 사이에 개입되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치세(治世)의 도(道)는 본래 지극히 쉽고 지극히 간략한 것입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쉽고 간략하게 하여 천하의 이치를 얻는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임금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지 않고 서인들이라고 하는 일부 당파의 이익과 관련된 당론에 불과하다고 본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었다. 조익으로서는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보여주는 효종의 태도가 이해할 수 없었다. 임금이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자들의 의견에는 동조하고 그 반대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찬성파들의 의견은 편협한 당론으로 몰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익은 다음과 같이 자기 주장을 이어 갔다.

“지금 이이와 성혼 두 현신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는 실로 거국적인 공론입니다. 두 신하의 학문과 덕의(德義)의 실상에 대해서는 전후하여 올린 상소에서 이미 소상히 말씀드렸으니 이제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당시에 그들을 따르며 배운 자들은 이미 모두 마음속으로 진정 열복(悅服, 기쁘게 복종)하였으며, 죽은 뒤에는 듣고 보고서 경모하는 자들이 거의 온 나라에 퍼져 있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만 가니, 이것이 어찌 억지로 하는 것이겠습니까?”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는 서인들만의 요청이 아니라 거국적인 ‘공론’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그들의 학문과 사람됨은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지방유생들이 서울까지 올라와 상소문을 올린 것에 대한 임금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전일 문묘 종사 일로 상소문을 올린 것은 호남(湖南)의 바닷가와 관서(關西) 지방의 의주(義州) 사람들까지 모두 모여 와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찌 모두 남의 사주를 받아 그렇게 하였겠으며, 또한 어찌 이익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오직 천성에서 우러나온, 떳떳함을 따르고 덕을 좋아하는 마음에 비추어 볼 때 스스로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나 지금이나 안이나 밖이나 인성(人性)이 착하다는 것과 온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가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율곡과 성혼의 훌륭한 성품과 그들이 이룩한 공적이 있어서 지방의 선비들이 나선 것이지 어떤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조익은 임금이 특히 지방유생들이 남의 사주를 받아 서울로 올라왔다고 의심하는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게다가 (유생들이) 천리 길을 멀리서 올려고하면 고생이 매우 많기 때문에 예전부터 경시(京試, 서울에서 행해진 과거시험)에 와서 응시한 북유(北儒, 북쪽지방의 유생)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만약 진실된 마음이 없다면 어찌 남의 사주를 받았다고 해서 오겠습니까? 그들이 온 것은 진실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도 전하께서 이와 같이 의심하고 계시니, 이는 아마도 성인(聖人)이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도리가 아닌가 합니다.(임금이 지금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필자주) 심지어는 (임금께서) 그들 죄가 죽여도 모자란다고까지 하셨는데, 저들이 만약 진심에서 우러나 스스로 왔는데도 전하께서 배척하여 끊기를 이와 같이 하시어 저들로 하여금 원통함을 안고 돌아가게 한다면, 이 또한 임금이 사람을 대우하는 도리에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저 두 신하(율곡과 성혼)의 덕행은 이미 오래전에 드러났는데, 유생들이 존모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니면 모함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조익은 이렇게 임금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미 드러난 율곡과 성혼의 덕행에 대해서 임금은 왜 그렇게 의심을 하고 믿지 못하는가 하고 추궁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조익은 이어서 일전에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경상도 진사 유직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유직(柳㮨)은 선현을 무함(誣陷,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을 함정에 빠뜨림)했을 뿐만이 아니라 항성(恒性, 변함없이 늘 한결같은 성질)을 잃은 자로서 남을 속이는 그 말이 실로 통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가 올린 상소는 모두 허탄하기만 한데 그중에 더욱 뚜렷이 드러난 것은 이러합니다. 이이와 성혼이 서로 논한 이기(理氣)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되풀이한 말이 모두 이(理)와 기(氣)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인데, 유직은 말하기를 곧 ‘이기를 한 물건으로 하였으니 육가(陸家, 육상산陸像山)의 학문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혼의 상소에 있는 ‘신심을 거두어 간직하고 정신을 보호하여 아낀다.(收拾身心, 保惜精神)’는 이 여덟 글자는 본래 주자(朱子)의 말인데도 유직은 말하기를 ‘분명히 유자(儒者)의 말이 아니요, 도가류(道家類)이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너무나도 망령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육상산의 학문이란 육구연(陸九淵, 1139년∼1192년, 호는 상산象山)의 학문이란 심학을 말한다. 남송시대의 사상가 육구연은 ‘마음은 즉 리(心卽理)’라는 사상을 제시하고 주자와 대립하였다. 유직이 율곡의 이기론을 이러한 육구연의 것이라고 하고, 또 성혼의 말을 도교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남을 그럴 듯이 속이는 말이며, 망령된 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조익은 나아가 이러한 유직을 감싸는 영남의 유생들을 이렇게 비판하였다.

“그런데 영남 좌도의 유생들이 유직을 정거(停擧, 과거시험 응시 기회를 정지시킴)와 삭적(削籍, 유적儒籍을 지음)에서 풀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 과거 시험을 폐하고 그것을 절의를 지킨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이 어찌 큰 변이 아닙니까? 그 사건은 무리를 지어 국명(國命)을 거역한 것이고 그 계획은 조정을 협박하고 견제하여 유직에게 내린 벌을 풀게끔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임금에게 강요하는 것은 임금을 무시하는 짓이다’라는 것으로서 그 정상이 참으로 통탄스러우니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보건대 전하의 뜻은 영남 유생에 대해 매양 너그럽게 용납하며 그르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어진 이를 사모하는 말을 한 자는 번번이 깊이 미워하고 통렬하게 꺾으시면서 어진 이까지도 아울러 경홀하게 여기고 계시니, 이 점을 신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조익은 자기가 보기에 임금이 율곡과 성혼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항상 너그럽게 용납하고 있다고 하였다. 반면에 율곡과 성혼에 대해 사모하는 말을 한 자는 번번이 깊이 미워하고 그들을 통렬하게 꺾고 나아가 율곡과 성혼까지도 가볍고 소홀하게 여기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거기다 임금은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자들이 ‘그르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 점을 신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호소하였다.
조익은 임금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영남의 인심을 염려해서 그런 것인가 하고 추측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뜻이 혹시라도 유직의 마음을 거스르면 영남의 민심을 잃게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를 한결같이 너그럽게 용납하며 그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시는 반면, 양현(율곡과 성현)을 종사(從祀)하자는 논의에 대해서는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라는 말씀까지 하시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무릇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은 오직 그 시비가 있는 곳을 관찰하여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예로부터 (성현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어찌 나라를 망치는 도리가 되었습니까. 지난 선조(先朝) 때에 원황(元鎤)이 영남 감사가 되자 유생들이 통문(通文)을 하여 그를 배척했습니다. 그러자 선왕(先王)께서 명하여 앞장서서 창도한 자를 잡아 국문하여 치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영남의 인심을 잃은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과거를 거부하며 지금처럼 공동(恐動, 위험한 말을 하며 남의 마음을 무섭게 함)시킨 일도 보지 못했습니다.”

효종이 유독, 율곡과 성혼을 거짓으로 모함하고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유직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이해하고 그를 비판하고 율곡과 성혼을 문묘에 종사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라고 까지 하면서 역정을 내는 것은 영남의 민심을 얻으려는 생각 때문이 아닌지 조익은 임금에게 물었다. 그리고 인조 때 영남의 유생들이 배척했던 경상도 관찰사 원황의 예를 들면서 그를 반대한 영남 사람들을 조사하여 벌을 주고 했어도 영남인들의 민심이 조정에 등을 돌린 일은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그는 영남 유생들의 과거 시험 거부에 대해서도 이렇게 주장했다.

“저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거부한 것은 모두 그들의 본심이 아닙니다. 과거는 곧 선비들이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출세하는 길이 되기 때문에 평소 크게 하고 싶어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비록 유직과 친하게 지내는 자라 하더라도 유직을 위해 과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한 도의 유생으로서 유직과 평소 알지 못하는 자들이 모두 유직을 위해 과거를 거부하겠습니까. 그럴 리는 만무합니다. 이는 필시 위협하여 제지하는 자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조익은 이렇게 경상도 유생들이 과거시험을 거부한 일에 대해서 자신의 판단을 설명하고 이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난 배경으로 경상도 관리들의 모의 의혹을 다음과 같이 제기하였다. 예를 들면 감사 민응협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감사 민응협(閔應協)도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대개 공도회(公都會, 각 도의 도사가 매년 가을 지방 유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과거)를 폐지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처럼 일이 많은 때에 유독 실시하겠다고 청한 것도 이상합니다. 그리고 또 얼마 뒤에 유생들이 유직에게 벌을 내린 것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겠다고 한다하였으니, 처음부터 공도회를 실시하자고 청한 것은 이를 위한 계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녹명(錄名, 과거 응시원서를 접수함)되어 과거 시험장에 들어온 인원수를 계문(啓聞, 신하가 어떤 내용을 임금에게 글로 보고함)하는 규정은 처음부터 없었는데, 이 또한 의도를 가지고 한 듯하니 매우 괴이합니다. 도주(道主)의 의향이 이와 같은데, 또 중간에 선동하는 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익은 경상도 유생들의 과거시험 거부 사태가 모의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 주모자는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관찰사와 그 밑의 중간 관리들, 그리고 중앙에서 보낸 감사라고 추정했다. 조익은 ‘중간에 선동하는 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임금에게 보고한 것으로 보아 과거시험 거부 사건에 대해 이미 상당한 증거를 수집해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조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먼저 민응협(閔應協)을 파직하고 공정하고 의리를 아는 사람으로 유직을 위해 계획을 하지 않을 자를 가려 보내어 그로 하여금 그곳의 유생들을 잘 타일러서 그들의 의혹을 풀어주게 하는 한편, 유직이 기망하고 일을 그르친 죄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유생들을 위협하고 견제하는 자가 없어져 영남의 유생들이 모두 전과 같이 과거에 응시하여 그들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동시에 한 도내가 안정되어 무사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늘 유직이 기망하는 간특함에 대해 분함을 품고 있던 터에 또 영남 지방의 실정을 깊이 살피고서 감히 다시 무릅쓰고 진달하니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조익으로서는 ‘영남 지방의 실정을 깊이 살피고서’ 이러한 보고문을 올린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 유직의 간특함에 대해서도 분함을 품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율곡과 성혼에 대한 모함을 스스럼없이 하는 그에 대해서 분개하고 있었음을 의미한 것이다.
좌의정 조익의 이렇게 길고, 구체적인 보고서를 접한 효종은 다음과 같이 답변을 내렸다.

“보고의 내용에 병적인 곳이 많다. 내가 경을 위하여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보고서의 내용에 ‘병적인 곳’이 많다는 말은 한마디로 ‘미친 소리, 그만하라’는 말이었다. 임금이 또 거기에 ‘그대가 매우 애석하다’. 즉 ‘좌의정 자리에 있는 당신이 안타깝다’는 표현까지 덧붙였다. 임금으로서는 좌의정의 보고서에 극도의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좌의정 조익은 이 일로 새로운 임금 효종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이해(효종 1년) 11월 2일에 효종실록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좌의정 조익이 여러 차례 사직하자 허락하다.”

조익은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임금에게 사직을 요청했으나 효종은 계속 허락하지 않다가 이날 사직을 허락한 것이다. 이때 조익의 나이는 71세였다.
11월 13일, 원로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조정의 대신들이 임금 앞에 모였다. 대신들뿐만 아니라,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고위 관리들까지 자리를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호조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임금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김상헌(金尙憲)·김육(金堉) 같이 조정의 노성한 신하들이 모두 물러나 이미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즈음 듣자 하니, 조익(趙翼)도 장차 서울을 떠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렵고 근심스러운 때를 당해서는 더욱더 숙덕(宿德, 오래도록 쌓은 덕망)의 노신(老臣)을 머물도록 격려하여 일에 따라 자문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효종은 이러한 건의에 이렇게 답했다.

“경의 말이 맞다. 위로는 천재(天災, 하늘이 내리는 재난)가 거듭 나타나고 아래로는 인사(人事, 사람의 일)가 이와 같으니, 그 연유를 궁구해 보면 허물이 실로 나에게 있다. 조정에 있는 대신들이 서로 연이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고하니,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함께 하겠는가?”

이어서 관리들의 보고를 듣고 있던 효종이 이렇게 명을 내렸다.

“조 정승(조익)과 김 판부사(김육金堉)의 처소에 모두 사관을 보내 돌아오라는 뜻으로 효유(曉諭, 깨달아 알아듣도록 타이름)하라.”

김육은 ‘대동전폐법(大同錢幣法)’을 실시하자고 건의했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김상헌과 김집(金集)등이 반대하고 결국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조익에 대해서는 사관이 같은 날짜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남겼다.

“대체로 조익이 일찍이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 즉 보고서)를 올려 영남 유생들의 잘못을 통렬히 배척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이상일(李尙逸) 등의 상소에 대한 (임금의) 비답에서 (조익의 보고가) 공평치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전교(임금의 지시나 명령 혹은 답변)가 있었기 때문에 조익이 드디어 떠나간 것이다.”

효종은 11월 11일 이상일(李尙逸)이 유직을 변호하면서 조익의 상소문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한 적이 있었다.

“한 도(경상도)의 선비들이 모두 유직의 상소에 참여한 것은 매우 구차한 일이며, 나라의 시험에 나오지 않은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이른바 (경상도의 유생들이) 임금에게 요구하고 위(임금)를 무시했다는 등의 말이, 성난 데(조익의 상소문)서 나와 (조익의 의견이) 바르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내 이미 통촉하고 있다. 너희들이 남과 다투지 않고 물러나 스스로를 닦는다면 비방하는 말이 무엇이 두렵겠는가? 내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각자 힘쓰도록 하라.”

이상일은 그 날짜 상소문에서 임금에게 좌의정 조익의 상소와 조치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하소연을 한 바 있었다.

“심지어 (좌의정 조익이 영남의 유생들을 지목하여) 나라의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신들을 무함(誣陷,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을 함정에 빠뜨림)하는 죄안(罪案, 범죄 죄목)을 삼아, 혹 인륜을 무시하는 해괴한 귀신의 무리로 (저희 영남 유생들을) 지목하기도 하고 혹 (저희가) 임금을 위협하고 업신여겼다는 말을 날조하여, 그들(조익 등 서인들)의 입으로 거론할 뿐만이 아니고, 또한 임금에게까지 아뢰고 있습니다. 아, 이것이 과연 대신이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며, 이것이 과연 사유(師儒, 도를 가르치는 유학자)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입니까?”

