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태(金必泰,1728-1792)


김필태(金必泰,1728-1792)                                  PDF Download

 

1728(영조 4)~1792(정조 16). 조선 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관은 광산(光山), 자는 대래(大來), 호는 둔암(屯菴) 또는 문과당(聞過堂)이다. 아버지는 김천덕(金天德)이고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다. 오산(鰲山) 용강(龍江)에서 태어났으며 김창협(金昌協) 형제로부터 크게 인정받았던 김극광(金克光)의 증손이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당시 학계가 일반적으로 성명이학의 사변론에 치우쳐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반궁실천(反窮實踐)에 힘썼다. 따라서 그는 심성이기(心性理氣)가 학자들의 급선무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깊이 탐구하는 일도 없었다. 이에 대하여 타인들로부터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으면, 그는 곧바로 아직은 너무 이르다는 말로써 대답을 대신하곤 하였는데, 이는 그가 세속의 학문적 폐단을 징계하고자 함이었다.

일찍이 그가 가식(家式)을 저술하였을 때에 스승인 윤봉구는 그것을 ⌈예기(禮記)⌋의 「내칙(內則)」과 표리가 될 만하고 칭찬하였다. 김원행이 처음으로 김필태를 만났을 때 기뻐하며 말하기를, ‘원광공(遠觀公)에게 이렇게 훌륭한 손자가 있었구나’라고 하고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에 들며 부지런히 힘써서 너를 낳아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말라(夙興夜寐 毋忝爾所生)’는 아홉 글자를 써주었다고 한다.

스물이 안되어 부친을 잃은 힘든 상황이었지만, 송시열과 이이의 학문을 거울삼고 김원행․김창협을 스승으로 삼아 ⌈대학(大學)⌋에 전념하였으며, 형이상학적 담론보다는 형이하적인 실천의 문제에 전념하였다. 1766(丙戌)년 이래 3년 동안 천등산(天登山) 기슭에 몇 칸 초옥을 마련하고 송시열의 화양(華陽)과 이이의 석담(石潭)에 비할 만한 서재를 마련하여 자신의 졸박한 품성을 길러나가기도 하였다. 평소 효심이 지극하였으며 부친상을 맞아 정성을 다하였다.

1754년 윤봉구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힌 뒤에, 고산현(高山縣) 옥계(玉溪)로 옮겨가 은거하던 중 1780년(정조 4)에 도백(道伯)이 조정에 천거하여 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에 제수되어 벼슬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1782년에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로 승진하였으나 홀로된 모친에 대한 걱정이 병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1783년에는 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으로, 이듬해인 1784년에는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다. 또 그 이듬해인 1785년에는 정월에 義禁府都事(義禁府都事)에, 3월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6월에 영릉령(永陵令)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9월 모친이 세상을 떠난 뒤 벼슬에서 물러나 더 이상 세상에 대한 마음을 끊고 생을 마칠 때까지 은거하였다.

사후에 효암서원(孝岩書院)에 추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둔암집(屯菴集)이 있다.

둔암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필태(金必泰)의 시문집이다. 모두 6권 3책으로 활자본이다. 1811년(순조 11) 그의 문인인 황언진(黃彦鎭)․김준택(金濬澤) 등의 편집을 거쳐서 손자인 김광옥(金光鈺)에 의해 간행되었다. 김필태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793년에 장자 김시중(金時中)이 유교를 모아 편찬 작업에 착수했으나, 절반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손자인 김광옥이 이 일을 계속하였고 그의 문인들의 도움을 받아 1811년에 마침내 간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권두에 심문영(沈文永)의 서문과 권말에 황언진․김준택(金濬澤) 등의 발문이 실려 있다. 이 책의 서문은 심문영이 김필태와 더불어 스승인 김원행을 사사한 인연 때문에 손자인 김광옥의 부탁으로 쓰게 된 것이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운문으로 부 2편, 시 79수가 있다. 권2·3에는 산문으로 서(書) 62편, 권4에는 잡저 13편, 권5에는 서(序) 6편, 기 7편, 제(題) 1편, 발 4편, 변 2편, 명 9편, 설 1편, 권6에는 제문 19편, 묘지 9편, 행장 5편, 부록으로 송환기(宋煥箕)의 찬(撰)으로 묘갈명, 김광옥의 찬으로 가장(家狀) 등이 실려 있다. 권2에 수록된 김원행(金元行)과 윤봉구(尹鳳九)에게 올린 편지는 대부분 스승에게 통례(通禮)․관혼례(冠昏禮)․상제례(喪祭禮) 등 예에 대한 내용과 의리(義理)․이기(理氣) 등에 대한 내용에 대해 물은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은 문사가 평이하고 담박하며 꾸밈이 없어 도학적인 지취가 풍긴다. 시는 주로 서정시가 많고 소옹(邵雍)의 운을 차운한 것이 군데군데 보인다. 편지 글 가운데 스승인 윤봉구와 김원행에게 올린 글에서는 그가 젊은 시절 성인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믿고 실천하는 것에 만족하고 지식에 있어서는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한번 깨달은 이후에는 중용과 대학에 담겨있는 의리의 중요성에 대하여 절감한다고 하는 등 학문관의 변모과정을 살필 수 있다. 이들 간에 주고 받은 서한은 주로 예설과 이기설에 관한 문답인데, 주로 가례문목(家禮問目)·관혼례(冠婚禮)·상제례(喪祭禮)·이기설(理氣說)·예의문목(禮疑問目)·의리설(義理說) 등에 관한 내용이다.

