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직순(金直淳)


김직순(金直淳)                                                             PDF Download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청부(淸夫)이며, 호는 실암(實庵)이다. 문간공(文簡公) 김양행(金亮行)의 손자이며, 자연와(自然窩) 김이구(金履九,1746~1812)의 아들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집의(執義)를 지냈다. ‘유일’이란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 조선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이 지방관의 천거를 받아 등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은일편에 등재되어 있다. 또한 아들 김인근(金仁根)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정헌(靜軒)이다. 아들 역시 유일로 천거되어 장령(掌令)을 지냈다.

그리고 아버지 김이구의 자는 원길(元吉), 호는 자연와(自然窩)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후손으로 산림학자인 미호(美湖) 김원행(金亮行, 1702~1772)의 아들이다. 음직(蔭職)으로 사옹원 첨정을 지냈다. 여기서 ‘음직’이란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자가 부모나 조부모의 공으로 벼슬살이를 하는 것으로, 요즘말로 말하면 가문의 빽으로 관직에 진출한 것을 의미한다. 저서로는 「실암집(實庵集)」이 전해진다.

실암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김직순의 시문집이다. 2권 1책으로 필사본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자와 필사연도를 알 수 없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91수가, 권2에는 소(疏) 2편, 서(書) 42편, 기(記) 2편, 제문 5편, 애사 1편, 묘지 5편, 잡저 1편, 잡록(雜錄) 1편, 전(箋)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의 반 이상은 민치복(閔致福)에게 기증하거나 그를 생각하고 추앙하며 지은 것이다. 「신륵사기유(神勒寺紀遊)」는 여주 신륵사의 경개를 장편으로 묘사한 것이다. 「송죽연국매오영(松竹蓮菊梅五詠)」은 소나무·대나무·연·국화·매화 등의 특수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내용으로, 저자의 고상한 지조를 엿볼 수 있다. 이밖에 당시(唐詩)를 차운한 것이 많다.

서(書)도 민치복과의 문답이 대부분으로 수학과 면학을 강조한 내용이다. 「영사감기(榮賜龕記)」는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이 내각(內閣)으로부터 사서삼경을 하사받아 장서하기까지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국가의 융성은 교학(敎學)의 밝음과 유학의 흥기에 있다고 하였다. 잡록은 처세(處世)·수신(修身)·강학(講學)에 관하여 적은 글이다.

이어서 김직순의 아버지와 아들의 시문집을 아울러 소개한다.

자연와집(自然窩集)」은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며 김직순의 아버지인 김이구의 시문집이다. 모두 6권 3책으로 필사본이다. 이 책은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자와 필사 시기는 알 수 없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詩) 82수, 권2에는 서(書) 4편, 권3에는 잡저(雜著) 14편, 권4-5에는 차록(箚錄), 권6에는 잡지(雜識) 등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권1에 실려있는 시에는 「회고(懷古)」․「만흥(謾興)」․「백운산(白雲山)」․「종국(種菊)」․「사선정(四仙亭)」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권2의 서에는 제문․유사․명(銘)이 있는데, 이 중에 「육육와명(六六窩銘)」은 그 문장이 뛰어나다. 민이현에게 답한 편지는 대공(大功)․복제(服制) 등 예제 6조목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이고, 혹인(或人)에게 답한 편지는 상제례(喪制禮) 등 16조목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이다. 제문(祭文)은 장인 유언수(兪彦銖)와 외삼촌 권진응(權震應) 등에 대한 것이다. 「유사(遺事)」는 부친 김양행의 행적 24조목이다. 김양행이 당대의 권력자인 홍봉한(洪鳳漢)․홍국영(洪國榮) 등과 거리를 두며 청론(淸論)을 주장하였던 면모 등이 실려 있다.