11월 11에 일어난 이러한 이상일의 상소문과 효종의 답변을 보고 조익은 아예 서울을 떠날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11월 16일 임금이 보낸 사관이 13일에 이어서 다시 좌의정 조익을 찾았다. 임금이 재차 조익에게 조정에 머물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조익은 상소하여 다시 물러갈 뜻을 임금에게 전했다. 이러한 뜻을 전해 받은 효종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경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니, 내가 다시 무슨 유시(諭示, 타일러 가르침)를 하겠는가? 단지 매우 부끄러울 따름이다. 경은 의당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몸을 요양하라.”

이러한 비답은 떠나가는 노신을 위해서 임금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좌의정 조익에게 “단지 매우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한 것은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둘러싸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자신의 조치에 대한 개인적인 미안함을 최대한 정성을 다하여 표현한 말이었다.

11월 22일 충청도 공주목에 속한 비인(庇仁) 지방에서 선비 남회(南誨)가 상소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근래 영남 유생들의 상소로 영의정 이경여가 임금께 보고하고 관직을 물러났으며, 좌의정 조익이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습니다. 옛날 송나라 인종(仁宗) 때 왕공신(王拱辰)이 사류(士流, 지식인들)를 일망타진하였고, 그 뒤에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구양수(歐陽修) 등도 서로 이어 파직되어 내쫓김으로써 송나라 왕실이 위약해지자 밖의 오랑캐들이 침탈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이때의 일을 거울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임금에게 항의하였다.

“신이 비록 영남 유생들이 상소한 말을 알지 못하지만 풍문으로 들으니 선현(율곡과 성혼)을 비방하고 헐뜯으며 대신을 기롱했다 하니, 영남 유생들은 괴이한 것을 좋아함이 심합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역신(逆臣) 정여립(鄭汝立)·정인홍(鄭仁弘)등이 크게 어진이를 배격했다고 하니, 어찌 정인홍을 따르는 사람들의 의논이 아니겠습니까? 영남은 평소 문헌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왔는데, 도리어 공자를 업신여기고 여러 현인들을 꾸짖는 무리가 있으니, 사문의 불행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정인홍(鄭仁弘, 1535년∼1623년)은 광해군 때 북인과 남명 조식의 제자들을 이끌고 정국을 주도했다. 조식의 수제자이며 북인 강경파로 꼽인 그는 남인들이 인조를 옹립하고 반정을 일으킬 때,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광해군 때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적이 있었다.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으로서는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상소문이었다.
이러한 상소문에 효종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대가 초야의 선비로서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와 같이 진언을 하니, 내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다음날 11월 23일 효종은 좌의정 조익의 직책을 ‘영중추부사’로 바꾸어 주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는 고위직에서 물러난 문관들을 예우하고 그들에게 계속 녹봉을 주기 위한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일정한 소관사무가 없고 녹봉만 받을 뿐이었다.
다음달(윤달) 11월 20일 조익이 임금에게 소장을 올려 벼슬을 사양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임금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는 것이 비록 옛날의 예이지만 그것은 태평할 때에나 마땅하지 위란(危亂, 위태롭고 어지러움)할 때에는 마땅치 않다. 이때가 어떤 때인데 기로(耆老, 나이 먹음, 원로)의 대신들이 서로 줄이어 초야로 도망가 나로 하여금 고립되게 하는가? 경은 이 점을 생각하라.”

조익은 그 뒤에 소현세자 부인으로 억울하게 처형된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의 호칭 문제로 고초를 겪기는 했지만, 줄곧 효종의 곁에서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혼란스러운 조정이 중심을 잡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그는 효종 6년(1655년) 3월 10일, 77세로 사망하였다. 『효종실록』에는 그의 사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졸기(卒記)가 실렸다.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조익(趙翼)이 사망하였다. …… 광해군 초기에 이이첨(李爾瞻)이 권력을 잡았을 때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전랑(銓郞)에 천거하려 하였으나, 조익이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제현(諸賢)을 공박하여 배척할 때에 조익이 옥당(궁중의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고 왕에게 학문적 자문을 하던 관청)에 있었는데 동료와 함께 글을 올려 그 죄를 논하였다. 이 때문에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폄출(貶黜)되었는데, 모후(母后)가 유폐되어 윤기(倫紀)가 아주 무너진 것을 보고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한번도 성시(城市)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해년에 반정(反正, 인조반정)하고서는 맨 먼저 옥당에 들어갔는데 걸핏하면 성인의 학문과 선왕의 정치를 인용하니, 인조(仁祖)가 번번이 허심탄회하게 들었다. 지금의 성상께서 즉위하고서 드디어 정승이 되었는데 조익이 상이 큰일을 할 뜻이 있는 것을 보고 알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 이이·성혼을 종사하는 논의를 힘껏 주장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향리에 물러가 경적(經籍)에 침잠하였다. 이때에 사망하니, 나이는 일흔 일곱이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그가 지은 『서경천설(書經淺說)』·『용학곤득(庸學困得)』 등의 책 가운데에서는 주자장구(朱子章句)를 제법 많이 고쳤는데, 사람들이 이 때문에 흠을 잡는다.”

8. 우의정 조익 부자의 상소

8. 우의정 조익 부자의 상소

 

7월 22일, 문묘 종사를 둘러싼 상황을 지켜보던 우의정 조익(趙翼, 1579∼1655)이 임금에게 간단한 상소문(건의서)을 올렸다.

“우리 왕조의 선현(先賢) 중에 조광조(趙光祖)는 도학(道學)을 밝혔고, 이황(李滉)은 유학의 이치에 침잠하였으니, 이 두 분이야말로 가장 뛰어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이이(李珥, 율곡)와 성혼(成渾)만한 이가 없습니다. 이것은 신의 말이 아니라 그동안 선배들의 말이 모두 그러합니다. 이이는 천품이 고매하고 마음이 순수하며 식견이 뛰어나고 선(善)을 행하는데 민첩하며 용감하니, 이점에서는 우리나라 역사 이래로 없었던 일인 듯싶습니다. 그리고 성혼은 고명(高明)함이나 투철한 면에서 이이에게 못 미치는 듯하지만 지조의 엄격함과 행실의 독실함은 실로 이이와 비슷하니, 두분 모두 세상에 드문 대현(大賢)입니다.”

율곡과 성혼을 이렇게 높이 평가한 조익은 현령을 지냈던 조간(趙侃)의 손자이며, 중추부첨지사 조영중(趙瑩中)의 아들이다. 조익의 어머니는 찬성을 지낸 윤근수(尹根壽)의 딸이다. 윤근수는 시인이자 화가이며 연천군수, 형조판서 등 고위관리를 역임한 바 있다. 윤근수는 퇴계 이황의 제자였으나 서인, 동인으로 붕당이 형성될 때 서인 쪽에 가담하였다. 그는 또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의 동생이기도 하다. 윤두수 역시 퇴계의 제자였으나 서인에 속했다.
조익은 1602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관리가 되었는데, 1611년(광해군 3년)에는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정여창(鄭汝昌) 등을 문묘에 배향하자고 주장하다가 좌천된 경력이 있었다. 인목대비가 유폐될 때는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경기도 광주로 내려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즉위하자 다시 조정에 들어가 응교·직제학, 동부승지 등을 거쳐 우의정까지 올랐다.
조익은 효종이 율곡과 성혼에 대한 비판은 눈감아주고 율곡과 성혼에 대한 문묘종사 요청을 매정하게 외면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전하께서 참으로 그 두 사람의 현명함 여부를 알고 싶으시면 둘 다 문집이 있으니 가져다 보시면 될 것입니다. 문집은 골고루 살펴보실 틈이 없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행장(行狀)이 한 권 있는데, 그 책은 바로 김장생(金長生)이 짓고 이정귀(李廷龜)가 정리한 것입니다. 평생동안의 (율곡의) 언행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을 보시면 그들이 의심할 나위 없이 대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간사한 사람들이 욕하고 헐뜯은 것으로 인하여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를 없애버린다면, 이는 간사한 자들을 중하게 여기고 어진이를 가볍게 여기는 처사이니, 사리상 어찌 당연한 일이겠습니까? 삼가 성상(임금)의 뜻이 아직 정해지지 못한 듯하기에 감히 생각했던 것을 다 말씀드려 성찰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효종으로서는 다소 기분이 나쁠 수 있는 제안이었다. 효종은 청나라에서 오랫동안 형인 소현세자와 인질로 붙잡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려서 1년 정도 송시열에게 유학을 배운 적이 있었으며 율곡과 성혼에 대해서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효종도 굳이 동인, 서인이라는 붕당으로 따지자면 서인 쪽이었다. 스승 송시열이 서인이기 때문이다. 조익은 이미 광해군 때도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 등의 문묘종사를 주장하다가 처벌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효종으로서는 신경이 쓰이는 신하였다.
효종은 이렇게 답하였다.

“경처럼 순수하고 착실하며 노련한 사람도 이런 행동을 하니, 내가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나랏일을 생각하여, 시끄럽게 (문묘 종사를 건의하며) 떠들고 있는 자들의 앞장을 서는 일은 하지 말라.”

효종으로서는 일종의 경고였다. 광해군 때처럼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조익의 영향력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이미 70이 넘은 원로에다 서인의 리더이고 거기다 우의정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으니 효종으로서는 위협을 느낄만 했을 것이다.

조익의 건의서가 올라간 다음날(효종 1년 7월 23일), 사직(司直) 조복양(趙復陽, 1609-1671)이 상소문을 올렸다. ‘사직’이란 조선시대의 중앙군인 오위(五衛)에 속한 정5품 관직이었다. 조복양은 또 전날 건의문을 올린 우의정 조익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1633년(인조 1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8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뒤에는 검열, 지평, 정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효종이 즉위하던 해인 1649년에는 부교리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부친이 우의정까지 오른 조복양이었지만, 그 자신도 충분한 능력을 갖춘 인재였다.
그는 임금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아, 언로(言路)가 열리느냐 닫히느냐에 따라 나라의 치란(治亂, 다스림 혹은 혼란)이 결정됩니다. 생각컨대 우리 성상께서는 너그럽게 용납하시고 지극한 사랑으로 신하를 대우하시며 대신(臺臣, 헌관憲官이라고 부르기도 함. 사헌부에서 정사를 논하고 관리들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것을 풀어주며, 권력 남용을 금하는 등의 업무를 맡은 신하)들이 논한 것도 많이 채택하여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직언을 가려듣는 덕에는 부족함이 있고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도량에는 넓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뜻에 조금만 거슬리면 문득 꺾어버리시는가 하면 천둥소리와 같은 위엄으로 진노하기도 하고 출척(黜斥)의 벌을 베풀기도 하며 죄는 주지 않더라도 싫어하는 기색을 완연히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효종의 너그럽지 못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그는 “우선 요즘의 일을 가지고 말해 보겠습니다”라고 하며, 당시 효종이 즉위한 뒤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부조리한 일들에 대해서 소개했다. 대개는 임금의 잘못된 결정이 사태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임금은 말을 간결하고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임금의 말이 원근에 전파되면 백성들이 듣고 남몰래 그 뜻을 논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할 때에 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무릇 말에 관계된 일은 조금이라도 사리에 타당할 경우에는 비록 잘못한 바가 있더라도 아울러 너그럽게 용서해서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각을 다 말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듯이 정치를 논의하고 이익을 추구하듯이 충성을 바치게 한다면, 어찌 언론을 크게 열어 놓고도 국가를 다스리지 못할 걱정이 있겠습니까?”

효종이 볼 때 조복양의 이러한 말은 마치 그의 아버지 조익의 건의서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비판하는 듯한 것이었다. 비록 조복양은 다른 관리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지만 지금 조정에서 말이 많은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에 대한 효종 자신의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조복양은 문묘 종사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효종이 율곡과 성혼을 근거없이 비방하는 반대파를 두둔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점에 대해서 이렇게 항의했다.

“아, 천하의 일은 시(是)가 있으면 비(非)가 있게 마련이고 정(正)이 있으면 사(邪)가 있게 마련입니다. 시비(是非)를 분변하고 사정(邪正)을 분별하는 것보다 더 큰 임금의 직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가부를 논하시는 것이 그다지 명료하지 못한 듯한데, 무엇 때문입니까?”

임금이 “왜 시시비비를 정확히 분별하지 못합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모호하게 처리합니까?”라는 항의였다. 조복양은 이어서 이렇게 제안했다.

“선정신(先正臣, 돌아가신 대신)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순유(醇儒)요 대현(大賢)이라는 것은 전하께서도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무리 종사(從祀, 문묘 배향)하는 예가 중하여 어렵게 여기신다 하더라도, 어찌 저 간사하고 망령된 무리들이 함부로 헐뜯으며 욕하도록 놓아둔 채 조금도 돌아보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지금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건의하는) 유생들의 상소를 도로 물리치자 태학(太學, 성균관)이 다시 텅 비었습니다. 유생들도 참으로 과격하게 행동한 잘못이 있습니다만, 전하께서 유생들을 대우하는 것이 너무 박하지 않습니까? 사문(斯文, 유학자들)의 의논이야말로 세도(世道, 세상의 도의)의 성쇠와 직결되는데, 몸을 굽혀 선비에게 예우하는 것이 곧 제왕의 성대한 예절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유(儒)를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기는 마음을 독실하게 하시어 세교(世敎, 세상의 가르침)를 밝히소서.”

성균관의 유생들이 문묘종사를 요구하며 해산한 일에 대해서 임금의 잘못을 완곡하게 지적한 것이다. 그것은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간사하고 망령된 무리’들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성균관 유생들의 올바른 건의를 임금이 물리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 그는 선량하고 지명도가 있는 선비를 찾아서 등용하며, 잡직에 사용할 만한 사람들도 추천을 받아 채용할 수 있도록 제안하고, 임금의 조카이자 인조의 손자가 되는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에 대해서도 특별한 석방을 요청하였다.(소현세자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이미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경안군의 석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이번에 심리(審理)하면서 (경안군에 대해서) 특별히 석방의 은택을 베풀어 준다면 이를 통해 화기(和氣)가 어쩌면 감돌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일반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에도 용서해 줄 수 있는 법인데, 더구나 선왕의 손자이며 전하의 유자(猶子, 조카)인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예(禮)에 절모(絶母, 어머니와의 관련을 끊음)하는 의(義)가 있고 법으로도 종모(從母, 어머니의 신분을 따름)하는 조항이 없는데, 당초 법률을 의논한 신하는 무엇을 상고해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까운 지역에 옮겨 둔 것이야말로 지극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특별히 더 어루만져 길러 은애(恩愛)를 다한다면, 어찌 성인(聖人)의 지극한 덕이 아니겠습니까?”