잡저의 「거가범식(居家凡式)」은 제가(齊家)의 요체를 예법으로 파악하고 고금의 여러 서적들을 상고한 뒤에 자신의 견해를 참작하여 정리한 가정생활의 윤리법식으로서 인륜을 바로잡고 은혜와 의리를 도답게 하려는 의도에서 지은 글이다. 이는 실제에 부합되는 학문을 해야 한다는 그의 초기 학문관이 반영된 저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 「일가지정(一家之政)」은 전적으로 가장에게 매어 있다는 내용이다. 그의 대표적 잡저라고 할 수 있는 그 밖에 눈에 띄는 작품으로 「궁거수약법(窮居守約法)」은 사람은 누구나 궁핍한 생활을 싫어하지만 궁핍을 면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이상, 궁핍을 벗어나기에 급급하여 본성을 잃기 보다는 천명을 깨닫고 도를 즐기는 태도가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는 인식 하에, 스스로 산거(山居)를 실천하면서 수약(守約)의 방법이라고 생각되는 내용들을 정리하여 주위 사람들과 자신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 글이다. 우리나라 양반의 폐습이 더욱 심해 의식에 치중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을 본받아 모두 자신의 본분을 잃는다는 내용이다.

「위인지방(爲人之方)」은 사람의 처신에 규모가 있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그 방법으로 효우부모(孝于父母)로부터 입신(立身)․망신(亡身)에까지 40여 항목을 열거하였다. 「유초당학자(諭草堂學者)」는 학자로서 지켜야 할 상목(常目)을 입지(立志)․지심(持心)․율신(律身)․역학(力學)으로부터 접인(接人)․발언(發言) 등에 이르기까지 12개 조항을 지목하여 제자들이 지킬 덕목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위학지요(爲學之要)」는 학문의 도리와 방법을 7개 조목으로 정리한 글로서, 자신의 성품의 실질이 성인과 차이가 나지 않으며 성인이 남긴 말이 실제의 생활 속에서 우러나온 것에 대한 깨달음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을 권한 글이다. 「군자소인변(君子小人辨)」은 군자와 소인에 대한 구분을 ‘군자는 천명을 두려워하고 소인은 천명을 소홀히 대한다’는 것을 포함하여 모두 32개 조목을 열거하여 변론한 글이다. 전체적으로 그의 학문관은 성리학적 담론이 주류를 이루는 분위기에 어느 정도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하나의 주류로 성장하기에는 역량 면에서 미흡함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잡설(雜說)」은 성리학의 대강을 말하고, 말미에서 이를 근거로 천주교가 유학과 어긋남을 비난하고 있는 내용이다. 권5의 기(記), 변(辨), 명(銘) 등도 대부분 수양과 의리에 대한 내용이 많다. 규장각도서한국본종합목록(奎章閣圖書韓國本綜合目錄)에는 김준택의 제(題)의 작성 연도를 ‘수정신미(崇禎辛未)’라는 말에 근거해 1631년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김준택은 제에서 자신이 김필태의 문인이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숭정후4신미(崇禎後四辛未)’로 읽고 1811년 표기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