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회(姜寅會)1807~1880 – (제2편)


강인회(姜寅會)-(제2편)                                          PDF Download

 

1807(순조 7)~1880(고종 17).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는 태화(太和), 호는 춘파(春坡)로 1807년 정묘 12월 27일에 고창군 대산면 장동리에서 아버지 예당공(禮堂公) 강재형(姜在衡)과 어머니 함풍 이씨(咸豊李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난번 글에 이어 여기서는 강인회의 시문집인 춘파유고(春坡遺稿)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유고는 강인회의 손자 강천수(姜天秀)가 수집하였고 유고의 뒷부분과 편차는 현손 강복원(姜福遠)이 그의 족제 강병원(姜炳遠)과 함께 작성하였으며, 경당 최윤환(崔允煥)의 감수를 받고 그의 서문을 붙여 간행하였다.

춘파유고의 맨 앞에 갑인(1974)년 11월 상순에 월성 최윤환이 지은 ‘춘파유고서’가 있고, 다음에 ‘춘파유고 목차’가 배열되어 있다. 이 목차 다음에 시 작품이 오언절구, 사언율시, 오언율시, 칠언절구, 칠언율시 등의 순으로 편집되어 있다. 다음에 서(書)․잡저(雜著)․서(序)․기(記)․축문(祝文)․제문(祭文) 등의 산문이 편집되어 있고, 그 다음 부록(附錄)에는 ‘노사선생 왕복 시서(蘆沙往復詩書)’와 ‘조월고 성가 내서(趙月皐性家來書)’와 제문(祭文)과 만장(挽章)이 있다.

다음에 송사 기우만(奇宇萬)이 찬한 행장과 월고 조성가(趙性家)가 찬한 묘갈명과 경당 최윤환이 찬한 묘표가 있고, 맨 끝에 강인회의 현손 강복원이 찬한 발문이 있다.

춘파유고에 게재된 작품은 시가 96수이고 산문이 33편이다. 춘파 강인회는 평생 동안 학문을 일삼았으나 남들처럼 명리를 탐하지 않았고, 부귀와 공명은 뜬구름처럼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대하면 시를 읊었고 다정한 친구를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며 심정을 토로하면서 한가한 세월을 보냈다. 따라서 그가 지은 시에서 인생의 삶을 숨김없이 토로하고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어서 그의 시 몇 편을 감상하여 보자.

 

늦은 봄에 놀며
遊暮春

우는 꿩 소리 꿩꿩 들리고
鳴雉角角

싹튼 보리 잎은 번질번질하네
嫩麥油油

말없이 밖에 나가 놀기도 하고
薄言出遊

술독에는 술이 많이 담겨있네
樽酒淹留

맑은 거문고 소리 마주볼 생각하니
淸琴晤懷

좋은 시구 마음 근심을 풀어주네
好句紓愁

따뜻한 봄날의 한 가락
陽春一曲

천년에 누구와 짝을 하리
千載誰儔

 

춘파유고에 ‘화도시기조직교(和陶詩寄趙直敎)’라는 제목으로 사언율시 12수가 들어있다. ‘도시’란 중국 동진 때의 도잠(陶潛)의 시라는 말이고 ‘조직교’는 동문수학했던 월고 조성가의 자가 직교(直敎)임으로 그에게 지어준 시임을 알 수 있다. 강인회의 시의 내용으로 보면 도잠의 ‘시운’을 화운하여 처음 4수는 친우를 생각하는 시이고 다음 4수는 모춘의 유람을 읊은 것이다. 봄날에 앞산에서 우는 꿩 소리는 유달리 크기도 하여 산촌의 적막을 깨기가 일수이다. 그리하여 ‘나 여기에 잇노라’하고 자랑하는 듯 또는 선포하는 듯하여 결국은 암놈(까투리)을 부르는 본능적인 외침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알리려는 언사를 흔히 ‘춘치자명(春雉自鳴)’이라 한다. 백화가 난만히 무르익은 봄날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는 동문을 생각하고 봄의 정경을 지어 보낸 강힌회의 벗을 그리워하며 봄날을 즐기면서 도연명처럼 유유자적하는 도인의 생활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연꽃 시를 지으려 하나
我欲蓮詞製

그대를 칭찬할 시구가 없네
無詞可讚君

굴자는 향기를 맡으려 차고
香聞屈子珮

주렴계는 청정하다고 글을 지었네
淨撰極翁文

물에 잠기니 영롱한 붉은 옥이고
蘸水瓏紅玉

바람에 흔들리니 푸른 구름 넘치네
颭風漲碧雲

어떻게 이백의 시구를 가져다가
那將白也句

조각하여 꾸미고 삼분을 따라갈까
雕餙去三分

 

이 시는 연꽃을 읊은 것이다. 연꽃하면 송나라 염계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남들을 국화나 목단을 사랑하지만 주돈이는 연꽃을 사랑한다고 지은 글이다. 이 시에는 초나라 굴원(屈原)과 주돈이와 이백(李白) 등이 작품 속에 언급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굴원은 초사의 작자이고, 이백은 당나라 시선으로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최고의 시인이다. 연꽃을 바라보며 그저 ‘좋구나’ 아니면 ‘참 아름답구나’ 정도를 넘어서 굴원을 상상하고 주돈이를 연상하고 이백을 그리워하는 작자의 학문의 경지는 시를 짓는 수준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생각이다.

 

글공부에 힘을 쓰는 것 큰 뜻 품은 길인데
於書着力是鵬程

마침내 가난한 사람이 뜻과 행실 얻게 되네
畢竟貧寒得志行

누가 이름 아래 남파 늙은이 있음을 알까
誰知名下南坡叟

사는 이치 공과 공이라 한 솥에 새긴 명이네
生理空空一鼎銘

 

유교가 현실생활을 강조하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공양의 도를 받들고 실천하는데 왜 종교가 아니겠는가. 인간도 다른 생물처럼 죽으면 ‘혼비백산’하게 되니 그 다음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선을 행하고 사회를 위하여 공을 쌓으라’는 것이 유교의 중심 사상이다. 따라서 학문을 하는 목적은 인격을 수양하여 행실을 바르게 하며, 벼슬에 오르면 만인을 위하여 업적을 남기는 것이 입신양명(立身揚名)이었다.

위의 시는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고제인 강인회가 남파 이희석(李僖錫)의 시에 화운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학행(學行)으로 향당의 귀감이 된 분들이었으니 안빈자족(安貧自足)하면서 담박한 인생을 살고 있음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春坡遺稿 小考」(한자한문교육제11집, 유풍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