위의 상소문 중에 경안군을 ‘가까운 지역에 옯겨 둔 것’이란 당시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긴 것을 말한다. 경안군은 그동안 제주도에 유배 중이었는데 효종이 즉위한 뒤에 가까운 강화도로 옮겨준 것을 말한다. 이어서 조복양은 다음과 같이 상소문을 마쳤다.

“아, 풍속이 날로 악화되어 인륜이 무너진 나머지 짐승 같은 짓이 선비의 족속에서 발생하고 향리에서는 효제(孝悌)의 행실을 들어볼 수가 없으니, 교육하여 인도할 방도에 대해 참으로 생각을 더하여 강구해야 합니다. …… 충신(忠臣)·열사(烈士)로서 절의(節義)를 지키다 죽은 자에게는 제사 지내는 은전을 내리기도 하고 자손을 돌봐주기도 하여 풍성(風聲)을 세워야 하는데, 이것 또한 새로 펴는 정치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일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은 모두 마땅히 행해야 할 급선무입니다만, 삼가 생각건대 뜻이야말로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정치를 하는 데에는 반드시 뜻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니, 전하께서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 뜻을 확고히 정하여 깊이 생각하셔서 맹성(猛省, 깊이 반성)하소서.”

조복양의 이 같은 상소문은 상당히 수위가 높은 것이었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은 효종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바로 하루 전에 우의정 조익의 항의에 가까운 건의서를 받고 짜증스러운 답변을 한 것이 이렇게 반발을 부른 것이다.
효종으로서는 조복양이 조익의 아들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조복양이 조정의 핵심적인 부대에서 ‘사직’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는 것도 마음이 걸렸다. 조복양의 상소문은 직설적이었고, 임금의 행동을 거리낌 없이 평가하는 것이었다. 또 효종으로서는 가장 외면하고 싶은 조카의 문제, 즉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에 대해서도 ‘석방’을 요구하고 있었다. 조카 문제는 효종 자신의 정통성 문제와도 관련된 것으로 언급 자체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효종은 조복양의 이러한 상소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였다.

“그대가 이토록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였는데, 재삼 읽어보고 내가 가상하게 여겨 감탄하였다. 마음에 새겨 채택해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효종으로서는 최대한 절제하며 생각해낸 답변이었다.
조복양의 상소문이 올라온 다음날(7월 24일), 우의정 조익이 또다시 상소문을 올렸다. 조익은 첫머리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율곡과 성혼에 대한 자신의 굳은 입장을 설명했다.

“신은 젊어서부터 성혼(成渾)과 이이(李珥) 두 신하의 어짊에 대하여 깊이 감복하였는데, 좋아하고 사모하는 것이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와 다름이 없고 공경하고 흠망하는 것이 옛 성인에 대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은 우직하도록 소박한 성격을 지녔습니다만, 철이 든 뒤로는 들은 것과 아는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보통 말하고 논할 때에도 아는 것을 변경하여 이 마음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이는 신의 융통성 없는 성격으로 죽을 때까지 굳게 지키고 변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도집입적으로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와 관련하여 임금의 잘못된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그런데 삼가 성상의 분부를 보건대 두 신하에 대해 부족하게 여기는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에게는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에 극진하지 못한 점이 있고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에도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에 미진한 바가 있고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에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으면 그 해로움이 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무 말 없이 입만 다물고 있다면 이는 전하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의 구구한 마음이 스스로 편치 못하기에 감히 두 신하의 현덕(賢德, 지혜로움과 도덕)에 대한 실상을 대략 진달해서 우러러 전하께서 성찰해 주시기를 바랐던 것인데, 이는 다만 성상을 위하여 두 신하에 대해 밝게 아시기를 원한 것일 뿐이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일전에 자신이 올린 건의문에 대해서 효종이 자신의 의견을 외면하고, 문묘 종사 건과 관련하여 나서지마라고 한 것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였다. 그는 임금의 그러한 답변이 가슴에 맺혔는지 다음과 같이 그 말을 되새겼다.

“그런데 삼가 성상의 비답(답변)을 받들어 보았는데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자들의 창도(倡導, 앞장섬)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지극히 어리석긴 하지만 어찌 유생(儒生)들의 소란스런 논의를 위해 진달(남의 말을 위에 올림)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신이 평소에 일을 처리하는 것에 볼 만한 것은 없지만 부박(浮薄, 천박하고 경솔)하여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잘못은 일찍이 저질러 본 적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이 너무나도 노망(老妄)하여 정신이 혼미해서 일을 생각하는 것이 전도(顚倒)된 듯합니다. 그런데도 오래도록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 시위소찬(尸位素餐,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녹을 받아먹음)의 부끄러움만 가득하니, 삼가 바라건대 면직해 주시어 문을 닫고 분수를 지키면서 남은 여생을 마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자신의 진실한 뜻을 알아주지 않으니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효종은 이같은 우의정 조익의 상소문에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면서 직무를 살피라.”

조익, 조복양 부자가 이렇게 연달아 상소문을 올린 것에 대해서 효종은 더이상 문제를 확대시키기를 꺼려했는지 위와 같이 조심스러운 답변을 내렸다.

7.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 시위

7.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 시위

 

7월 3일 태학생(太學生) 박세채(朴世采) 등이 상소하였다. ‘태학(太學)’이란, 성균관을 말하며 태학생은 성균관 유생을 말한다.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둘러싸고 찬성파와 반대파가 경상도에서 서로 충돌하고 동시에 서울 성균관 내부에서도 서로 충돌하여 일부 성균관 유생들이 한때 집단으로 수업 거부를 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박세채는 유직 등의 상소가 부당함을 알리고 동시에 성균관 내부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한 상황보고도 겸해서 이러한 상소를 올린 것이다.

“두 분의 현신(賢臣, 율곡과 성혼)을 문묘에 종사(從祀)하자는 청원이 있은 뒤에, 일종의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선정(先正, 율곡과 성혼)에게 추악한 말을 하였습니다. 사림(士林, 선비들)들은 이를 통탄스럽게 여겨 온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저 유직이란 자는 얼마나 괴귀(怪鬼)한 위인이기에 사론(邪論, 사악한 논의)을 떠벌려 죄안(罪案)을 만들고는 말하기를 ‘(율곡 선생이) 어버이를 유기하고 임금을 뒤로 미루어 명교(名敎, 유학의 가르침 즉 유교)에 죄를 얻었다’고 한단 말입니까? 아,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지만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래서 지난번에 (성균관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였을 때 공론(公論)이 더욱 격렬해져서, 앞서 시행한 벌(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벌)이 죄에 비해 오히려 가볍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마침내 부황(付黃, 누런 쪽지를 붙이는 처벌)하는 조치가 있게 되었는데, 동참한 유생들은 이견을 가진 자가 없었습니다.”

박세채는 1649년(인조 27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는 일찍부터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읽었으며, 그것을 시작으로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유직의 상소문을 읽고 그 잘못과 부당함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러한 상소문을 올린 것이었다. 이어서 그의 상소문은 문묘 종사를 둘러싸고 성균관 유생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 특히 권당(捲堂, 교실을 비우는 시위 혹은 집단행동)이라고 하는 수업 거부 사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유직의 처벌에 대해서 성균관 내부에서는 크게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래선(睦來善)·이희년(李喜年) 등이 음관(蔭官, 과거를 거치지 않고 선발된 관리)으로서 재론(齋論,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기구인 제회齋會에서 행하는 논의)에 참여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자는 주장을 앞장서서 꺼내 한 떼의 사람들을 선동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집단행동 하는) 세 가지 이유를 내세웠는데, 첫째는 ‘유직을 부황하는 죄를 주었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고 하였고, 둘째는 ‘재론(齋論, 자치 모임에서 하는 논의)할 때에 가부(可否)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동료들이 모두 나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 모임에서 유직 등의 처벌을 논할 때, 그것을 반대하는 유생들이 집단으로 교실을 비우는 시위(권당捲堂)를 한 상황과 이유를 임금에게 설명한 것이다. 박세채는 유직 등 반대파들의 상황을 더욱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대개 재벌(齋罰, 성균관 유생 자치회의 처벌)로 가벼운 것은 손도(損徒, 일시적인 회원 권한의 제한)이고 무거운 것은 삭적(削籍, 회원명부의 삭제)하거나 부황(付黃, 명부에 노란 딱지를 붙임)하는 것입니다. 이 전례가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찌 꼭 윤기(倫紀, 윤리와 기강)를 범한 다음에야 비로소 부황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반대파들이 유생들의 자치 회의에서) 다른 의견을 세우고자 한다면 쟁론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일찍이 한마디 말도 언급하지 않다가 물러가서야 뒷말을 하면서 이것을 꼬집어 허물로 삼고 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위에서 말한 ‘재벌(齋罰)’은 즉 성균관 유생들 자치회의에서 문제가 있는 유생에게 제재를 가하는 처벌을 말한다. 이중에 ‘손도(損徒)’는 일시적인 회원 권한의 제한인데, 예를 들면 강의가 있을 때 정식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문밖에서 들어야 하며, 유사(有司) 등의 직책을 맡지 못하는 제한을 받는다. 이러한 손도에 처해졌다가 용서를 받고 벌에서 해제가 되면, 감사를 표하는 잔치를 베풀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손도는 가장 가벼운 처벌이고,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며 선현을 모함한 거짓 상소문을 올린 유직 등은 더 중한 처벌로 삭적(削籍)과 부황(付黃)의 처벌을 받았다. 삭적은 유생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것이고 부황은 그 이름에 노란 딱지를 붙이는 것인데, 노란 딱지가 붙게 되면 평생을 낙인이 찍혀 관직에 진출하거나 유학자로서 활동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박세채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성균관 유생들이 권당이라는 시위를 하게 된 이유와 그 후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렇긴 하지만 이일은 염우(廉隅, 품행이 바르고 절개가 굳음)에 관계된 것인데, 어찌 스스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여 편안하게 여기고 굳게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따라 나온 것은 대체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신들이 전후하여 권당(捲堂, 당을 비움)한 것은 진실로 부득이하여 취한 것입니다. 그 뒤 성상께서 가능한한 조화시키려는 뜻을 두시고 특별히 대종백(大宗伯)을 보내 곡진하게 유시(諭示, 타이르고 가르침)하셨는데, 얼굴을 대하고 명하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명을 받들고 두려운 나머지 즉시 식당(食堂)으로 들어갔는데, (이 말은 권당을 해제하고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하였다는 뜻임-역자주) 먼저 나간 자들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끝내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어 바야흐로 주저하고 있을 때 대신이 유직을 부황한 표지를 제거하기를 청하자, 임금께서 성균관에 분부하여 타이르도록 하셨습니다.”

학당을 비우는 시위는 처음에는 유직 등이 시작하였으나, 이윽고 일반 유생들도 어쩔 수 없이 함께하게 된 것이며, 임금이 권당을 풀어라고 사람을 내려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에 자신들은 권당을 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직 등을 옹호하는 유생들은 아직도 성균관에 복귀하지 않고 있음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유직에 대한 부황의 죄를 해제해줄 것을 대신들이 요구하고 있으며 그것은 임금께서 성균관 관장에게도 분부하신 내용이라는 것을 자신들은 숙지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박세채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유직에게 (부황의) 벌을 추가한 것은 실로 공공(公共, 자치회에서 공적으로 행함)의 논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한때 (어지러운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조치 때문에 구차하게 해제하거나 해서는 안 될 것이 분명합니다. 어진이를 모함한 벌에 대해서 더하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하는 것은 본래 선비들의 책임이지 결코 대신(大臣)과 조정(朝廷)이 지휘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이 한번 열리면 뒷날 있을 무궁한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감히 명을 받들지 않았던 것인데, 어찌 엄한 비답을 갑자기 내리시면서 준엄하게 말씀하실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박세채는, 유직의 죄를 해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응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는 성균관 내부 유생들, 즉 선비들의 자치조직에서 공적으로 결정한 것이므로 대신이나 조정이 지휘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임금의 명도 그래서 받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임금은 엄하게 교시를 내려 꾸짖으니 이는 유생들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고 한다. 박세채의 말을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임금이 상식에 어긋난 지시를 한 것이다.
박세채의 상소문은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대체로 (임금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신하로서는 가장 무거운 죄입니다. (임금께서 일전에 비답으로 교지를 내리신 말씀 중 저희들이) ‘나라 안에 있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는 바로 저희들은 교화(敎化) 밖의 백성입니다. 이와 같은 죄악을 지고는 감히 일각도 성묘(聖廟)의 아래에 숨 쉬고 살 수 없는 바이기 때문에 (저희 유생들은) 시골에 물러가 살면서 공손히 현륙(顯戮, 죄인을 죽여 그 시체를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 여기서 죄인이란 자기 자신들을 의미함.)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이번에 성상께서 넓은 도량으로 신들을 포용하시어 여러 번 말씀을 내리셨으므로 신들도 감히 한결같이 물러가 움츠리고만 있을 수 없기에 힘써 도로 (성균관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명령을 어긴 죄만은 여전히 신의 몸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죄를 범하여 지고 있으면서도 한번 가슴속의 말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끝끝내 임금을 업신여긴 율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유생들이 성균관에 다시 들어온 이유와 이러한 상소문에서 그 동안의 과정을 구구절절이 올리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상소문을 마무리 하였다.

“신은 한 말씀을 내려 결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양신(兩臣, 율곡과 성혼)을 어질다고 여긴다면 높여 숭상하는 자가 옳고, 공격하여 배척하는 자가 잘못이며, 만약 양신을 어질지 않다고 여긴다면 공격하여 배척하는 자가 옳고 높여 숭상하는 자가 그른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 한번 밝혀지면 간사함과 정직함이 즉시 판명될 것입니다. 이밖에는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통쾌하게 결단을 내려주시어 높여 숭상하고 공격하여 배척하는 사이에서 좋아하고 싫어하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시비가 혼동되지 않고 사정(邪正, 사악함과 바름)이 저절로 판명될 것입니다.”

이러한 박세채의 건의는 효종을 오직 하나의 길로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임금에게 율곡과 성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명한 답변을 해달라는 것이다. 임금의 명쾌한 답변을 기대하면서 올린 상소문이지만 효종으로서는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임금은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이미 (그대가) 말하기를 ‘(성균관 유생들 사이에 행한 결정은) 결코 대신과 조정이 지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글을 올릴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 상소를 도로 내어 주라.”

임금으로서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이 문제를 회피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이 상소문을 없었던 것으로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임금의 답변에 상소문을 전달한 관리가 이렇게 말했다.

“유생들의 상소에 답을 내리지 않는 것은 자못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결함이 있는 일입니다. 마땅히 분명하게 비답을 내리시어 상하가 막히지 않게 하고 유생들이 스스로 안정되게 하십시요.”

