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규(羅燾圭, 1826-1885)


나도규(羅燾圭, 1826-1885)                                  PDF Download

 

도규(羅燾圭, 1826-1885)는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석정동에서 태어났다. 기정진으로부터 성리학과 예학 등에 대해서 배웠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유교 경전과 예학, 음양의 이치 등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1826(1세, 순조 26)에 나주(羅州) 계촌면(桂村面) 내동리(内洞里)에서 태어났다. 봉황산(鳳凰山) 아래에 위치한 이곳은 나중에 광산군(光山郡) 대촌(大村)으로 지명이 바뀌었는데,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석정동에 속한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치문(致文), 호는 덕암(德巖)이다. 증조부는 나필은(羅弼殷), 조부는 나석증(羅錫曾)이며, 부친은 나희집(羅禧集)이다. 모친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현임(李鉉臨)의 딸이다.

1841(16세, 헌종 7), 부친이 사망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상례에 따라 그대로 시행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후 기정진(奇正鎭)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교 경전과 예학 등을 배우고 과거공부를 하였다. 예학과 의리 등에 대해서도 모른 것이 없을 정도로 정통했으며, 시문을 잘 지었다.

1851(26세, 철종 2)에 「항검자설(恒儉字說)」을 지었다.

1852(27세, 철종 3), 「촌자설(村字說)」을 지었다.

1853(28세, 철종 4), 「심학도설(心學圖說)」을 지었다.

1860(35세, 철종 11)에 한양에서 열리는 정시(庭試)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2월 28일에 동생 나도룡, 고제일, 유호근 등과 함께 한양으로 향했다. 정시는 수시로 보는 부정기적인 시험이었는데 1차례의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었다. 일행은 담양, 순창, 원평, 금구, 금강, 성환, 오산, 화성, 그리고 한강을 건너 숭례문(남대문)으로 들어갔다. 3월 9일에 도착하여 12일에 시험에 참가하였다. 철종이 친히 참석하여 ‘만세토록 태평을 열라(爲萬歲開太平)’는 주제를 시험 책문(策問)으로 내걸었다. 그에게는 완전히 익숙한 제목은 아니었으나 평소에 제자들에게 설명한 내용을 중심으로 글을 지어 제출하였다. 시험 합격에 대한 자신은 없었다. 이튿날에도 삼일제(三日製)라는 특별 과거시험이 거행되었다. 시험 제목은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나아가다(東漸于海)’였다. 나도규는 ‘곧 태평시대가 열리면 어찌 바다까지 이르도록 적셔주는 은택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전날에 본 시험 제목과 합쳐서 보면 철종이 그러한 제목으로 과제를 낸 의도를 알 것만 같았다. 임금의 그런 의중에 감탄하고 경의를 표하였다. 그는 이러한 두 차례의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단지 다음날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공자의 대성전에 배알하는 알성례(謁聖禮)를 가까이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의 감격을 이렇게 썼다. “나는 백면 유신(儒臣, 유학을 공부한 신하)으로 외람되이 한양으로 올라와 전하의 용안을 지척에서 뵙고서 예전부터 우러러 보았던 마음을 펴게 되었으나 작은 충성도 바칠 수 없으니 재주가 없음을 한탄할 뿐이다.”

그는 나중에 관직을 포기하고 성리학과 태극 및 음양의 이치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한번은 어떤 재상이 나도규에 대해서 듣고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시험 보기 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낙방하지 않았을 텐데.” 나도규는 이 말을 듣고 정색을 하며 “과거 시험을 보기도 전에 찾아가 뵙는 것은 진정한 선비의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1864(39세, 고종 1)에 집터에 휴양소 겸 강학을 위한 정자 남덕정(覽德亭)를 세웠다. 육영제(育英齋)라고도 불린 이곳에서 그는 성리학과 도덕을 가르쳐 많은 인재를 키웠다. 정자는 원래 초가였으나 나중에 나도규의 손자와 그 제자들이 협력하여 중건하고 그 후에도 계속 보수해오고 있다.

