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吳瑗)


오원(吳瑗)                                                                        PDF Download

1700년(숙종 26)∼1740년(영조 16)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옥(伯玉), 호는 월곡(月谷). 할아버지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죽은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晉周, 1680∼1724)이다.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이다. 현종의 딸 명안공주를 맞이하여 임금의 사위가 된 오태주(吳泰周, 1668∼1716)에게 입양되었다. 자식이 없던 오태주가 아우 오진주의 아들 오원을 양자로 맞아들인 것이다.

당시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재(李縡)가 그의 고모부로, 이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한편 오원의 아들 가운데 오재순(吳載純, 1727∼1792)은 문형(文衡)을 지냈으며, 손자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은 성리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렇듯 대단한 가문을 배경으로 하는 오원은 1700년에 도성 내 대사동(大寺洞)에서 출생하였다.
아들 오재순에 따르면, 오원의 얼굴은 각이 졌고 수염이 성글며, 넓고 평평한 이마에 귓바퀴가 크고 둥글게 솟아 단정하고도 풍성한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또 웃음이 적고 조용하였으며 스스로 뽐내지 않고 행동거지에 무게가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 나온 지 7일 만에 생모를 여의고 할머니 황씨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기억조차 날 리 없는 생모이지만, 오원은 생모의 부재라는 상실감을 평생 안고 살았다.

1723년(경종 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8년(영조 4)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732년(영조 8)에는 동지사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후 대사성과 부제학 등을 거쳐 1740년(영조 16)에 대제학에 올랐다. 그러나 1728년(영조 4)에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인 이광좌(李光佐)가 영의정에 올라 영조에게 탕평책을 건의하자, 오원은 그에 대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삭직되기도 하였다.

오원은 황우석(黃遇石, ?∼1738)․남유상(南有常, 1696∼1728)․이사중(李思重, 1698∼1733)․이천보(李天輔, 1698∼1761)․남유용(南有容, 1698∼1773)․이수득(李秀得, 1697∼1775)․황경원(黃景源, 1709∼1787) 등 여러 벗들과 교유하였다. 이 가운데 평생을 두고 가장 의기가 잘 맞았던 이는 황우석과 남유용․이천보였다. 황우석은 오원보다 마흔살 가량이나 나아가 많았지만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는가 등 오원이 평생에 걸쳐서 허물없이 지낸 인물이었다.

그의 성품은 정직하고 온후하였으며 문장 또한 깨끗한 절개를 지녔다. 영조실록, 영조 16년 10월 10일에는

 

“사람됨이 조촐하고 깨끗하였으며 소탈하고 우아하여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라고 그의 사람됨을 평가하고 있다. 또한 오원이 과거에 급제한 후 영조가 그를 불러서 만난 일이 있는데, 이때 오원은 영조에게

“사사로이 뵙는 것은 상규(常規)에 어긋나는 것이니, 이후에 혹 사사로이 보자는 명이 있으면 받들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오원의 성품에는 다소 고지식한 면모가 있었으나 검소하면서도 남을 돕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흉년이 든 해에는 가난한 족친들을 불러 밥을 해 먹이는가하면, 가난한 벗이 객사하여 장사조차 지낼 수 없게 되자 곡식을 내어 장사를 지내게 하기도 하였다.

오원은 41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를 살았다. 겉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가문적 배경을 갖고 있었음에도 오원은 17세부터 잇따라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경험했다. 오원은 가족을 잃은 아픔을 시로써 토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가족을 그리워하는 오원의 몇 편의 시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소개한다.
오원은 16세 되던 해에 안동권씨 권정성(權定性, 1677∼1751)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718년에 오원은 아내와 사별하게 된다. 부친을 여읜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아내가 죽고 나서 이듬해 겨울 전주최씨 최식(崔寔)의 딸과 다시 혼인하게 된다. 그 즈음까지 오원은 죽은 부인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데, 그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로 읊고 있다.