효종은 나이 30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인조 임금은 효종을 선택하면서 ‘나라에는 나이 먹은 임금’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미 죽어버린 맏아들 소현세자의 아들, 즉 원손이 있었으니 그에게 임금 자리를 주어도 될 일이었다. 혹자는 인조가 소현세자를 암살했다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에게 임금 자리를 주기 싫어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인조로서는 임금의 자리가,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효종은 꿈이 큰 임금이었다. 지금 임금의 자리에 오른지 1년도 안되었지만 그는 북방의 청나라 오랑캐를 정벌할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건장하고, 건강하며, 체격도 좋은, 다분히 다혈질의 임금이었다. 자신이 북벌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했다.
효종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서인 쪽 관리들은 율곡과 성혼의 사상에 물들어 임금이라는 존재를 아주 우습게 여긴다. 서인들이 말하는 이기론에는 그러한 사상이 감추어져 있었다. 임금이 정치를 주동하여 이끌 수 없다는 것이다. 임금은 신하들이 정치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그는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 청태종(崇德帝, 1592∼1643) 홍타이지가 청나라를 일으키고 천하를 정복하는 과정을 자기 눈으로 직접 지켜본 경험이 있었다. 조선의 어떠한 관리들도 임금 자신만큼 세상을 넓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조정은 이미 서인들의 것이었다.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로 일은 점점 더 커져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행동으로까지 번졌다. 경상도 유생들은 지방에서 서로 편을 나누어 싸우고 있다.
효종은 자신이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이렇게 답을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나와 대신(유생들에게 유직의 죄를 해제해달라고 지시한 대신-역자주)이 다 사체(事體, 일의 큰 맥락. 즉 어떤 일의 경위가 어떻게 어떻게 되어간다는 중요한 내용)에 어둡고 조치를 취함에 마땅함을 잃어 유생들로 하여금 더욱더 불평하는 마음만 갖게 만들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러워 답할 말이 없다.”

이러한 상소문을 올린 박세채(朴世采, 1631∼1695)는 자신의 상소문에 대한 임금의 답변 가운데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음을 알고’ 이에 분개하여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가 분개한 것은 아마도 효종이 자신의 비답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고쳐 말하기 전의 비답, 즉 ‘이러한 글을 올릴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 상소를 도로 내어 주라’라는 말에 분개한 것으로 보인다.
박세채는 이 뒤에 성균관을 자퇴하고 나와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특히 그는 예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송시열, 송준길과도 학문적인 교류를 하였다. 이후 그는 조정으로 불려 나와 효종대에 사헌부집의(執義), 동부승지, 이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의정부 좌의정까지 올랐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상소문의 비답을 듣고 다시 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은 “성상의 분부가 간절하여 태학(성균관)에 도로 들어오긴 했으나 이미 명령을 어긴 죄를 졌고 또 (임금께서) 상소를 물리치는 조치가 있었으니, 이대로 현관(賢關, 현자들이 거치는 관문, 즉 성균관)에 거처하고 있을 수 없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대궐에서 물러나 성균관으로 돌아가서 성묘(聖廟, 문묘)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그 길로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임금은 유생들이 또 권당(捲堂, 성균관을 비우고 나감)하고 나갔다는 말을 듣고, 대신과 비국(備局, 군국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의 여러 신하를 불러 접견한 뒤에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처하지 못하여 유생들이 지금 또 성균관을 비웠다. 처음에는 나도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근시(近侍, 측근 신하)를 보내어 타일렀는데, 지금은 상소문 속의 말뜻을 보건대 명령을 어겼다고 한 것을 꼬투리로 삼고 안으로 탐색하여 (임금의 마음을) 시험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다. 유생은 매양 염치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인군(人君, 임금)만 유독 염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래서 답하지 않고 그저 부끄럽다고만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공관(空館, 성균관의 유생들이 감행한 집단시위)까지 할 일인가? 사방에서 보고 들으면 반드시 해괴하게 여길 것이다.”

임금으로서는 정말 참을 만큼 참고 참아서 대답을 안한 것인데, 또 성균관을 비웠다는 이야기에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것이다. 그래서 고위 관리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이들이 나를 시험하려고 한다”고 외친 것이다. 공관(空館)은 성균관 유생들이 할 수 있는 시위 중에 가장 강도가 센 것으로 성균관을 비우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집단파업이고 동맹휴학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그 자리에 있던 우의정 조익(趙翼)이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유생들은 본디 지휘해서는 안 됩니다. 또 위협해서도 안 됩니다. 특별히 포용하는 아량을 보여 온화한 비답을 내리시면, 저 유생들이 어찌 끝끝내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대사성 이후원(李厚源)은 임금에게 이렇게 성균관의 상황을 전했다.

“제가 사장(師長, 성균관의 정3품 당상관직으로 성균관 관장)의 자리에 있지만 유생들의 논의에는 전혀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상소의 말이 어떠했는지 몰랐는데, 공관(空館)한 뒤에 그 뜻을 재임(齋任, 자치회 대표)에게 물어보니, 그가 말하기를 ‘상께서 명령을 어긴다는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감히 현관(賢關, 성균관)에 거처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돈독하신 유시가 세 번이나 이르렀으므로 할 수 없이 들어왔으나, 이미 명령을 어긴 죄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략 소장을 진달했던 것이다. 그런데 비답은 내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엄한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유생들은 감히 태연하게 재(齋, 숙소)에 거처하지 못하고 서로 더불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말을 듣고 임금은 마음이 조금 누그러져 이렇게 말했다.

“향당(鄕黨, 지방)에서 사심 없이 좋아하는 자들도 양신(兩臣, 율곡과 성혼)을 어질다고 말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종사(從祀)하는 일은 중대한 예전(禮典)이니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 유생들의 이 행동이 어진이를 높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실은 노리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도리상 어찌 피차(彼此)에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두어 치우친 일을 하겠는가? 나도 전에 태학(성균관)에 들어갔는데, 지금 태학에 직숙(直宿, 직접 거처)하면서 인(仁)에 처하고 의(義)를 실천할 계획을 하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을) 결코 돈독히 타이를 수 없다.”

임금의 이러한 말을 듣고 이기조(李基祚)·박서(朴遾) 등이 이렇게 건의했다.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입니다. 사기(士氣, 선비들의 기개)를 북돋아 세우는 것이 임금이 할 도리입니다. 선비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사람마다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임금이 자칫 성균관의 유생들을 자기 뜻대로 몰아서 혹시 처벌을 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이런 건의를 한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도 상황에 따라서는 임금을 고통스럽게 몰아칠 수 있기때문에, 젊고 혈기가 왕성한 임금이 이일에 직접 나서는 것은 또 다른 불씨를 만들 위험이 있었다.
효종은 관리들이 나서서 경계를 하는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같은 자리에 있는 이후원(李厚源, 1598∼1660)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후원은 당시 효종의 최측근으로 임금의 북벌모의에 참모가 되어 전함 200척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유생들이 자기들의 뜻을 펼 목적으로 번번이 이런 식으로 임금을 협박할 계획을 하니, 이런 폐단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나보다는) 경의 뜻으로 타이르는 것이 온당하겠다.”

성균관 유생들의 공관 소동은 이로서 일단락되었다.

6. 사헌부의 중재 의견과 관료들의 반발

6. 사헌부의 중재 의견과 관료들의 반발

 

신석형의 상소문이 올라가고 약 2주 정도가 지난 (효종 1년) 5월 20일, 관리들의 감찰업무를 담당하는 사헌부가 직접 나섰다. 율곡의 문묘 종사 문제를 가지고 건의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대립이 심각해지자 관리들이 사헌부 명의로 임금에게 직접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 영남 유생들(신석형 등 40여명의 경상도 유생들)이 이이와 성혼을 변호하여 상소한 것은 한때의 공의(公議, 공적인 논의)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추악한 무리들(유직 등 문묘 종사 반대파 유생들)이 서로 배척하여 그들(신석형 등)의 집을 허물고 경상도에서 축출하는 벌을 가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야말로 과거 정인홍(鄭仁弘)이 한 도를 위협했던 풍조라 할 것입니다. 방백(도백, 즉 경상도 관찰사)으로 하여금 공명정대하게 조사하여 주동한 자를 적발해서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사헌부는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유생들, 즉 유직 등이 율곡과 성혼의 사상을 변호하는 유생들, 즉 신석형 등의 집을 허물고 그들을 거주지에서 축출하는 벌을 가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를 조사하여 정죄하고자 한다고 건의한 것이다. 모두 경상도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경상도 지역 책임자인 관찰사에게 이 사건을 조사하여 관련자를 처벌하자고 건의하였다.
효종은 이를 허락한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내가 보기에 (양측이) 서로 배격했다는 점에서는 (율곡의 문묘종사를 찬성하는)서울의 유생들이 반대파 유생들의 학적을 삭제한 행동도 마찬가지로 나쁘다고 생각한다.”

서울의 유생들이 반대파 유생들의 학적을 삭제한 행동이란 성균관에 속한 유생들이 이상진(李象震), 유직 등 종사(從祀)를 반대하는 유생들을 처벌하기 위해 그들 이름을 유생들의 목록(儒籍)에서 삭제한 일을 말한다.
하지만 사헌부 관리들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신석형의 상소에 대해서 경상도 지역의 유생들이 사적인 벌을 가하는 것은 분명히 국법으로도 처벌할 수 있는 죄이기 때문에 이를 건의한 것이고 임금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허락한 것이다.
사헌부 관리들은 대개 서인측 관리들이며,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유생들은 대개 남인쪽 학자들이었다. 효종은 내심 남인 쪽 유학자들을 두둔하면서 문묘 종사 반대파 유생들의 지나친 행동에 대해서는 처벌을 허락하였지만, 그래도 양쪽이 나쁘다고 한 것이다.

6월 3일, 효종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낀 영의정 이경여(李敬輿, 1585∼1657)가 나섰다. 이경여는 세종의 7대손으로 서인 측 관료였다. 이날 그는 여러 관리들과 함께 임금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효종이 물었다.

“당론(黨論, 각 당파가 서로 옳다고 내세우거나 지지하는 의견이나 논의)의 해가 요즈음 심해지는 듯하다. 조정이 바르게 된 뒤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법인데, 지금 이와 같으니 어떻게 구제해야 하겠는가?”

‘당론의 해’라는 것은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둘러싸고 양쪽 붕당세력이 싸운다는 뜻이었다. 즉 서인과 남인 세력이 서로 대립하여 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율곡의 문묘 종사와 관련한 당시 효종의 인식이었다. 율곡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는 것은 오직 서인들이며 그것은 나라 안의 많은 유생들이 함께 공감하는 ‘공론’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영의정 이경여는 여기에 이렇게 답하였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두 현신(賢臣)에 대해서 선묘조(宣廟朝) 임오·계미년 무렵에 한쪽 편 사람들이 그들에게 큰 허물이 있다고 배척했습니다. 그 뒤로, 그 문하생과 자손들은 기어코 종사(從祀)하려 하고 배척한 사람의 자손들은 한사코 깎아 내리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분당 현상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논의라 하더라도 한쪽에 치우치는 때가 어찌 없겠습니까? 오직 성상께서 그 언론을 살피시어 만약 쓸 만하면 당파 갈등을 염두에 두지 마시고 쓰는 것이 옳습니다. 더구나 공론(公論)의 경우는 역시 편당(즉 당파 싸움) 때문에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론은 어떤 분당 세력을 넘어서 모든 관료들, 선비들의 공통된 의견이지 어느 한쪽의 의견은 아니라는 것이다. 임금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 문제를 당파싸움으로 보지 말고, ‘언론을 살피시어 만약 쓸 만하면 당파 갈등을 염두에 두지 마시고 쓰는 것이 옳다’고 한 것이다. 문묘종사 문제를 서인과 남인의 당파 문제로 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견에 대해서 효종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에는 당파 싸움이 점점 더 정밀해져서 그 흔적을 없애고 하기때문에 임금이 위에서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오직 대신이 힘써 진정시키는 것이 좋겠다. 양현(兩賢, 율곡과 성혼)의 종사 문제도 부당한 점이 있다. 막중한 전례(典禮)를 경솔히 의논할 수 없는 만큼 의논이 정해지는 날을 서서히 기다렸어야 마땅한데, 마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들 배격하고 있다. 이런데도 종사를 허락한다면 이 풍조가 점차 자라날 것이니,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효종은 율곡과 성혼의 종사를 건의하는 것이 부당한 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왜 서인 쪽에서 좀 더 기다리지 않는가? 그리고 서인들이 상대방을 원수처럼 대하고 배격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풍조가 점차 더 자라날 것이기 때문에 종사를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문제의 본질보다는 이렇게 급하게 종사를 추진하는 것에 따른 부작용을 더 앞세운 것이다.
이러한 임금의 대답을 듣던 교리 홍처윤(洪處尹)이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날 종사를 청하는 영남 유생들의 소에 대해 성상께서 ‘까마귀가 자웅을 다투는 듯하다’고 비답을 내리셨으므로 이를 듣는 자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이는 오직 시비를 밝히려고 한 일일 뿐입니다. 시비가 위에서 밝혀지기만 한다면 아무리 당론이 있다 하더라도 나라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문묘종사 문제를 양비론으로 몰아 결정을 회피하고 있는 임금의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율곡과 성혼의 이기론에 대한 잘못된 비난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 임금이 ‘양쪽 다 나쁘다’고 한 것은 임금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었다. 임금은 이에 이렇게 변명했다.

“당론이 유생들의 개인적인 일로 그치는 것이라면 내가 왜 굳이 말하겠는가? 끝내는 국가의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명 뒤에 다른 이야기들이 임금과 고위 관료들 사이에 오갔다. 이렇게 면담이 끝나는가 했는데, 임금은 갑자기 같은 자리에 있던 승지 유경창(柳慶昌)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교리 홍처윤이 ‘아무리 당론이 있다 하더라도 국가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너무도 형편없다. 우선 추고하라.”

