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李翔:1620~1690)


이상(李翔:1620~1690)                                           PDF Download

 

관은 우봉(牛峯), 자는 운거(雲擧) 또는 숙우(叔羽),  호는 타우(打寓),시호는 문목(文穆)이며 송시열(宋時烈)을 통해 김집(金集)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유겸(李有謙)의 아들로,  젊어서부터 송시열의 문생이 되어 송시열의 기대와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과거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지조와 행실이 독실하였다.

1697년(정축,숙종24) 이후로는 사진(仕進)을 단념한 채 문을 닫고 들어 앉아 도리(道理)를 추구하였다.  선생의 천거로 한때 대직(臺職)에 제수 되었으나 1658년(효종9)에 산림(山林)이 진출할 때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과 함께 유일(遺逸) 유일(遺逸):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으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 이들을 과거시험 없이 발탁하는 인재등용 방법 중의 하나이다.  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그는 학문적 정치적으로 송시열을 따랐다.
현종(顯宗) 말년의 예송(禮訟)에서는 남인(南人)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실세하였고,  1680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의 집권이 시작되자,  다시 기용되어 사업(司業), 형조참의(刑曹參議), 우윤(右尹),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분기될 때도 송시열을 따라 소론의 남인 등용론을 반대하였다.

1688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그가 계모(繼母)와 근친상간의 혐의가 있는 먼 친적 유두성(柳斗星)을 조사하여 처리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려고 할때, 송시열이 글을 보내어 말렸으나,  그는 유두성의 음행 사건을 고발하였다.  서인이 실세한 후에는 그 범죄에 관한 조서 내용이 뒤바뀌어서 증인을 교사하고 재산을 탐냈다는 죄로 처벌을 받았으며, 기사환국(己巳換局) 뒤에 옥중에서 심한 이질로 생을 마감하였다.

1717년에 복관(復官)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받았다. 그는만년에 현재의 세종 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에 사관정(四觀亭)사관정(四觀亭): 관산(觀山)·관농(觀農)·관수(觀水)·관어(觀魚)를 하는 정자라 하여 사관정(四觀亭)이라는 이름을지었다고도 하고, 동쪽으로 운주산(雲住山), 남쪽으로 운점산(雲霑山), 서쪽으로 증산(甑山), 북쪽으로 월조산(月照山)을 바라본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이라는 정자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1699년(숙종25) 그 지역의 향유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뇌암서원(雷巖書院)을 건립하고 그곳에 모셨다.  이후 서원을 재건하면서 그의 시호를 따서 문목사(文穆祠)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 숙종 16년 1월 19일 조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개 이상은 평소에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미움을 받았는데,  서로 관계되지 않은 일을 상소하여 증거로 삼았으므로,  마침내 뜻밖의 화를 당하였다.  유두성은 바로 이상의 이성(異姓)인 먼 친족이므로 유두성이 죽더라도 그 재산은 이상에게 돌아갈 리가 없는데,  이것을 죄로 삼았으니,  참으로 심한 날조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내용이《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16년 경오(1690) 1월19일조에는 <이상의졸기>라는 제목하에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은 글을 잘 지었으나 어리석고 학식이 없었으며, 재물을 탐내고 이익을 좋아하였다.  고향에 있을 때에는 오로지 무력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일삼고,  무릇 자기땅에 가까운 남의 땅은 반드시 온갖 계책으로 꾀하여 차지하였으므로,  모 바른 밭에 곧바른 논이라는 속담이 있었는데,  대개 남의 땅이 혹 자기 땅과 엇갈려 섞여 있으면 자기 것에 갈라 넣어서 모 바르고 곧바르게 만든 것을 말한 것이다.  송시열에게 아부하고 또 제 아우 이숙, 이익의 세력을 끼고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유일(遺逸)로 몸을 일으켜, 외람 되게 임금의 부름에 끼어 재상 반열에까지 올랐다.

전후의 말은 다 그 시대의 흐름을 붙좇는 것이었으며,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다툼은 이상이 실로 사이를 벌려 놓은 것이고,  송시열의 잘못도 그가 권하여서 된 것이 많다.  간통과 관련된 옥사를 밝힌 것은 그 사실이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이나 행동이 방자하고 정실이 드러나서 그 마음은 길가는 사람들도 아는 바인데,  박태만의 소(疏)에 상세히 있으므로,  갖추어 논하지 않는다.  기사년 이후에 잡아와 준비를 마쳤는데,  장차 형을 받으려 할때에 약을 먹고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숙종(보궐실록) 16년1월19일)

그리고 죽은 스승 이상(李翔)의 추탈(追奪)된 관직을 회복해 주기를 청하는 전 현감 서행원(徐行遠) 등의 상소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영조1년을사(1725,옹정3) 2월 13일(신사)조에 보이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죽은 스승은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의 문인이 고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노닐었던 인물로,  본래부터 연원이 있고 조예가 정밀하고 깊어 한 시대의 기대를 받고 세 조정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집안에 있다고 해서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고,  도를 지키는 정성은 근력이 약하다고 해서 꺾이지 않았습니다.  간사한 허적(許積)을 한번 배척한 일로 인해 윤휴(尹鑴)의 독수(毒手)에 심하게 당해 6년 동안 바닷가에서 고생하다가 겨우 살아서 돌아와 있던 중,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하는 변고가 동문(同門)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죽은 스승은 너무나 분하고 미운 마음에 편지를 보내 절교를 통고하였는데,  담긴 뜻이 매섭도록 엄격하였습니다.  이때문에 윤증의 당이 크게 질시하여 함정에 밀어 넣어 해치려는 손길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옥중에서 고생하다 죽도록 만들었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추탈(追奪)의 재앙이 다시 저승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신들이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사림이 억울해하며 한탄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위의 두《실록》의 내용과《승정원일기》의 내용을 놓고 보면 시각차가
현격하며 그의 행적에 대한 견해가 판이하게 서로 다름을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당시에 정치적으로 숱한 파란을 격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늘날도 역시 이러한 경향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두 경우의 시각에 의한 기록을 인용하여 살펴보았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숙종개수실록(肅宗改修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