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직필(洪直弼)-3


홍직필(洪直弼)-3                                                       PDF Download

 

171776(영조 52)∼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홍긍필(洪兢弼).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이다.

여기서는 홍직필이 영월을 유람하면서 남긴 글을 소개한다.

홍직필은 1820년 3월 아버지인 판서공(判書公)이 부사(府使)로 있는 영월에 간다. 영월에서 판서공을 모시고 나연(羅淵)․옥순병(玉筍屛)․자연암(紫煙巖)․금강정(錦江亭) 등을 둘러보았고, 4월에는 절친한 임노(任魯)․오희상(吳熙常) 등과 함께 다시 금강정․청령포 등을 둘러보고, 당양과 청풍까지 유람한다. 단종(端宗)의 자취가 남아있는 영월은 홍직필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평소 절의를 강조하던 홍직필에게 영월은 그만큼 의미있는 고장이었다. 영월과 관련하여 그가 남긴 글은 「관란정기(觀瀾亭記)」, 「청령포기(淸泠浦記)」, 「창열암기(彰烈巖記)」, 「상동민전(上東民傳)」, 「기경춘전(妓瓊春傳)」 등이다. 이 글들은 모두 1820년 같은 해에 지어졌다. 이들의 내용을 살펴본다.

관란정기」는 단종이 손위(遜位)에 따라 영월로 몸을 숨겼던 원호(元昊)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구성을 보면, 서두에서 생육신(生六臣)에 대한 평가와 함께 관란정의 유래를 소개하였고, 두 번째로는 매일 동쪽 행재소(行在所)를 향해 한탄을 그치지 않는 원호의 행위에 감복하여 개가(改嫁)를 단념하게 되는 여인의 일화를 소개하고, 세 번째로는 영월을 유람하면서 이러한 일들을 들었다는 것과 이에 대한 감탄과 평가가 이루어진다. 아래의 다른 기(記)에 비해 원호와 여인의 일화를 다룬 서사(敍事) 부분이 비중 있게 서술되어 있다. 의론의 내용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단종의 폐위를 주도한 이들에 대한 비판이다.

 

“아아! 정난을 일으킨 이들은 혹 이 과부의 행실을 들었을까? 조정의 군자들이 시골의 천한 여자보다 못하다고 하겠구나.”

 

이것은 조정의 실권자들을 시골 과부와 비교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청령포기」는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에 대한 기록이다. 단종이 이곳에 유배된 사건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가운데 청령포에 대한 묘사와 인상을 표현한 대목이 주목을 끈다.

“이에 이르러 더욱 폭이 커지는데, 깊은 물살이 돌아들어 산기슭 3면을 감싼다. 잔잔한 곳은 깊어서 어둡고 물살이 높은 곳은 흰 거품이 들끓어서, 오싹하고 애처롭게 만들므로 ‘청령포’라 부른다고 한다. 그 위로 산이 있는데 험준하고 가팔라서 칼과 창을 빽빽이 진열한 듯 살기가 하늘을 찌른다. 그래서 ‘도산(刀山)’이라고 한다. 도산 아래 무너진 담장과 주춧돌이 잡풀 속에 묻혀 있으니, 즉 단종이 머물던 유적지이다.”

여기에서 홍직필은 청령포 물살과 도산의 험준함을 묘사함으로써 단종이 거처했던 곳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사실 요즘 청령포의 물폭은 그다지 넓지 않지만, 배를 타야함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비가 좀 내리면 꽤나 넓은 물길을 이룬다고 한다. 지금도 그곳은 당시의 분위기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창열암기」는 단종의 죽음에 따라 궁인(宮人)들이 투신한 곳에 대한 기록이다. 내용을 보면, 배은망덕하고 나라와 임금을 팔아먹은 자들은 모두 고관들이고 절개를 중시하여 목숨을 가벼이 여긴 이들은 천한 여인들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소위 경사대부는 이해로 그 마음이 어지럽고 화복(禍福)에 위협을 당하여 피하는데 교묘하다. 그리하여 하늘과 사람을 속임이 여기서 극에 달했다. 여종의 경우엔 의리의 양심을 온전히 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계산하지도 않아서 위급한 때에 목숨을 결단하였으니, 피하지 않는 바가 있다.”