추고하라는 말은 관리의 죄나 허물을 소상히 조사하라는 뜻이다. 홍처윤의 비판이 내심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홍처윤은 아무리 한쪽 당파 사람들이 주장한다고 해도 시시비비를 정확히 가리면 그것이 국가에 무슨 해가 됩니까, 하고 따지듯이 말했는데, 효종은 그 점이 몹시도 불쾌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변명을 너무도 정확히 논파했기 때문에 임금의 권력으로 그것을 방어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율곡과 성혼의 종사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져 경상도 유생들 사이에서 찬성파와 반대파 간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처음에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하여 상소문을 올린 경상도 진사 유직은 성균관의 유생들에 의해서 두 현인(율곡과 성혼)을 근거없이 모합하였다는 죄목으로 성균관에서 유적(儒籍, 유학자 명부)을 삭제당했다.
이에 유직 등 문묘 종사 반대파는 같은 경상도에 근거를 둔 유생으로 자기들의 잘못된 점을 논박하는 상소문을 올린 경상도 유생 신석형을 지역 유생 조직에서 제외하고 축출해버렸다.
사헌부에서는 5월 20일자 임금의 허락에 근거하여 사건 조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중앙에서 지명한 감사가 현지에 가서 조사를 시작하자 경상도 유생들은 집단으로 과거시험을 거부했다. 이러한 일이 임금에 보고되고 효종실록에 기록된 것이 효종 1년 7월 1일자 기사이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에서 다시 공도회(公都會, 감사 등이 관내 유생에게 보이는 소과小科 초시初試)를 열고 제술 시험을 보였으나 도내의 유생들이 모두 시험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태학생(성균관 유생들)이, 본도(경상도) 유생 유직이 진소하여 현인(賢人, 율곡과 성혼)을 무함하였다는 이유로 이름을 유적(儒籍, 유생들의 학적목록)에서 삭제하자, 유직 등은 신석형(申碩亨)이 자기들의 의논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떼 지어 일어나 그를 축출하였다.
조정이 그런 폐습을 징계하려고 본도 감사 민응협(閔應協)에게 조사해서 다스리게 했는데, 그 무리들(유직 등 문묘종사 반대파 무리들)이 모두 분개하여, 시험날에 한 사람도 응시하지 않았다. 민응협이 그 일을 보고하자, 예조가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영남의 사습(士習)이 매우 아름답지 못하긴 하나 위엄으로 제압해서는 안 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여러 유생들을 잘 타일러 가능한 한 진정시키도록 하소서.’ 임금은 이러한 건의를 따랐다.”

5. 문묘종사 찬성파 유생들의 반박

5. 문묘종사 찬성파 유생들의 반박

 

유직 등의 상소문이 임금에게 전달된 뒤, 두 달 정도 조정은 문묘 종사와 관련하여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겉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5월 1일, 경상도의 진사(進士) 신석형(申碩亨) 등 40여명이 상소문을 올려 유직 등이 율곡과 성혼을 헐뜯는 상소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아, 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두 현신(賢臣)의 탄생지는 신들이 거주하는 곳과는 5백여 리나 떨어져 있고 세대 또한 오늘날과 거의 60여 년이나 차이가 납니다. 그러한 까닭에, 지금 세대에 그들의 전형(典刑)을 실제로 접할 길이 없고 보면, 오직 그들이 남긴 문집을 통해서 그들의 언행과 도덕을 살펴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안목을 갖춘 자가 없고 보면 그 학덕(學德)의 높고 낮음과 완전하고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본래 누구든지 감히 가볍게 논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선 유직(柳㮨)의 상소문 가운데 크게 문제되는 것을 거론하여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읽어보면 신석형 등 40여명은 모두 경상도 지역에서 사는 유생들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직도 경상도의 유생이었는데, 유직은 900여명이나 되는 유생들의 대표였고, 신석형은 40여명을 모아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그는 윗 글에 이어 이렇게 말했다.

“신들이 살피건대, 이이(李珥)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찾아가 만난 것은 무오년(1558, 명종 13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이이의 나이가 23세였는데, 이황이 즉시 문인(제자) 조목(趙穆)에게 글을 보내기를 ‘후생가외(後生可畏, 뒤의 난 사람은 두려워할 만하다)라고 했는데, 옛 성현이 나를 속이지 않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그 해에 이황이 이이에게 보낸 답서에 ‘나이가 늙고 기력이 약한데다 사방에서 벗을 취하여 스스로 도움이 되게 하지 못한 까닭에 늘 바라보고 기다리던 참에 두 장의 편지가 왔소. 이를 나의 약석(藥石, 잘못을 지적하고 주의를 주어서 그것을 고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말)으로 삼기에도 (내 자신이) 채 미치지 못할 형편인데, 도리어 이 귀머거리에게 얻어 들으려 하다니 어찌된 일이오?’”

여기에서 신석형은 율곡이 퇴계를 찾아가 만난 일을 소개하고, 퇴계가 율곡을 만나보고 ‘뒤에 난 사람은 두려워할 만하다’고 옛사람들이 말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는 것을 퇴계가 언급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서신 답장을 인용하였다. 퇴계가 율곡의 글을 읽고 그 글을 자신의 ‘약석’으로 삼기에도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데 또 무엇을 묻는 것이요,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약석(藥石)이란 도움되는 말이나 가르침을 말한다. 말하자면 퇴계는 율곡의 사람 됨됨이와 학문을 높게 평가하였다는 것이다. 이어서 상소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퇴계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인과 세대가 멀어 그 말씀이 인멸된 까닭에 이단(異端)이 진리를 어지럽힌 결과, 옛날의 총명하고 재주가 걸출한 인사들도 시종 미혹되었는데 이것이야 본래 논할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호(程顥)와 장횡거(張橫渠, 본명은 張載), 그리고 주희등 여러 선생까지도 거기에 약간은 드나들지 않을 수가 없게끔 되었다가 곧바로 그 잘못됨을 깨달았던 것이오. 아, 천하에 큰 용기와 큰 지혜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그 거센 물결을 벗어나 진리의 물줄기로 어떻게 되돌아 올 수 있겠소.
지난날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족하(足下, 편지에서 남을 높여 부르는 말)가 석씨(釋氏, 석가모니 즉 불교)의 글을 읽고 상당히 중독되었다고 하기에, 마음으로 애석하게 여긴 지 오래였소. 그런데 전일 나를 찾아왔을 때 그러한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잘못됨을 말하였고, 지금 두 편지의 취지를 보아도 또 이와 같으니, 족하는 더불어 함께 도에 나아갈 만한 사람임을 내가 알겠소. 다만 두려운 것은 새 맛이 붙기 전에 옛맛을 잊기 어렵다는 점과 오곡이 익기 전에 돌피가 먼저 익지 않을까 하는 점이오’.
또 퇴계가 말하기를 ‘나의 경우 처음도 그랬소만 늙어갈수록 더욱 덧없이 생애를 보내지 않을까 늘 두렵기만 한데, 훌륭한 군자를 바라는 마음이 배고프고 목마를 때보다 더하다오’라고 하였습니다.”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편지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당시 유학자로서는 원로에 속했던 퇴계가 이제 겨우 20대인 젊은 율곡에게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유직이 말한 것과는 달리 퇴계가 율곡을 얼마나 기특하게 생각하고, 또 기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유직의 말처럼 율곡이 불교에 빠져서 허황된 환상을 하고 있었으면 이러한 편지를 퇴계가 쓸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신석형은 “그런데 유직 등은 이 편지의 위아래를 잘라 버리고 ‘새 맛이 붙기 전에’ 이하의 네 구절만을 거론하여, 이황이 깊이 염려하고 통렬하게 경계한 말이라고 핑계를 대었습니다”라고 임금에게 호소를 하였다.
아울러 유직이 퇴계와 율곡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거짓말을 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그 뒤에 이황이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논한 이이에게 답서를 보내면서 ‘인설도(仁說圖)는 심학도(心學圖) 앞에 있어야 한다는 그 견해가 매우 뛰어나오. 내가 지난해 돌아와서야 그렇게 되어야 옳다는 것을 알았는데, 보내온 글을 받고 더욱 확신하게 되어 즉시 그대로 순서를 바꾸었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양현(兩賢)이 평소 학문을 하면서 계오(契悟, 납득)된 것이 이보다 클 수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직 등은 ‘털끝만큼도 계오된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유직 등의 상소문을 보면 퇴계는 율곡에 대해서 전혀 공감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묘사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유직 등 반대파 유생들이 사실을 왜곡한 것이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논박한 것이다. 또 율곡이 퇴계를 변호하여 선조 임금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호소한 사실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이황이 경오년(1570년, 선조 3년)에 죽었는데, 계유년(1573년, 선조 6년)에 여러 신하가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자, 위에서는 그의 행장(行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 없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이이가 아뢰기를 ‘이황은 일생 동안 의리의 학문(즉 성리학)에 침잠(沈潛)하였는데, 그의 논의와 풍모는 옛 명현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행장의 유무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죽은 현인에 대해서 그 행적이 이미 드러나 있는데도 존숭하고 기리는 일을 아끼시는데, 현재 (살아 있는) 선비들에 대해서 어떻게 현인을 좋아하는 성의를 가지실 수 있겠습니까? 이황의 시호가 한두 해 늦더라도 크게 해로울 것은 없지만, 온 나라의 선비들이 전하께서 현인을 좋아하는 성의를 갖고 있지 않다고 의심한다면, 그 해로움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 하였습니다.”

퇴계의 시호를 임금으로부터 받는 일에 율곡이 나선 일화를 소개한 것이다. 당시 선조 임금이 퇴계의 행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호를 내리지 않는 것을 율곡이 상소를 올려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퇴계를 변호한 일을 들어 유직의 상소문이 문제가 있음을 논박하였다.
그리고 신석형은 율곡이 퇴계의 문묘 종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임금에게 ‘교화를 밝히려면 반드시 선현을 높이고 추장(推奬, 추천과 장려)하여 후학이 모범으로 삼도록 해야 합니다. 예컨대 조광조(趙光祖)는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했고 이황은 이학(理學)에 침잠했으니, 먼저 종사(從祀)할 것을 윤허하시어 선비들의 소망을 진작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말하였음을 상기시켰다. 그런데도 유직 등은 ‘이황이 죽은 뒤에 이이가 모든 힘을 다하여 이황의 학문을 공격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들의 상소문은 근거가 없는 것이 구절마다 모두 왜곡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사칠논변을 둘러싼 논의에 대해서도 신석형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의 사칠논변(四七論辨)에 대해서 이이와 성혼이 함께 주자의 말을 가지고 토론한 바가 있었습니다. 성혼은 이황의 견해를 옳다고 하고 이이는 이황의 견해를 정견(正見, 올바른 견해) 중의 한 점의 티끌이라고 여겨 기대승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성혼에게 답서를 보내면서 기대승의 학문을 어찌 감히 퇴계와 견주겠는가? 기대승이 단지 약간의 재지(才知, 재능과 지식)가 있어 우연히 그것을 알게 된 것일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이는 본래 주자에 대해 이론을 세우지 않고 단지 이황의 견해에 대해서만 시비를 가렸습니다. …… 그런데 유직 등은 이이의 글 가운데 ‘어떻게 주자라고 하겠는가.(何以爲朱子)’ 등의 말을 인용하여 전현(前賢, 앞의 현인 즉 주자)을 헐뜯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자라고 하겠는가.(何以爲孔子)’라는 맹자의 말도 공자를 헐뜯은 말이라고 하겠습니까?”

퇴계와 고봉 기대승의 사칠논변은 퇴계가 먼저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 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퇴계의 ‘이기호발설’이다. 리도 발동할 수 있고, 기도 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고봉이 사단이나 칠정이 모두 같은 인간의 감정에 속한 것으로 여기에서 리와 기를 분리하여 논한 것은 잘못이라고 논박하였다. 율곡은 이것을 소개하면서 나중에 자신의 이기론을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즉 기가 발동하면 리는 거기에 편승하는 것이다라고 정리하였다.
신석형은 율곡의 이기론에 대해서는 정확히 소개하지는 않고 단지 유직 등이 ‘어떻게 주자라고 하겠는가.(何以爲朱子)’한 말에 대해서 논박하였다. 이 말은 율곡이 만약에 ‘주자가 리와 기는 각각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본다면 어떻게 주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식의 말은 맹자도 ‘어떻게 공자라고 하겠는가.(何以爲孔子)’라고 한 적이 있으며, 이는 단순히 자기 의견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수식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어서 신석형은 율곡의 이기론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유직 등은 알지 못할 이야기를 억지로 지어내어 외람되게도 자격을 심사하는 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들이 말한 ‘이기(理氣)는 일물(一物)이며 심(心)은 곧 기(氣)’라는 등의 말은 본래 이이의 문집에는 보이지도 않는데, 오늘날 그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말로 만들어 내어 후학을 속이고 상을 현혹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묘하게 (율곡의 사상을 왜곡) 하려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 후미진 곳은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나라 전체를 어떻게 속일 수 있겠으며, 알지 못하는 자야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아는 자를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유직 등이 ‘이기는 일물(一物)이며, 마음은 곧 기(氣)’라는 율곡의 문집에도 없는 말을 만들어내어 율곡의 이기론을 왜곡하였다는 것이다. 율곡의 이기론은 이기지묘(理氣之妙), 이통기국(理通氣發), 이승기발(理乘氣發) 등 상당히 복잡하고 깊이 있는 논의가 많다. 사실 유직 등은 그러한 이기론을 상세히 소개하지 않고, 단순화하여 그렇게 정리하여 상소문을 올린 것인데, 이에 대해 신석형이 반박한 것이다. 신석형은 율곡의 사상을 이렇게 단순화함으로써 율곡 사상을 왜곡하고 임금과 나라 전체를 속이려고 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신석형은 율곡의 이기론에 대해서는 유학자 장현광(張顯光, 1554년∼1637년)의 사례를 들어 다음과 같이 변호하였다.

