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옥(朴光玉,1526-1593)


 

박광옥(朴光玉,1526-1593)                                  PDF Download

 

박광옥 초상
박광옥 초상

 

광옥(朴光玉, 1526~1593)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이다. 본관은 음성(陰城)으로 운봉현감, 영광군수, 영암군수, 밀양부사,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 이조전랑(吏曹正郞), 승의부주부(承議部主簿), 성균관직강 등을 역임했다. 그의 성격은 온화하고 순수하였으며 마음은 항상 즐겁고 평안하였다고 한다. 학문으로는 특히 역학에 깊이가 있었다. 저술의 일부가 회재유집(懷齋遺集)으로 전해지고 있다.

1526년(1세, 중종 21)에 박광옥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에 속한 광산군의 서창면(西倉面) 매월동(梅月洞) 회산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박광옥의 할아버지는 박자회(朴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司藝) 박곤(朴鯤)이다. 어머니는 찰방 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고조 할아버지(4대조) 박계양(朴繼陽)이 충청북도 음성(陰城)에서 전라도 광주(광산군)로 옮겨오면서 그곳에서 대대로 거주하였다. 박계양(朴繼陽)은 태학의 생원이었다.
음성 박씨는 대표적인 인물로 회재 박광옥을 꼽는다. 음성 박씨의 시조는 박서(朴犀)로 고려시대의 유명한 장군이다. 박서는 1231년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었는데, 그때 몽고의 장수 살리타이가 쳐들어왔다. 박서는 한 달간의 격전 끝에 몽고군을 물리쳤으나, 설리타이는 길을 우회하여 개성을 함락시키고 고려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몽고군은 철수하면서 다시 박서의 군대에 의해서 대파된 바 있다. 이러한 공으로 그는 문화시랑 평장사에 이르고 음성백에 봉해져 음성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러한 조상의 피를 물려받은 박광옥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분연히 궐기하여 집안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이었다.

1535년(10세, 중종 30)에 유헌(遊軒) 정황(丁熿)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정황(1512-1560)은 전북 장수군 출신으로 인종(仁宗)을 문소전(文昭殿)에서 제사하라고 청하다가 정미사화 때 거제도로 유배되어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성리학자로 조광조(趙光祖, 1482-1520)의 문인이며, 1536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지평(持平) 등을 거쳐 병조와 형조의 정랑이 되었다. 정황이 25살, 과거에 급제하기 직전 해에 박광옥은 그에게서 유학과 한문을 배운 것이다.

1546년(명종 1, 21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나주 선도면(船道面)에 집을 짓고 개산송당(蓋山松堂)이라 부르고 제자들을 키우며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560년(명종 15, 35세)에 광주목사 유경심(柳景深)을 도와 향교를 다시 짓고 학규(學規)를 제정하였다. 유경심은 1568년(선조 1)에 호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1571년에 병조참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565년(명종 20, 40세)에는 권신 윤원형의 죄상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1568년(선조 1, 43세)에 주위의 천거를 받아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다. 내시교관은 내시를 가르치는 벼슬이다. 이후 종부시(宗簿寺)의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종부시는 왕실 족보의 편찬과 종실(宗室)의 비위를 규찰(糾察)하는 곳이다. 이해에 광주에서 개산 방죽(지금의 전평제)을 막고 그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수월정(水月亭)을 지었다. 이곳에서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박순(朴淳, 1523~1589), 노사신(盧思愼, 1427~1498), 이이(李珥, 1537~1584)등과 교류하였다.

1574년(선조 7, 49세)에 운봉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78년(선조 11, 53세)에 전라도 도사, 충청도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도사는 관찰사의 보좌관으로 관찰사 유고시에는 관찰사 임무를 대행할 정도로 지방에서는 중요한 위치의 관료였다. 관찰사와 소관 영역을 나누어 지역을 순방하고 규찰하는 권한도 가졌다.

1579년(선조 12, 54세)에는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임명되었다.

1580년(선조 13, 55세)에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581년(선조 14, 56세) 3월 7일(음력)에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 1535~1623)과 함께, 이조좌랑 이경중(李敬中)을 탄핵하려고 하였으나 동료들과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사의를 표했다.(⌈선조실록⌋14년) 선조는 이에 대해 사직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율곡은 이경중에 대해서

“본래 학식이 없었고 또 성질이 고집스러워서 착한 것 따르기를 잘 하지 못하였는데, 전랑(銓郞)으로 매우 오래 있었기 때문에 자못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습성이 있었다.”

(⌈경연일기⌋)라고 하였다. 이경중 탄핵에 대해서는 율곡도 적극 지지하였다.
박광옥은 정인홍과 함께 대사헌 이식(李栻)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는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식에 대해서 율곡은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자제하고 단속함이 없어 남들이 천하게 여겼다.’(경연일기)라고 하였는데, 율곡 역시 박광옥과 정인홍의 탄핵 의견을 지지하였다. 당시 시중에는 율곡이 이러한 이식 탄핵운동을 율곡이 주동하였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경연일기⌋)

1589년(선조 22, 64세) 10월, 정여립이 모반을 꾸몄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정여립과 그와 연루된 많은 사람들, 특히 동인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 혹은 기축옥사(己丑獄事)로 불린다. 박광옥은 이전(1581)에 정여립의 벼슬길 진출을 막은 이경중(李敬中)을 탄핵한 바 있었는데 그 죄로 관직을 박탈당했다.

1592년(선조 25, 67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그는 고향에 돌아와 있었는데,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무능을 탄핵하고, 새로 감사에 부임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을 도왔다.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적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의병을 보내고 수백석의 군량미를 보내기도 하였다.
⌈선조실록⌋(1604년 5월 20일자 광주의 진사進士 이한용李翰龍의 상소)을 보면

“박광옥은 지난 임진년에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서로 서찰(書札)을 통해 가며 군대를 돕고 군량을 저축하며, 무기(武器)를 수선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극진히 호소하여 군사 수천 명을 모집해 권율(權慄)에게 보냈다.”

고 하였다.
7월 19일자 ⌈선조실록⌋ 기록에 이조(吏曹)에서 “과거에 급제한 박광옥(朴光玉)이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모아 현지에 머물고 있으며, 또 앞으로 향병(鄕兵)을 규합하려 한다고 합니다. 이들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하니 선조가 “관직을 제수하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박광옥은 그날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에 임명되었다.
의병활동의 공로로 8월에 나주 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12월에 사임하였다. 선조(宣祖)는 그의 활약을 듣고 호남(湖南)의 충의신(忠義臣)이라고 칭찬하였다.

1593년(선조 26, 68세)에 신병으로 사망하였다. 1602년(선조 35년)에 나주 벽진촌(碧津村)의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는데, 의열사는 나중에 벽진서원으로 바뀌었다.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와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광주에는 그를 기려 남구 칠석동에서 백운동까지의 길을 회재로라 명명하였다. 영광과 밀양에 그의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저서인 ⌈회재유집⌋ 목판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유집은 임진왜란 이전과 전쟁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유집⌋은 1권은 시 299편, 2권은 잡서 2편, 서 2편 등 6편, 그리고 부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록의 상권은 연보, 하권은 행장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