 

고관들은 자신의 지위와 재산에 대한 욕망이 본심을 가렸기 때문에 하늘과 사람을 속였고, 여종의 경우엔 양심을 온전히 하였기 때문에 위급한 때에 과감히 목숨을 결정할 수 있었다. 부귀를 누리지 않은 이들이 절의를 수립한 사건들을 보여줌으로써, 부귀로써 사람을 판단하는 일반적 견해를 반성하게 한다.

상동민전」은 영월 상동면(上東面)에 사는 이름 모를 백성에 대한 전기이다. 그는 청령포에서 단종에게 음식을 바쳤던 인물이다. 단종이 승하하던 날, 상동민은 이 사실을 모르고 여느 때처럼 단종을 배알하러 가는데, 단종이 백마를 타고 이르러서는 태백산으로 간다고 하였다는 전설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홍직필이 장릉(莊陵)에 갔을 때, 홍직필에게 당시의 일을 전해준 노인이 단종을 ‘우리 주상(吾主上)’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고는 ‘단종의 지극한 덕이 사람에게 깊이 스며들었음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기경춘전」은 영월의 어린 시생이었던 경춘의 비문(碑文)을 보고 쓴 것이다. 그 구성은 서문, 경춘의 열행(烈行), 천덕산인(天德山人)의 평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이익을 보아도 의리를 훼손하지 않고 겁을 주어도 지조를 바꾸지 않는 것이 ‘유행(儒行)’인데, 그것을 천한 여자로서 감당해 내었으니 이야말로 ‘참된 열녀’라고 하였다. 남편이 죽었을 때 따라 죽는 종사(從死)가 아니라 자기의 지키는 바가 위협받는 가운데 그것을 고수하는 것, 그것이 ‘열(烈)’의 적극적인 의미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면서 학식과 덕망을 갖춘 여자보다 천민인 경춘이 더 낫다고 칭찬하였다.

경춘은 영월의 기생인데, 부사였던 이만회(李萬恢, 1708~1784, 자는 仲容, 본관은 延安)의 사랑을 받고서 두 마음을 품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만회가 떠나간 후에 ‘지부지객(知府之客)’이 경춘의 미모에 빠져서 수청을 들라고 강요하게 되고, 이를 모면할 방법이 없는 경춘은 결국 금강(지금의 동강)에 투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부지객’의 경춘에 대한 협박내용은 다음과 같다.

 

“후에 ‘지부지객’이 보고는 좋아하여 위엄으로 겁주고 좋은 말로 구슬려 뜻을 빼앗고자 하였다. 경춘은 긑내 듣지 않았다. 여러 번 매질을 당하여 다리에는 피가 흘렀다. 경춘은 결국 피할 수 없음을 알고는……”

 

이 글에서 ‘지부지객’이는 표현은 의미가 모호하다. 부사의 친구(客)인지, 바로 ‘부사’를 가리키는 것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비문에서는 후임관원이 왔을 때 강요하였다고 하였고, 「향토지」에는 ‘새로 부임한 사또’가 강요하였다고 하였다. 현재도 영월에는 경춘의 비석이 남아있다.

이러한 글을 통해 눈에 띄는 것은 홍직필의 지배층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하층민에 대한 포용적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적 근거는

“사람은 천지의 정수를 받아서 태어나니, 고금(古今)과 존비(尊卑)의 차이가 없음을 더욱 경춘에게서 볼 수 있다”

 

는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은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계열에 속하는 홍직필의 사상적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것이 곧 신분차별의 철폐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지만, 홍직필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고려되어야 할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그가 제자를 받아들일 때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는 점 등을 관련시켜 보면, 그에게 신분상의 차별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내재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홍직필의 영월 유람과 節義의 형상화」(이대형, 「한국문화연구」권8,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