“본도(本道, 경상도)의 고 판서 신(臣) 장현광은 근세의 대유(大儒)로서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어 사류(士類)의 추앙을 받은 지 오래입니다. 그가 지은 ‘경위지설(經緯之說)’은 이기(理氣)를 철저히 논하면서 종횡으로 무려 수천만 언을 논했는데, 모두 이황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이이와 부합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일찍이 후학들 중에서 그가 이황의 학문을 공격했다고 의심한 자는 아직 없었고 보면, 저 유직 등의 말이 과연 어느 곳의 사람에게서 받아 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이에 이르러 선현이 극도로 무고를 당했고 본도(경상도)의 이름이 헐값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성혼의 경우는 이기를 변론한 것이 실로 이황을 위주로 한 것이니, 이 또한 이황의 견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직 등이 이이의 학문과 동일하다고 말하면서 배척하니, 이는 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장현광(張顯光)은 경상도 구미 지역의 유학자로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한 인물이다. 그는 율곡의 ‘기발이승(氣發理乘, 기가 발하면 리는 거기에 탄다)’을 수용하여 이기(理氣) 일본설(一本說)을 주장하고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장현광에 대해서도 후학들은 이의를 제기한 바 없는데 유직 등은 무엇을 근거로 율곡이 퇴계의 학문을 공격하였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아울러 퇴계의 주장을 따른 성혼의 경우도 비판한 것을 보면 유직 등은 전혀 근거없이 두 선현(율곡과 성혼)을 무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석형은 율곡과 성혼에 대한 이러한 무고가 이전 임금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보고 그 유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처음에 이이가 승려였다고 헐뜯으면서 ‘사마시(司馬試) 때에 알성(謁聖)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계미년에 올린 송응개(宋應漑)의 질투 어린 상소문에서 나온 말입니다. 성혼을 처음으로 무함하여 ‘(성혼이 임진왜란 때 북쪽으로 피신하는) 임금을 버리고 선비를 해쳤다’고 한 것은 이홍로(李弘老)와 정인홍(鄭仁弘)이 거짓으로 지어내서 모함한 이야기였습니다.
송응개는 선조 대왕께서 이 때문에 친히 교서(敎書)를 지어 유배시켰습니다. 그리고 이홍로와 정인홍은 평소에 근거없이 무함한 사람이 성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끝내는 국가의 처벌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 선비의 신분으로서 …… 자꾸 헛소문이라도 퍼뜨리면 사실로 인정되더라는 과거의 일만 다행으로 여기고서, 또 오늘날 다수의 세력을 동원하여 (두 현인을) 매장시키려고 하니, 그 버릇이야말로 가증스러운 것으로서 이러한 풍조는 결코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글에서 신석형은 율곡을 비난한 송응개의 사례, 그리고 성혼을 모함한 이홍로와 정인홍의 사례를 들어 유직 등의 상소가 근거 없음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는 퇴계와 율곡, 그리고 성혼의 위상을 자기 나름의 판단으로 이렇게 표현하였다.

“대개 우리나라에서 퇴계 이황은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에 비유되고 율곡 이이와 성혼은 주희와 장식(張栻, 1133∼1180)에 비유됩니다. 후학이 주돈이와 정자는 받들면서 주희와 장식을 배척하는 것은 실로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시기하고 편벽된 풍조의 결과로 번번이 이황을 편들고 이이와 성혼을 배척하려고 합니다. 그 단서와 결말을 따져 물어보지도 않고 비슷하지도 않은 말을 억지로 만들면서 흉악하게 참소한 무리들의 후예에 같이 뒤섞이게 된다는 것을 돌아보지도 않으니, 아, 또한 괴이한 일입니다.”

이 구절은 상당히 유명한 말로, 신석형의 입장에서 퇴계와 율곡‧성혼을 평가한 것이다. 퇴계는 주자학의 기초를 놓은 주돈이와 정호‧정이 형제들과 같고, 율곡과 성혼은 남송의 유학자 주희와 장식에 유사하다고 하였다. 주돈이와 정씨 형제는 북송시대 사람으로 성리학의 기초가 되는 이론의 틀을 완성한 인물들이다. 주희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유학자고, 장식은 도학(道學)의 대가로 스승인 호굉(胡宏, 1105∼1161)의 학문을 이어받아 송대 호상학파(湖湘學派)를 이끌었다. 주희와 자주 논쟁을 벌여 사상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신석형의 상소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집에서 나누는 대화나 한가로운 이야기라도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믿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선현과 관계된 일로 한 지역을 대표하여 임금에게 고하면서 이렇듯 믿지 못할 근거 없는 말을 하다니, 정말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비록 한두 사람의 주장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도(道, 경상도) 전체 선비들을 규합시켜 아무도 다른 의견을 내놓지 못하게 하고 온통 그 와중에 휩쓸리게 한 것을 보면 영남 사림의 크나큰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도리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신들이 오늘날 말씀드리는 것이야말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너그럽게 살펴주십시요.”

이러한 긴 상소문에 대해서 효종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답변을 하였다.

“상소문을 보고 잘 알았다. 그대들이(신석형과 유직 등을 말함-필자) 서로 배척하여 끝없이 분란을 조성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까마귀의 자웅을 가리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임금은 신석형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상소문에 대해서, 그리고 신석형이 보기에는 유직 등이 올린 거짓과 왜곡 투성이의 상소문에 대해서, ‘모두 똑같다’라는 매정한 평가를 하였다. 이러한 임금의 판단은 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공평치 못한 것이었다.

4.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유생들의 반론

4.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유생들의 반론

 

다음해, 즉 효종 1년 2월 22일, 경상도 진사 유직(柳稷) 등 9백여명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전해 11월 성균관 유생들이 율곡의 문묘종사를 건의했을 때는 ‘수백명’ 규모였으나 이번에는 그 숫자가 더욱 늘었다.
유직(1602년; 선조 35년∼1662년; 현종 3년)은 1630년(인조 8년) 진사시에 합격한 인물로, 하급관리로 임명되거나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있었으나 그 길을 선택하지 않고 지방에서 역사서를 읽고 『중용』, 『대학』의 연구에 힘쓰고 있었다.
그는 영남지역에서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의견이 일어나자, 유생들을 모아 서울로 올라와 유생들 대표로 상소를 하였다.

“근래에 홍위(洪葳)와 이원상(李元相) 등이 여러 차례 소장(疏章)을 올려서 고(故) 문성공(文成公) 이이와 문간공(文簡公) 성혼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신들은 삼가 의혹스럽게 생각합니다. 아, 성묘(聖廟, 문묘)가 어떤 곳이며, 두 신하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대체로 두 신하를 문묘 종사의 반열에 청하는 것은 그들의 어짐을 가지고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실상을 논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시험 삼아 두 신하의 출처(出處)와 도덕(道德)이 어떠한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하나하나 옛날의 현인에 부끄러움이 없습니까? 두 신하가 살던 시대가 이토록 가까워 보고 듣는 바로 그들의 사람됨을 알 수 있으니, 현부(賢否, 현명한지 여부)와 시비(是非, 옳고 그른지)의 구분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유직 등은 이렇게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에 의문을 표하고 두 선현의 출처와 도덕을 조사해볼 것을 임금에게 제안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율곡과 성혼의 문제점을 나열하였다.

“요컨대 두 신하는 역시 한때 이름난 사람들이었으니 어찌 한두 가지 일컬을 만한 일이야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평생을 살펴보면 결점이 매우 많습니다. 사람을 논하는 법은 반드시 대절(大節,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이 우선입니다. 그것이 손상되었으면 나머지는 족히 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이가 천륜(天倫, 부자 형제간에 지켜야 할 도리)을 끊고서 불가(佛家)에 도망하여 숨은 것은 참으로 유학의 가르침에 죄를 얻은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그는 사마시에 뽑혔지만 성묘(聖廟, 문묘)에 배알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성혼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고서도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이 (북쪽으로) 피신하던 날 임금에게 달려오지 않은 것은 참으로 왕법에 용서받지 못할 바입니다. 이 일로 선묘(宣廟, 선조 임금)께서 내린 준엄한 하교(下敎, 가르침)가 어제의 일 같습니다.”

율곡에 대해서는 율곡이 젊어서 불교에 입문한 적이 있었다는 점을 들고, 성혼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의 피난 행차가 자기 집 가까이 왔음에도 찾아보지 않은 점을 들었다. 성혼의 일은 나중에 성혼을 모함하기 위해서 왕 주위의 신하들이 거짓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유직 등은 이를 들어 문묘 종사를 반대한 것이다. 유직 등 영남 유생들은 “어질면서 그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없으며, 의로우면서 그 임금을 소홀히 하는 자는 없습니다. 다른 일은 논할 것도 없이 이 한 가지만으로도 족히 두 신하에 대한 단안(斷案,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거)이 됩니다”라고 하여 이 두 가지가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율곡에 대해서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추가로 들었다.

“그 이외에도 (율곡이) 충현(忠賢)을 교묘하게 헐뜯고, 붕당을 그릇되게 비호하였으며, 걸핏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실무(實務)라고 하고 여론의 향방을 마음대로 조정하여 족히 위세를 드날렸지만 한 일과 말들은 한쪽으로 치우치고, 꼼꼼하지 못하고 엉성한 점을 면치 못하였으니, 대체로 그의 마음 중에 크게 의심스러운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겉으로 보이는 일면일 뿐입니다.”

이 정도라면 유직 등은 사실상 율곡의 거의 모든 점에서 이의를 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율곡이 충신을 헐뜯고, 2) 붕당을 비호했으며, 3) 여론을 왜곡하고, 4) 일과 말이 편파적이고, 5) 일 처리도 엉성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유생들은 율곡의 학문을 이렇게 정면으로 비판했다.

“학문의 폐단에 있어서는 이보다 더욱 큰 것이 있습니다. 이이(율곡)는 일찍이 이교(異敎, 즉 불교)를 섬겨서 그 구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엽등(躐等, 등급을 건너뛰어 올라감)하기를 좋아하여 진실한 길을 가지 못한 채 허황된 환상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유가(儒家)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면목(面目)을 바꾸어 그 설을 스스로 성취시켰습니다만,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도 일찍이 이를 깊이 염려하고 엄히 경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새 맛이 붙기 전에 옛맛을 잊기 어렵고, 오곡이 익기 전에 돌피가 먼저 익는다.’ 이러한 말씀은 참으로 그 뜻이 깊은 것입니다.”

율곡이 불교를 잊지 못하고, 그 논리를 따라서 단계적인 접근보다는 직관적인 깨달음을 중시하고 허황된 환상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 맛이 붙기 전에 옛맛을 잊기 어렵고, 오곡이 익기 전에 돌피가 먼저 익는다(新嗜靡甘, 熟處難忘, 五穀之實未熟, 稊稗之秋遽及)’(『퇴계집』 권16 답이숙헌答李叔獻)라는 이 말은 율곡의 편지에 퇴계가 답장을 하면서 건넨 말이었는데, 율곡의 어설픔을 비판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사실 퇴계는 율곡의 의욕과 솔직함을 높게 평가하면서 이러한 점을 경계하라고 격려하는 뜻으로 이 말을 한 것이었다.
경상도 유생들은 또 율곡의 사상에 대해서도 이렇게 비난하였다.

“이이의 학문은 오로지 기(氣)자만을 주장하여 기를 리(理)로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리와 기를 같은 것으로 여겨 서로 분별함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마음이 바로 기이고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모두 기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병통의 근본은 원래 도(道)와 기(器)를 구별하지 않은 육구연(陸九淵)의 견해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폐해는 작용(作用)을 본성(性)의 본체(體)라고 한 석씨(釋氏, 불교)의 주장과 같습니다. 대체로 리와 기의 분별은 바로 학문의 생사(生死)가 걸린 갈림길입니다.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정밀한 한계와, 유교와 이단(異端)의 다른 점과 옳고 그름이 모두 여기에서 판가름 되는 것입니다.”

율곡의 이기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유적 등이 ‘오로지 기(氣)자만을 주장하여 기를 리(理)로 알았습니다’라고 한 말은 완전히 정확한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율곡은 ‘이기지묘(理氣之妙)’, 즉 리와 기의 교묘한 결합을 주장하기는 하였으나 기를 중시한 것은 사실이었다.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즉 ‘기가 발동하면 리가 거기에 편승한다’는 주장은 율곡의 대표적인 이기론 사상이었다.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에서 생긴 것, 즉 기에서 발동한다고 본 것도 사실이다. 퇴계는 사단은 리에서 발동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동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서 율곡은 사단이건 칠정이건 기에서 발동하며, 리는 기에 편승하는 것뿐이라고 보았다. 유적 등은 율곡의 이기론이 육구연의 사상, 즉 심학 사상이나 불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그것을 비판했으나 이기론은 미묘하지만 왕권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하고도 관련된 것이었다. 이 문제는 다음으로 미루고 경상도 유생들의 주장을 더 살펴보기로 한다.

“이황은 도(道)의 본체(體)를 분명하게 보고, 인성에 대해 힘써 공부하여,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정이(程頤)로 전해져온 은미한 뜻의 근원을 추적하여, 주희가 이미 천명해 놓은 요점을 밝혀서 천명도(天命圖)와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를 지었습니다. 이를 통해 본체(體)와 작용(用), 드러남(顯)과 감추어짐(微)을 섬세하고도 극진하게 규명하였고, 사단과 칠정의 구분에 있어서도 더욱 그 묘를 다하여, 천고의 숨겨진 자물쇠를 열어 놓았습니다. 이는 백세 이후 성인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의혹됨이 없을 것입니다.”

이 문장을 살펴보면, 유적 등 유생들이 율곡을 비판하면서 퇴계 이황을 올바른 사상을 가진 유학자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유적 등이 퇴계의 사상을 중시하고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는 남인측 유생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율곡과 퇴계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상세히 진술하였다.

“이이(율곡)는 평소 이러한 점을 털끝만큼도 깨달음이 없이 흐리멍덩하게 묵은 학문에 떨어져 있다가 이황(퇴계)이 죽은 뒤에 이황의 학을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였습니다. 그(율곡)의 학설이 모두 그의 문집에 있으나 종횡으로 잘못된 것들을 모두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이황의 말을 지적하여 리(理)를 해친 것이라 하는가 하면 이황의 말은 본성(性)을 모른 것이라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주자가 참으로 리와 기가 호발(互發, 서로 발동함)하여 각기 상대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다면 주자도 잘못한 것이니 어찌 주자라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렇게 편견과 착각으로 감히 전현(前賢, 앞선 현인)을 이토록 헐뜯을 수가 있습니까? 삼가 주자의 설을 살펴보면 리(理)가 있은 연후에 기(氣)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리와 기는 결단코 둘이며 ‘사단(四端)은 리에서 발동(發)하고, 칠정(七情)은 기에서 발동(發)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리와 기가 호발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자의 정론(定論)이 이토록 명백한데도 오히려 믿지 않았습니다. 이황의 학은 바로 주자의 학이었으니 이이에게서 배척을 당한 것은 당연합니다.”

유직 등은 율곡이 퇴계 사후에 퇴계를 공격하였으며, 그의 학설에 잘못이 많다고 지적하고 퇴계가 이기 호발을 주장하였고, 또 사단은 리가 발동한 것이며, 칠정은 기가 발동한 것이라고 주장한 사실을 임금에게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리고 퇴계는 주자를 정확히 따른 것이고, 율곡은 주자를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다. 율곡의 사상이 주자를 배척하였다는 것은, 서인측 유학자들이 볼 때 분명히 율곡사상을 오해한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경상도 유생들의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거짓이고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율곡의 사상이 리보다는 기를 앞세운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리를 배제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이러한 이기론은 미묘하게도 왕권을 어떻게 보느냐 하고도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왕은 무슨 일을 할때나 등 뒤에 <일월오봉도>를 놓는다.