권3의 잡저에는 「제한남당기문록(題韓南塘記聞錄)」이 있는데, 이것은 남당 한원진이 스승 권상하(權尙夏)의 어록을 자의(自意)로 기록하였기에 오히려 스승에게 누가 되었다고 우려한 글이다. 그리고 「심설(心說)」․「혼백설(魂魄說)」․「성도설(性道說)」․「기질지성설(氣質之性說)」․「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성리학에 대한 일련의 논설들이다. 호론(湖論)의 학설을 비판하는 몇 대목은 낙론(洛論)의 동향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공이(公移)」 4편과 「하첩(下帖)」 2편은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 부세와 재정, 흥학(興學) 등의 변통책을 주장한 것이다.

권4는 「중용차록(中庸箚錄)」이다. 원래 27세에 쓴 것을 1799년(정조 23)에 다시 개작하였다. 권두에 「중용위학도(中庸爲學圖)」와 「위학도설(爲學圖說)」이 있고, 이하에 「서문(序文)」·「편명(篇名)」·「편제(篇題)」와 제1장에서 제30장에 대해 본인의 견해를 서술하고 있다.

권5는 「대학자록(大學箚錄)」과 그에 부속된 「도량설변(都梁說辨)」, 「위학도설(爲學圖說)」이다. 「대학차록」의 체제는 「중용차록」과 유사하다. 「공문전수심법(孔門傳授心法)」․「중용위학도설(中庸爲學圖說)」 30장과 「대학」의 서문에 대한 논설이 들어있다. 권6은 「논어」·「대학」·「중용」에 대한 잡지이고, 권7은 「맹자」에 대한 잡지이다. 이처럼 잡지에는 「논어」·「대학」·「맹자」·「태극도설」에 대한 해설이 있어 저자의 학문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김양행․김이구․김직순으로 이어지는 가계는 안동 김문 가운데서도 산림을 지속적으로 배출한 가계로서 낙론 학계의 큰 줄기이다. 특히 본집은 태반이 경설(經說)로서 낙론의 경학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정헌집(靜軒集)」은 조선후기의 학자이며 김직순의 아들인 김인근의 시문집이다. 4권 2책으로 필사본이다. 1876년(고종 13) 아들 김병우(金炳愚)가 간행을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권두에 이형보(李馨溥)의 서문과 권말에 작은아버지 김명부(金明夫)의 발문이 있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 시(詩) 3수, 소(疏) 2편, 서(書) 37편, 권2에 서(書) 19편, 서(序) 2편, 기(記) 2편, 제문 10편, 권3에 제발(題跋) 5편, 애사 2편, 묘지명 9편, 잡저 1편, 권4에 부록으로 정헌기(靜軒記)·행장 각 1편, 유사 44편, 제문 14편, 만사 15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 가운데에는 친구인 이형보와 주고받은 것 19편이 있는데, 주로 학문과 처신에 관한 내용이다. 사상과 학풍에 있어서는 다분히 실학적 경향을 띠고 있다. 잡저의 「서신김뇌경(書贐金雷卿)」은 김성묵(金聲默)에게 노자 대신으로 준 격려사로서, 도덕·인의(仁義)가 강조된 서적이 아닌 자(子)·사(史)·시(詩)·문(文)을 공부하더라도 그 책 자체보다 마음가짐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허명이나 허세보다 매사를 실지에 착안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볼 때, 역시 저자의 학문이 실천적 경향이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끝으로, 조선후기 문인이자 여항시인으로, 방랑자의 삶을 살았던 정종한(鄭宗翰)이 김직순에게 보낸 시 한편을 소개한다.

이것은 김직순이 정종한을 방문했을 때 지은 시이다.

 

驪鄕三秀竹菴名  (려향삼수죽암명)
여주 고을의 세 분의 뛰어난 수재로써 죽암이 알려졌는데

想見天姿鍾地英  (상견천자종지영)
짐작해보니 타고난 자태가 명예로운 땅에 모였네.

曽是先生生長處  (증시선생생장처)
오래전부터 선생이 성장한 곳,

山容如畵水心淸  (산용여화수심청)
그림 같은 산의 모습에 강물도 맑구나.

 

 

[참고문헌]: 「여주읍지」(189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