인생은 흐르는 강물과 같으니
人生如逝川

한 번 가면 어찌 다시 돌아오겠는가.
一去那復回

비단 창은 쓸쓸히 드리워 있는데
綺窻寂寂掩

밝은 달빛은 때때로 비친다네.
明月時時來

그대 떠올리길 차마 자세히 못하겠으니
思君不忍詳

내 마음은 오래도록 슬픔을 머금네.
我懷久含哀

산 사람은 나날이 쉽게 잊어가고
生者日易忘

죽은 사람은 장차 차가운 재가 되겠지.
死者且寒灰

이 시는 남조(南朝) 심약(沈約, 441∼513)의 도망시(悼亡詩)를 읽고 느낀 애틋함을 주체하지 못해 가을 밤에 지은 것이다. 혼인한지 3년 만에 사별하였지만, 그 사이에 쌓인 부부의 정은 두터웠다. 첫째 부인 안동권씨를 사별하고 나서 곧 둘째 부인을 맞아들이지만, 첫째 부인을 쉽게 잊지 못하였던 듯하다. 첫째 부인 사후 10년이 지난 해에, 또 다시 오원은 죽은 부인을 그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나는 그대 저버리지 않았는데 그대는 나를 저버리니
吾不負君君負余

아름다운 말 굳은 약속 모두 부질없게 되었네.
良箴信誓一成虛

황천에 돌아간 그대는 즐겁겠지만
歸侍重泉君則樂

나를 위해 어째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는가.
爲吾何不少躊躇

사별한지 10년이 지나 지은 것이지만, 바로 얼마 전에 아내를 잃은 듯 아내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 짙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오원의 생부인 오진주는 첫째 부인 안동김씨와의 사이에서 오원을, 둘째 부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서 오완(吳琬)을, 셋째 부인 대구 서씨와의 사이에서 오관(吳瓘)과 오찬(吳瓚)을 얻었다. 그러니 오원에게는 모두 세 명의 아우가 있었던 셈이다. 이 아우들 가운데 오원이 가장 가깝게 지내며 아꼈던 것이 오완(1703∼1721)이다. 생후 7일 만에 생모를 여읜 오원처럼, 오완 역시 6세 때 생모를 여의어 서로 연민의 정을 느끼며 의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22세 되던 1721년에 아우 오완은 병이 들어 결국 죽게 된다. 아우 오완을 잃은 지 3년 만에 생부 오진주를 여의고, 그 이듬해에 오원은 첫 아들을 얻게 된다. 둘째 부인 전주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는데, 이 아이 역시 세 살 되던 해에 죽고 만다. 첫 아들을 잃고 난 후의 심정을 오원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불행히도 네가 내 아이로 태어나
不幸汝生爲我兒

하늘까지 닿은 내 죄로 네가 재앙을 당하는구나.
通天我罪汝橫罹

삼년만 시간 동안의 너를 생각하니 눈물만 흘러
三年萬點思兒涙

매번 부모라고 나를 돌아보던 때가 생각나는구나.
每憶爺娘顧我時

오원은 성품이 검소하여 화려한 옷을 멀리하였는데, 이 아이가 바로 그러한 부친의 뜻을 알고 화려한 옷이나 새 옷 가까이에 가려 하지 않았다는 아이다. 아우 오완을 잃었던 때에도 그랬지만, 첫 아들이었던 이 아이를 잃고 난 후 오원은 또 다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아들이 요절하였다는 죄책감이었다.

이렇게 그의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첫 아들을 잃은 그 해에 오원은 둘째 부인과도 사별하게 된다. 이렇게 오원은 생후 7일 만에 생모를, 17세에 부친을, 20세에 첫째 부인을, 22세에 가장 아끼던 아우 이완을, 25세에 생부를, 28세에 첫 아들을 잃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7세부터 소중한 가족을 하나하나 잃어갔다.
이처럼 가족의 상실과 그에 따른 자책감, 그리고 그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부친, 아내, 아우, 아들의 죽음에 부친 시에서는 한결같이 쓸쓸한 정조가 두드러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원이 시를 짓는 태도는 검소하고 원칙주의적인 그의 성품과 관련된 것으로, 재주를 뽐내려 한다거나 꾸미는데 힘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특징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월곡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월곡 오원의 시계계」(안순태, 「한국한시작가연구」, 한국한시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