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회(姜寅會,1807-1880)


강인회(姜寅會,1807-1880)                                  PDF Download

 

1807(순조 7)~1880(고종 17).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는 태화(太和), 호는 춘파(春坡)로 1807년 정묘 12월 27일에 고창군 대산면 장동리에서 아버지 예당공(禮堂公) 강재형(姜在衡)과 어머니 함풍 이씨(咸豊李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강인회는 어려서부터 용모와 재질이 뛰어났으며 타고난 성품이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5세에 모친을 여의고 슬퍼하기를 어른처럼 하여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7세 때 마을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일찍부터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서당 아이들 수십 명과 같이 배우는데 배우자마자 바로 외우며 다른 아이들이 읽는 것을 듣기만 하였다. 10세 미만에 견식이 같은 또래를 앞지르니 재주 있다는 소문이 원근에 퍼졌다.

서당 선생이 어느 날 어른들을 모아 잔치를 열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공부를 그만두고 먹을 것을 찾고 있었으나 강인회는 홀로 방 한 구석에서 책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계모를 섬김에 친어머니처럼 하였다. 어느 해 어머니 제삿날에 깊이 잠들어 있었으므로 집안사람들이 어리다고 깨우지 않고 제사를 지냈는데, 잠이 깨자 새벽까지 울면서 평생 동안 죄스럽게 여겼다.

16세 때에 학문에 열중하여 기울어진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싸들고 산사(山寺)에 들어갔다. 2년 동안 공부하다가 18세 때 깨달은 바가 있어 당시 성리학으로 이름 높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24세 때 부친의 상을 당하자 슬퍼하고 초상을 치르는데 예법대로 하였다. 26세 때 탈복(脫服)하자, 가족을 이끌고 기정진 선생이 사는 장성(長城)으로 이사하여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57년 동안을 받들고 섬기며 학문에 정진하여 그의 뛰어난 제자가 되었다. 당시 기정진의 문하에는 이희석(李僖錫)․박만채(朴萬彩)․정면규(鄭冕奎)․문동황(文東璜)․기문현(奇文鉉)․안중섭(安重燮)․유성렬(庾成烈)․김유(金瀏)․이돈형(李敦亨)․조성가(趙性家) 등 쟁쟁한 유생들이 있었으므로 항상 그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52세 때 기정진의 회갑을 맞이하여 ‘차노사선생회갑운(次蘆沙先生回甲韻)’이라는 시를 지었으며, 1874년 갑술에 부인 밀양박씨가 세상을 떠났다. 김인회는 나이가 들수록 학문이 심오하고 인품이 높아갔으므로 기정진 선생이 연로하시자 그의 문하에 와서 학업을 계속하는 자가 많았다. 박용태(朴容泰)․기용연(奇容衍)․기홍연(奇弘衍) 등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1879년 12월 29일에 기정진 선생이 죽으니 김인회는 병이 깊어 걷지도 못하면서 자리를 만들어 곡하였다. 이듬해 2월 하순에 기정진 선생을 장사지낼 때 제문을 지어 병 때문에 가마를 타고 황룡강(黃龍江)을 지나 상여가 멈춘 자리에 가서 곡하였다. 모두가 병이 더할까 걱정하여 말렸으나 김인회가 말하기를,

‘선생의 관 앞에 쓰러져 죽는다면 나의 영광이다’

라고 하였다. 귀가하자 과연 병이 더하여 그해 3월 3일에 죽으니 향년 74세이다. 임시로 집 뒤에 장사했다가 1891년 4월 1일에 장성(長城)의 금계봉(金鷄峯) 오좌원(午坐原)에 안장하였다. 1889년(고종 27)에 향천(鄕薦)과 도천(道薦)으로 조산대부동몽교관(朝散大夫童蒙敎官)을 증직하였고, 그 뒤 1982년에 영광(靈光) 묘량(畝良) 대왕산(大王山) 선영하임좌(先塋下壬坐)로 안장하고 비문을 세웠다. 저서로 춘파유고가 있다.

「춘파유고(春坡遺稿)」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강인회의 시문집이다. 모두 1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손자인 강천수(姜天秀)가 수집한 것을 1974년에 후손 강복원(姜福遠)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5대손 강성창(姜聲昌)이 후손들에게 읽히기 위하여 그의 친척인 강성섭(姜聲燮)에게 청하여 국역한 것을 정리하여 출간하였다. 권두에 최윤환(崔允煥)의 서문과 권말에 강복원의 발문이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 96수, 부(賦) 6편, 서(書) 5편, 잡저 8편, 서(序) 6편, 기(記) 5편, 축문 2편, 제문 7편, 부록으로 시 4수, 서(書) 8편, 제문 5편, 만장(挽章) 15수, 행장 1편, 묘갈명 3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오언절구(五言絶句)․사언율시(四言律詩)․오언율시(五言律詩)․칠언절구(七言絶句)․칠언율시(七言律詩) 등의 순으로 편집되어 있다. 부록에는 「노사선생왕복시서(蘆沙先生往復詩書)」가 있고, 그 다음에 기우만(奇宇萬)이 찬한 행장과 조성가(趙性家)가 찬한 묘갈명, 최윤환(崔允煥)이 찬한 묘표가 있다.

잡저의 「어제삼정책문(御製三政策問)」은 1862년(철종 13) 삼남(三南)에 민변이 발생하자 삼정에 대한 개선책으로 올린 글인데, 11개 조목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광주감시(光州監試)에서 이루어진 청묘법(靑苗法)을 내용으로 한 「조적책문(糶糴策問)」과 장성감시(長城監試)에서 이루어진 전결(田結)․계묘법(計畝法)․한전(限田) 등을 내용으로 한 「전부책문(田賦策問)」, 창평감시(昌平監試)에서 이루어진 「군액책문(軍額策問)」 등은 당시의 경제․군사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보성에서 일어난 위보사건을 소개한 「성토위보회문(聲討僞譜回文)」과, 간사한 소인들이 군자를 시기하여 무고를 일삼으니 이와 같은 풍습을 퇴치하여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향속을 돈독히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변무통문(辨誣通文)」 등은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참고가 된다.

특히 강인회 글의 특징은 잡저(雜著)에 있다. 그 중에서도 1862년에 작성된 4개의 책문에서 강인회의 사회경제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강인회는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국왕이 먼저 성학에 힘쓰고 습속을 바르게 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그는 삼정 자체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였는데, 전정에서는 농민부담을 줄이기 위해 궁중이나 부자들에게 보다 많은 과세를 주장하였으며, 군정에서는 정예병을 육성하고 호포제로의 전환을 주장하였고, 환곡에서는 상평창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이는 조세 수납의 부정뿐만 아니라 세제 자체에 대한 개혁을 부르짖은 것으로 노사학파의 주장 가운데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개혁론에 속한다. 이외에도 그는 고흥 나로도에서 타계한 이건명(李建命: 1663∼1722)의 서원 건립을 위하여 「사충서원품목(四忠書院稟目)」과 「예부발문(例扶發文)」을 지었으며, 족보위조사실을 고발한 「성토위보회문(聲討僞譜回文)」이나 남원출신의 정언 박규서(朴奎瑞)가 지위가 높은 참판 김한익(金漢益)에게 무고한 것을 알리는 「변무통문(辯誣通文)」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