1868(43세, 고종 5)에 무등산(서석산)에 올라 등산을 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신발을 매고 길을 나서 광주읍을 향하여 떠났다. 정오에 발길을 재촉하여 증심사에 이르렀다. 증심사 계곡입구에 흐르는 물이 자갈 깔린 개울을 이루었다. 벼랑과 암반을 도는 여울이 우렛소리를 낸다. 최치원의 시에 ‘돌무더기 사이를 치달리며 깊은 골짜기를 울리네’라는 구절은 바로 이곳을 위해 준비해둔 시가 아닐까? 나무다리를 밟고 골짜기를 건너면 곧바로 절(증심사)이다. 절은 무성한 숲과 쭉쭉 뻗은 대나무 사이에 있다. 절이 비록 고찰이나 담은 무너지고 벽은 기울어져 모양새가 나오지 않는다.”
(⌈서석록(瑞石錄)⌋ 8월 3일 기록)

이때 깊은 인상을 받아 그는 2년 후인 1870년 4월에도 1박 2일 동안 가족을 데리고 무등산 산행을 하였다.

“집안 아저씨와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등산 도구를 준비하고 나주에서부터 화순의 남산을 거쳐 갔다. (중략) 4월 4일. 어제 저녁에 비가 조금 내렸으나 날이 밝기 전에 개였다. 서석산을 향하였다. 광치를 거쳐 사동을 지나가는데 철쭉꽃이 일제히 만개하니 온통 자주색과 붉은색 세상이라고 할 만하니 황홀하게 비단에 수놓은 장막 속에서 등산하는 것 같았다. 돌아보건대 행장에 다 구비되니 너무 사치한 것은 아닌가? 팔다리를 편히 하고 숲으로 들어가 크게 외치고 봄을 실컷 만끽하니 진정 별천지 가운데 즐거움이리라.”
(⌈서석속록(瑞石續錄)⌋)


1879
(54세, 고종 16), 12월에 스승 기정진의 상을 당하였다. 그의 문장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통유문(通諭文)」과 「집상제문(執喪諸文)」 등을 지었다. 초상을 치루고 「성기잠(誠幾箴)」을 지었다.

1883(58세, 고종 20)에 「자경사(自警辭)」를 지었다.

1885(60세, 고종 22), 3월에 고내상(古內廂) 도산촌(道山村)에서 세상을 떠났다. 9월 복룡산(伏龍山)에 장사지냈다가 나중에 석정(石亭)으로 이장하였다.

저서로 시문집인 ⌈덕암만록(德巖漫錄)⌋이 있다. 이 시집은 아들 나정근(羅楨瑾)과 손자 나종우(羅鍾宇)가 유고를 정리한 것이다. 그 내용은 시 302수, 서 88편, 설 10편, 서 20편, 기 34편, 기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철, 기정진, 최익현, 기대승 등과 같은 인물을 다룬 시가 있는가 하면 사물과 사건, 풍정과 서경, 감회 등을 묘사한 시가 있다. 화순에서 출생하여 나중에 의병장을 지내기도 한 기우만(奇宇萬)은 나도규에 대해 “그의 재주는 세상에 쓰일 만하고 그의 문장은 나라를 빛낼 만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내용 중에 「삼정책(三政策)」은 전부(田賦)·군적(軍籍)·환곡(還穀) 등 삼정이 문란한 것에 대해 논하고 그 대책을 밝힌 것이다. 「문장책(文章策)」은 사장학(詞章學)을 버리고 경전 연구를 중시하라는 글이다. 또 무등산을 유람하고 지은 ⌈서석록(瑞石錄)⌋과 ⌈서석속록(瑞石續錄)⌋ 등이 있다.

<참고자료>

김성환, 「덕암만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은희, 「南道 정자기행(413) – 향리의 기품이 광주 남덕정」, 한국매일 뉴스

이미선, 「나도규에 대하여」,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박명희, 「나도규(羅燾圭)의⌈덕암만록(德巖漫錄)⌋」, 한국학자료DB

「나도규의 서행일기」, 호남기록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