임금의 권위를 나타내는 일월오봉도

<일월오봉도>는 임금의 권위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보통 병풍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병풍은 임금이 그 앞에 자리를 함으로써 비로소 그림의 의미가 완성된다. 즉 일월은 음과 양을 나타내고, 오봉, 즉 다섯 봉우리는 오행이다. 그리고 임금의 자리는 이러한 것들을 통합하고 거느리는 태극의 자리다. 임금은 바로 태극이라는 것이다. 임금이 임금으로서 공적인 일을 할 때 반드시 이 병풍을 뒤에 놓는 것은 우주 만물의 중심인 태극으로서, 그리고 삼라만상의 생성과 변화를 주관하고 상징하는 태극으로서의 임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임금의 활동은 우주의 가장 큰 원리 즉 태극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태극은 또 ‘리(理, 원리 혹은 이치)’로 표현된다. 반면에 음양과 오행 등 물질적인 것들은 기이다. 따라서 임금은 리이며, 임금 이외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기라고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임금은 리, 신하들은 ‘기’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기론은 바로 이러한 내면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경상도 유생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에서 이기론을 이렇게 논하는 것은 그 이면에 상징으로서 리와 기의 문제가 있기때문에 사실은 매우 미묘한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주자의 설을 빌려서 ‘리(理)가 있은 연후에 기(氣)가 있다’고 하는 말은 ‘임금이 있은 연후에 신하들이 있다’는 말로 바꿔 이해할 수 있으며, 퇴계의 말을 빌려서 ‘사단(四端)은 리에서 발동(發)하고, 칠정(七情)은 기에서 발동(發)한 것이다’고 하는 말은 ‘사단과 같이 순수하고 도덕적인 마음은 임금에게서 나오고, 칠정과 같이 순수하지 못한 마음은 신하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기호발(理氣互發)’이라는 말은 임금도 발동할 수 있고, 신하들도 발동할 수 있다, 즉 임금도 정치적인 활동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할 수 있고, 신하들도 그럴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율곡은 ‘이기호발’을 부정하고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신하가 발동하면(활동을 하면), 임금은 거기에 편승한다’고 해석될 수 있으며, 심하게는 임금은 단지 신하들의 활동에 의지해서 움직이는 존재일 뿐이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이러한 미묘한 문제를 경상도의 퇴계학파 유생들이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성혼의 학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주장했다.

“성혼(成渾)의 학은 대체로 이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른바 ‘리와 기는 같이 발한다’는 등의 말은 필경 큰 근본에 깨달은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학문을 논하는 상소에 애초 궁리(窮理)나 격물(格物)에 관한 일을 강구하여 밝힌 것은 없고, 다만 정신을 보존하고 아껴야 한다는 말로 제일의 법문(法門)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바로 도가(道家)의 유파에 해당되는 것으로 ‘자사자리(自私自利, 자기 이익만 챙기는, 즉 매우 이기적인)’의 설이니, 우리 유가에서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이는 본래 한쪽으로 치우친 학술을 수용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재기와 역량이 이이의 수준에 비해 높지 않기 때문에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혼의 학문에 대해서는 그가 도가의 영향을 받아 이기적이며, 학문 수준이 율곡에 못미친다는 정도로 그치고 더 상세한 논의는 하지 않았다. 이어서 유직 등은 율곡와 성혼의 문묘 배향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했다.

“두 신하의 행적을 상고해 보면 천륜을 어겨 풍교(風敎, 풍속과 가르침)를 손상시키고, 도(道)를 문란하게 하여 성인의 법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성묘(聖廟)에 배향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습니까? 이는 사체(事體, 일이 벌어진 상태)가 중대한 것으로, 일시적으로만 받드는 것이 아니라 백세토록 우러러 받들게 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천하에 지극히 합당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어찌 그 사람됨을 논하여 실상을 따지지 않고서 당파를 비호하고 억지로 끌어대어 합당하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못한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지적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경상도 지역의 퇴계학파 유생들과 한양에 있는 율곡 및 성혼의 제자들의, 서로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당시 조정을 담당하고 있는 양대 세력인 서인과 남인의 싸움이다. 유직 등은 계속해서 이렇게 덧붙였다.

“지난 을해 연간(1635년, 인조 13년)에 송시형(宋時瑩) 등이 처음에 이런 요청(율곡의 문묘 종사 건의)을 했었습니다. 성학(聖學)이 고명하신 인조 대왕께서는 이를 의연히 물리쳐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습니다. 성인(聖人, 인조)이 하신 일이 일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데서 나왔으므로 참으로 영원히 바꿀 수 없는 법이라 할 것입니다.
당시의 비답(批答, 임금이 답변)이 간곡할 뿐 아니라 통쾌하여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칭송되고 있어 (저희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동되고 격앙됩니다. 아, 인심의 향배와 사습(士習, 선비들의 풍속)의 사정(邪正, 옳고 그름)이 모두 그 시초에 달렸습니다. 숭장(崇奬, 숭상하고 장려)하는 일이 한번 잘못되어, 추종하여 휩쓸리거나 등을 돌려 방황해서 다시 바르게 되지 못하면, 장차 위로는 선성(先聖, 앞선 임금)을 욕되게 하고 아래로는 후학을 그르쳐 우리 도(道)의 연원이 종식되게 될 것입니다.”

인조 임금 때 송시형 등이 건의한 문묘 종사 건의를 임금이 거부한 사례를 들고, 문묘 종사를 결정하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는 자들은 예전에 인조 임금이 내린 훈시는 무시하고 자신들의 의견은 정론으로 삼고, 이에 반대하는 의견은 잘못된 여론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이제 이 논의를 주장하는 자는 일체 자기가 좋아하는 바에 아부하여 성고(聖考, 돌아가신 임금)의 큰 훈시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또 백세의 공의(公議)를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는가 하면 유림의 정론(正論)을 사론(邪論)으로 지적하고 온 나라가 분리된 것을 귀일(歸一)되었다고 지목하면서 중대하기 그지없는 법을 힘으로 도모할 수 있다고 하며 서로 견강부회(牽强附會, 근거도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대어 자기에게 유리하게 맞춤)하며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워서 감히 아무 말도 못하고 위세만 점차로 더해가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신들은 오늘날 이 일이 시의(時議)에 용납되지 못할 줄을 알지만, 인심은 속이기 어렵고 천리는 지극히 공정하니, 격발한 중론(衆論)을 전하에게 아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의리의 바름을 깊이 생각하시어 참람하고 망령된 요청을 통렬히 물리쳐 주십시요.”

이러한 유생들의 상소에 효종은 “상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고 답하였다.

얼마 뒤, 한양의 성균관에서는 이러한 상소문을 올린 유직의 이름을 유적(儒籍, 유학자들의 명부)에서 삭제하였다. 그리고 부황(付黃)의 벌까지 내렸다. 부황의 벌이란, 성균관 유생들이 관리들의 비행을 규탄할 때에 노란색 종이에 그 관리의 이름을 써서 붙이던 일을 말한다. 혹은 성균관 유생들이 내부 규정을 위반한 경우에 그 사람의 이름에 노란색 종이를 붙이는 벌을 뜻한다. 이러한 벌을 받으면, 직책이 비록 정승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감히 조정에 서지 못하였는데, 이는 사론(士論, 선비의 여론)을 중시하고 사기(士氣, 선비의 기개)를 배양하기 위한 것이었다.(『효종실록』 6년 10월 24일) 이러한 부황의 벌은, 비리를 범한 관료나 유생에 대해 표시를 하여 이들의 등용을 막아, 부정과 비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후기 이후에 이 벌은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는 유적의 삭제보다 중벌로 인식되었으며, 일단 이런 벌을 받으면 사류(선비들 무리)에도 낄 수 없었다.
유직은 이일이 있던 이후에, 자기 집에 ‘백졸암(百拙庵)’이라는 편액(扁額)을 걸고, 문을 닫아 세상일에 뜻을 버렸다. 그는 나중에 성균관에서 ‘부황’의 벌을 해제해줄 것을 상소하였으며, 처벌을 해제 받았다. 그러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3.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 건의

3.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 건의

 

효종은 소현세자의 동생으로 원래는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었다. 왕세자인 소현세자가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여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것도 소현세자의 아들, 즉 원손이 있었음에도, ‘임금은 나이가 있어야 한다’는 인조의 강력한 주장으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조정의 많은 신하들, 특히 서인 관리들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가 되는 것을 반대했었다. 세자가 되는 것은 바로 차기 임금이 되는 것을 뜻했다.
효종은 봉림대군 시절, 서인에 속했던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약 1년간 유학을 배운 적이 있었다. 1635년, 당시 29살이었던 송시열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 주변에 이름이 알려져 봉림대군의 사부(師傅, 세자시강원에서 교육을 맡은 관리)로 임명되어 그에게 글을 가르쳤다.
송시열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송준길(宋浚吉, 1606년∼1672년) 역시 효종이 즉위하자 곧바로 발탁되어 조정의 주요 인사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송준길은 김장생과 그 아들인 김집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1624년(인조 3년)에 진사가 되어 세마(洗馬, 세자익위사에 두었던 정9품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는 관직을 사양하였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소현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자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왕위 계승권이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다가 인조의 미움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하면서 스승 김집의 천거로 새 조정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효종이 집권하자 율곡과 성혼을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하였던 서인들은 두 스승의 문묘 종사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효종의 스승이 바로 서인의 지도자급인 송시열이었고, 같은 서인 송준길도 효종을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으며, 임금 주위의 고위직에 서인 관료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인 유학자들은 효종 즉위 직후부터 율곡과 성혼에 대한 문묘 종사 건의를 담은 상소문을 조정에 올리기 시작했다.

효종 즉위년 즉 1649년 11월 23일(음력), 태학생(太學生), 즉 성균관의 유생인 홍위(洪葳) 등 수백명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와 관련하여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그들은 먼저 다음과 같이 우리나라의 문묘 배향과 관련된 사실을 설명했다.

“우리 나라가 처음에는 비루하다고 불렸는데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이 비로소 문자(文字)를 알았고, 우리의 도(道, 즉 유학의 도)가 동쪽으로 오기에 미쳐서 안향(安珦)·정몽주(鄭夢周)가 일어나 크게 사문(斯文, 유학)을 천명(闡明)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우리나라 학궁(學宮, 즉 문묘)에서 향사(배향하고 모심)함은 원래 마땅합니다. 그리고 본조의 다섯 현인(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에 이르러서는 그 학문의 깊이와 실천의 바름이 이전 왕조의 여러 유학자들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모두 묘향(廟享, 문묘 배향)에 들었으니, 이 어찌 일대의 성전(盛典, 성대한 의식)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효종 시대 이전까지 문묘에 배향된 유학자들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고 다음과 같이 율곡과 성혼에 대한 문묘 종사를 건의하였다.

“다섯 현인 이후에는 또 선정신(先正臣, 앞 시대의 고명한 신하)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른 나이부터 변함없이 성현의 도를 사모해 경전의 뜻에 침잠(沈潛)해 초연히 얻은 바가 있었습니다. 이이는 조정에서 벼슬하여 세도(世道,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자기 임무로 삼았으며, 성혼은 시골에 물러가서 덕(德)을 기르고 도(道)를 닦았습니다.”

율곡과 성혼을 함께 언급하며 문묘 종사를 건의한 것은 인조 시대 때부터의 일종의 전통이 되어있었다. 두 유학자의 제자들이 함께 힘을 합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또 각각의 제자들이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두 분을 함께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는 동료의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홍위 등의 상소문은 율곡과 성혼의 학문과 인물 됨됨이에 대한 소개로 이어졌다.

“대개 이이의 학문은 고명(高明)하고 투철(透徹)해서 도체(道體, 도의 본체)를 통찰했기 때문에 그의 동정과 안팎이 명백하고, 정대(正大, 바르고 당당함)하여 저절로 뛰어났습니다. 그가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겨 은택을 이르게 할 뜻이 푸른 하늘에 뜬 태양과 같았음은 세상 누구나 모두 알았습니다. 그는 선조(宣祖) 임금의 인정을 받아 위임함이 극도로 융숭하여 장차 큰일을 해보려고 했는데, 불행히도 세상을 하직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어찌 천고의 한이 아니겠습니까?
한편, 성혼은 단정하고 엄숙하여 굳게 지키고 힘써 행하였으며 그 마음가짐과 일 처리를 한결같이 성현을 법으로 삼았습니다. 집에 있으면서 반드시 실질적인 학문을 하여 맺힌 데가 없으므로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였으니, 옛날에 이른바 사도(師道)가 존엄한 자라고 한 말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만년에 인정을 받아 조정에 나와 임금께 자신의 의견을 진술하였는데, 모두 당세의 간절한 일들로 임금을 걱정하고 백성을 근심한 그의 성심이 간절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우같은 소인배들의 참소로 임금의 총애가 끝을 맺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불행하단 말입니까?”

이와같이 율곡과 성혼이 조정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였으나 율곡은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고, 성혼은 소인배들의 참소를 받아 크게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상소문은 이어서 율곡과 성혼의 ‘(학문적) 조예의 깊이와 행실의 바름이 모두 옛날 현인에게 부끄럽지 않아서 백대의 사표(師表)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문묘 종사를 건의하였다.

“신들은 삼가 생각건대, 두 신하의 도덕은 마땅히 백세(百世, 오랜 세월)의 모범이 되는데, 지금까지 성전(盛典, 문묘종사의 성대한 의례)을 거행하지 않아 아직껏 존사(尊祀, 귀하게 여기고 제사를 지냄)하는 반열에 들지 못하고 있으니, 사림(유학자들)의 수치와 성조(聖朝, 성스러운 조정)의 흠결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신들이 일찍이 이로써 선조(先朝)에 아뢰었는데 병자년과 정축년의 난리를 만나 중지되었고, 이어서 일이 많아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는 실로 신들의 죄이며, 혹은 하늘의 뜻이 기다리는 것이 있어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새로 교화하여 분발하고 유학자들을 존숭하고 도를 중히 여기는 날을 맞이하여 우리 유학의 빠진 전례(典禮, 즉 문묘종사의 의례)를 추진하는 것을 마땅히 먼저 해야 합니다. 공론(公論)이 한번 일어나자 많은 선비들이 향응(響應)해 모의를 하지 않아도 의견이 같습니다. 신들은 삼가 덕을 좋아하는 정성을 다하여 어진이를 높이는 분부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임금)께서는 깊이 두 신하(율곡과 성혼)의 성대한 도덕이 일찍이 종사(從祀)한 제현(諸賢, 여러 현인들)만 못하지 않음을 살피셔서 빨리 신들의 구구하고 간절한 청을 허락하여 많은 선비들의 귀의(歸依)할 바가 있게 하소서.”

효종은 이러한 건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변을 내렸다.

“성묘(聖廟,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막중하고 막대한 전례(典禮)여서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울 듯싶다.”

이러한 답변을 받고 성균관의 유생들은 그 뒤에도 여러 번의 상소문을 지속적으로 올렸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다름이 없었다.

2. 『효종실록』

2. 『효종실록』

 

율곡 이이(李珥, 1536년∼1584년)가 마지막으로 모신 왕은 선조(宣祖, 1552년∼1608년)이다. 조선의 왕은 선조 이후에 광해군 → 인조 → 효종 → 현종으로 이어진다. 효종시기는 율곡이 사망한 뒤 65년이나 지난 뒤이다. 그 사이에 한반도는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전화에 휩쓸렸다. 남쪽에서는 일본이 침략하여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과 정유재란(1597년, 선조 30년)이 일어났고, 북쪽에서는 청나라가 침입하여 정묘호란(1627년, 인조 5년)과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년)이 일어났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만 조정에서 율곡에 관한 관심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 『인조실록』을 보면 율곡과 관련된 기사가 63건 정도였다. 그런데 인조 시대와 통치기간이 비슷한 효종‧현종 시대의 율곡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이 90건에 이른다.(‘이이李珥’로 검색한 결과임)

『효종실록』 : 32건
『현종실록』 : 57건
『현종개수실록』 : 96건

『현종실록』을 다시 쓴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은 96건이나 된다. 참고로 퇴계 이황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효종실록』 : 22건
『현종실록』 : 19건
『현종개수실록』 : 34건

현종 시대만 하더라도 퇴계는 이미 문묘에 배향된, 즉 문묘 종사된 위대한 유학자로 평가되었고, 율곡은 그런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 문묘(文廟) 종사(從祀)란 문선왕(文宣王)이라 불리는 공자의 사당(문묘)에 이름을 올리고 배향되는 것을 말한다. 성리학의 실천과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유학자만이 이런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율곡은 왜 퇴계보다 더 자주 조정에서 언급되었을까? 달리 말하자면 왜 더 많이 기억되고 있었을까? 혹시 율곡의 사상이 새로운 시대에 더 적합해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율곡의 문묘 종사를 절실히 원했던 율곡의 추종세력, 즉 서인 세력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었을까? 『효종실록』에 실린 율곡 관련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효종실록』은 효종이 사망한 다음 해인 1660년(현종 1년) 5월에 시작하여 다음 해 2월에 완성하였다. 현종 초기에는 송시열, 송준길 등이 조정에서 힘이 있었기 때문에 『효종실록』에는 이들 서인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참고로 『현종실록』은 숙종 1년(1675년)부터 3년(1677년) 사이에 편찬되었다. 이때는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을 때였다. 송시열은 1674년경에 제2차 예송논쟁의 결과로 남인들의 공격을 받아서 권력을 잃고, 함경남도, 경상도 등지로 유배를 당하였다. 그런데 1680년(숙종 6년)에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정권을 다시 잡은 서인들은 이미 편찬된 『현종실록』의 내용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숙종 6년에서 9년 사이에 다시 『현종실록』을 새롭게 편찬했는데, 이것이 『현종개수실록』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현종실록』은 남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현종개수실록』은 서인의 입장에서 편찬된 실록이라고 할 수 있다.

『효종실록』의 기록 가운데 율곡 이이(李珥)가 언급된 기사는 모두 32건이 있다. 이중에 효종 즉위년(1649년)과 효종 1년(1650년)에 실린 기사를 살펴보면 13건으로 거의 1/2에 육박한다. 그 기사들을 연도별, 일자별(음력)로 간략한 내용을 함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효종 즉위년(1649) 11월 16일(음력, 이하 모두 음력임): 송준길이 상소하였다
2) 효종 즉위년(1649) 11월 23일: 이이와 성혼의 성전을 태학생들이 건의함
3) 효종 1년(1650) 2월 22일: 경상도 유생들이 이이 등의 문묘 종사를 반대함
4) 효종 1년(1650) 5월 1일: 이이 등 유학자를 헐뜯은 상소가 부당하다는 상소
5) 효종 1년(1650) 5월 20일: 유생들이 서로 배척하는 것에 대해 죄를 주다
6) 효종 1년(1650) 6월 3일: 영의정 이경여가 당파의 폐해 등을 아뢰다
7) 효종 1년(1650) 7월 1일: 경상도에서 과거를 아무도 응시하지 않았다
8) 효종 1년(1650) 7월 3일: 태학생들이 유직에게 벌을 내린 것을 논의하다
9) 효종 1년(1650) 7월 22일: 우의정 조익이 이황·이이·성혼 등의 덕을 아뢰다
10) 효종 1년(1650) 7월 23일: 사직 조복양의 관리임용·효행장려 등 내용의 상소
11) 효종 1년(1650) 7월 24일: 우의정 조익이 상소 문제로 면직을 청하다
12) 효종 1년(1650) 9월 15일: 함경도 유생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함
13) 효종 1년(1650) 9월 16일: 좌의정 조익이 북방과 영남의 유생들에 대해 아룀

효종 1년까지 기록된 기사를 보면 모두 13건인데 이 중 거의 대부분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 관련 기록이다.
문묘 종사란 공자를 모시는 사당, 즉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말한다. 문묘는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르는데, 위패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사당(祠堂)을 뜻한다. 현재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문묘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4성(四聖, 안자·증자·자사·맹자)을 배향하고, 공문(孔門, 공자 제자) 10철(哲) 및 송나라 6현(賢)과 우리나라의 유학자, 즉 신라·고려·조선 시대의 동방 18현을 모시고 있다.
효종 당시는 조선의 유학자로 이미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5현이 선정되어 종사되고 있었다. 율곡과 성혼은 아직 배향 인물에 들어가지 못했었다.
문묘 종사의 기준은 공자의 도, 즉 유학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얼마만큼 공헌했는지, 그리고 송나라에서 일어난 도학(道學, 즉 성리학)의 실천과 발전에 어떠한 공을 세웠는지가 중요했다. 아울러 독창적인 자신의 학문 세계를 구축하였는지, 유학자나 선비로서 양심과 도덕을 실천했는지, 학식과 덕망은 훌륭한지, 학자로서 후세에 존경을 받고, 학문적 업적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크고 높은지 등등 다양한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긍정적인 평가가 중요했다.
일본 학자 야마우치 고우이치(山内弘一)는 문묘종사의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숙종실록』에 덧붙여진 사관의 글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묘 종사는 국왕에게는 성대한 의식과도 같은 것이지만, 종사되는 유학자 자신에게는 도덕성이 그것 때문에 증감되는 것이 아니다.’ 문묘 종사는 국왕이 ‘유학을 높이고 그 도를 중시하고, 문치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며 나아가 ‘유도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문치를 더욱 널리 표방하는 일’이다. 즉 유교에 근거한 문치정치 그리고 왕도정치를 표방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의식인 것이다. 하지만 문묘 종사라고 하는, 유학자에 대한 최고의 평가는 종사가 결정된 시대의 가치관에 기초한 평가이지, 그 당사자(배향되는 유학자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단지 역사적인 평가일 따름이다.”(「율곡사상의 평가와 그 역사성에 대해서」, 2006년 <율곡과 실학사상> 국제학술회의)

이러한 말을 언뜻 들으면 문묘종사가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효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문묘 종사의 문제를 그렇게 간단히 평가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효종은 이 문제를 다루면서 국가의 멸망까지 생각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학자, 관리들이 자신의 명예와 목숨까지도 걸고 이 문제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문묘종사, 그리고 율곡 관련된 효종 즉위년의 기록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율곡을 기억하다 : 효종시대의 율곡 이야기

율곡을 기억하다 : 효종시대의 율곡 이야기

 

1. 효종의 시대

효종(孝宗, 1619년∼1659년)은 재위 기간이 1649년부터 1659년까지다. 약 10년을 왕위에 있었다. 이때는 청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여 명나라를 정복하고 중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명나라는 1644년에 멸망하였다.
참고로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顯宗, 1641년∼1674년)은 1659년부터 1674년까지 임금의 자리에 있었다. 두 임금이 재임한 시기는 약 25년에 이른다. 26년에 이른 인조의 통치기간과 비슷하다. 효종 이전에 왕위에 있었던 인조는 1623년부터 1649년까지 통치했었다.

효종은 병자호란(1636∼1637)이 일어난 뒤, 인조의 장남이자 자신의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심양에서 약 8년 동안 볼모로 붙잡혀 지낸 적이 있었다. 당시 봉림대군으로 불렸던 그는 병자호란 직후 50만명이 넘는 백성들이 청나라 여진족에게 끌려갈 때, 친형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잡혀갔다.
왕세자였던 소현세자는 1645년 귀국을 했지만 2달 뒤 사망하고 뒤이어 봉림대군이 귀국하였다. 1649년 인조가 사망하자, 둘째 아들이었던 그는 조선의 제1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이 임금이 효종이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발달된 과학문물과 서양 서적을 들여왔으나 이 때문에 인조의 눈밖에 벗어나 비판을 받았다.
효종의 아버지 인조는 1623년에 서인 세력의 도움을 받아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왕위에 올랐다. 이 사건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1623년 4월 11일, 즉 음력으로 3월 12일에 일어난 일이다.
인조는 반정 직후 서인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재야에 있던 서인의 산림세력 예를 들면 김집(金集, 1574년∼1656년)이나 송준길(宋浚吉, 1606년∼1672년) 송시열(宋時烈, 1607년∼1689년) 등을 조정에 불러, 정권에 참여시켰다. 서인과 대립하였던 일부 남인 세력도 고위 관리에 임명시켜 당파의 균형을 맞추어 통치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어느 쪽 할 것 없이 모두 유학자들, 즉 중국의 송나라나 명나라의 문물을 추종하는 지식인들이었고 오랑캐의 나라인 여진족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청나라의 과학기술이나 청나라가 받아들인 서양인의 종교인 기독교는 조선의 질서를 뿌리채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다. 설사 인조가 소현세자의 개방적인 태도를 수용하였다 하더라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유학자들과 관료들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광해군이 왕위에서 끌려 내려오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인조로서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것은 유교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었고, 유학자들의 반발을 부를 일은 아예 처음부터 싹을 잘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소현세자의 아이들과 세자빈 강씨도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은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효종은 1649년 왕위에 즉위한 뒤 사림 정치의 이상을 표방하고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추진하였다. 천하를 정복한 청나라의 국력을 인정하고 그들의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던 소현세자와는 분명히 다른 입장이었다. 효종은 나중에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권시(權諰) 등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들은 충청도 지역의 재야에서 활동하던 서인 학자들로 이후 ‘산당(山黨)’이라 불렸다. 이들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자 기존에 조정에서 권력을 휘두르던 서인 훈구세력, 즉 김자점(金自點, 1588년∼1651년), 원두표(元斗杓, 1593년∼1664년), 이행진(李行進)과 이시해(李時楷) 등 반정공신들을 제압하고 청나라에 호의적인 친청파 관료들을 제거하였다.
하지만 산당 세력은 적극적인 북벌을 추진하기보다는 군주의 수기(修己, 수양)를 중시하고,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만 계속하여 조정에서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또 계속되는 청나라의 견제로 결국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효종 5년까지 기존의 서인 관료들을 중심으로 ‘부국강병론(富國强兵論)’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이 펼쳐져 대동법과 노비 종모법(奴婢從母法) 등이 실시되었다.

효종 4년, 1653년에는 네덜란드인 하멜(Hendrik Hamel, 1630년∼1692년)과 20여명에 이르는 그 동료들이 해상에서 표류하다 제주도에 착륙하였다.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 겸 선원이었다. 하멜 일행은 일본의 나가사키를 향해 항해를 하다가 제주도 인근 해역에서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좌초한 것이다. 이보다 25년 전, 즉 인조 6년인 1628년에도 네덜란드인 박연(Jan Jansz Weltevree) 일행이 제주도 표류한 적이 있었다.
하멜 일행은 1666년까지 약 13년간 조선에서 생활하다 그 일부가 탈출에 성공하여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가 이들의 조선 체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멜도 이때 탈출하여 조선에서의 경험을 글로 남길 수 있었다. 일본으로 도망간 하멜 일행은 거기에서 약 1년간 체류하면서 서양문물에 대한 많은 정보와 지식을 일본에 전해주었다.
하멜이 조선에 표류하여 들어왔을 때 박연은 이미 조선의 생활에 적응하고 귀화하여 훈련도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박연은 하멜과 조선 관리들의 대화를 통역해주고 하멜 일행이 조선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임진왜란)과 명나라의 멸망, 청나라의 중국 점령과 서양인들의 동양 진출, 그리고 서양 기독교의 전래와 박연이나 하멜과 같은 서양인들을 실은 배가 지속적으로 한반도 주변에 나타나는 것은 이 세상이 지금 어떤 알 수 없는 변화에 휩쓸리고 있다는 분명한 징표였다.

1654년(효종 5년)과 1658년(효종 9년)에 효종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만주지역에 러시아 정벌군을 보내기도 하였다. 1651년경에 러시아인들은 흑룡강(黑龍江) 주변에 성을 쌓고 모피를 수집하거나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그곳 거주민들과 분쟁을 일으키고 청나라 군사와도 충돌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 그들은 송화강 방면으로 진출하였는데, 청나라 군대는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에 자주 패배하였다. 이에 청나라에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조총군 100명과 기수 등 50여명을 청나라에 보내 청나라 측과 합류하여 공동 작전을 전개하였다. 조선과 청나라 연합군은 흑룡강 부근에서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여 7일만에 모두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제1차 러시아 정벌(羅禪征伐, 나선정벌)이다.
그 뒤에도 러시아군은 흑룡강 방면에서 계속 활동을 하고 청나라 군대와 자주 충돌하였는데 청나라는 그들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1658년 3월에 또 청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총군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조총군 200명과 기수, 고수 등 60여명을 파견하여 러시아군 정벌에 나섰다. 조선의 군사들은 5월에 영고탑으로 가서 청나라 군대와 합류한 뒤, 흑룡강으로 갔다. 6월에 송화강과 흑룡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러시아 군대를 만나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 측은 큰 배 10여척에 군사를 싣고 공격해오고 동시에 육상에서도 공격을 해왔다. 청나라 군사는 이에 잘 대응하지 못하였으나, 조선의 병사들은 용감하게 나가서 불을 붙인 화살로 적선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 전투로 러시아 군대의 주력을 거의 섬멸시키고, 송화강 방면에 잠시 머무르다가 그해 가을 영고탑을 거쳐 개선하였다. 이것이 제2차 러시아 정벌이다. 효종은 내심 북벌에 뜻을 두고 있었는데, 이러한 두 차례의 원정과 승리로 효종은 내심으로 청나라 정벌에 더욱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