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벽(玄尙璧, 1673-1731)

현상벽(玄尙璧)                                                       PDF Download

본관은 연주(延州)이고 자는 언명(彦明)이며 호는 관봉(冠峯)이다. 권상하의 문인으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다.

38세(1710) 스승 권상하에게 편지하여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반박했다.

39세(1711) 권상하에게 편지하여 권상하와 이간의 오상(五常) 문답에 대한 의문을 밝혔다. 〈오상변(五常辨)〉을 지어 권상하, 한원진 등에게 보냈다.

42세(1714) 봄, 윤봉구에게 편지하여 호락논쟁의 논점들을 논했다.

49세(1721) 10월, 권상하의 장례에 참석하러 충주에 다녀온 후 〈소양대질록(昭陽戴絰錄)〉을 지어 장례 과정을 정리했다.

53세(1725, 영조 1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5세(1727) 유일로 천거되어 장릉참봉이 되었다. 당시 함께 채지홍은 빙고별제로 천거되었는데, 사관이 채지홍과 현상벽은 모두 권상하의 문인이라고 밝혀두었다.

이간과 함께 낙론에 속하여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간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동조하면서도 세부 이론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의견을 개진하고 양론의 절충과 화합을 지향하였다.

시에 뛰어났으며 예론에도 정통하였다. 문집에 <관봉문답(冠峯問答)>, <관봉유집(冠峯遺集)>이 있다.

<관봉유집> 2~6은 書(114)이다. 권상하, 정호, 권상유, 김간, 최징후, 윤혼, 한원진, 윤봉구, 채지홍, 등 스승과 사우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1709년 이후 본격화된 인물성동이론의 논쟁과 관련된 내용,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을 환영하는 내용, 1723년의 스승 권상하를 위한 변무소(辨誣疏) 문제, 영조 초 저자와 사우들의 관직 진출 문제, 기타 상례 문답 등을 주제로 지은 편지들이다.

특히 스승 권상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인물성이론을 찬동하는 권상하의 입장을 반박하고, 이간의 오상문목에 대한 권상하의 가르침을 논란하는 내용이 있다. 이간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중용> 주 ‘불편불의(不偏不倚)’의 편의(偏倚)에 대한 의견을 말하기도 하고, <맹자>의 ‘생지위성(生之謂性)’은 기질지성(氣質之性)인지, ‘천명지성(天命之性)’은 인물본연지성(人物本然之性)인지, ‘천명(天命)’의 천 자가 이기를 뜻인지 등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세세히 설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한원진에게 보낸 편지는 ‘생지위성(生之謂性)’의 해석에 관한 의문을 적은 별지 1편이 실려 있다. 한원진의 <남당집(南塘集)>」에 현상벽 편지에 대한 답장, 〈오상변〉을 읽고 보낸 답장 등이 실려 있다. 가장 절친하였던 윤봉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인물성동이론 논점들을 논한 내용이 주로 실려 있다.

권7~9는 잡저 23편으로 대부분 인물성론(人物性論)과 예학(禮學)에 대한 내용이다. 권7은 오상(五常), 심(心)과 기질(氣質), 미발설(未發說) 등 주요 논쟁거리들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한 글이다. 특히 〈오상변(五常辨)〉은 1711년에 지은 저자의 대표작으로 한원진 중심의 인물성이론을 반박하고 여러 문인들이 서로 논의한 결말로써 화합하기를 바란다는 취지로 지어 권상하와 한원진 등에게 보인 글이다. 이에 대한 한원진의 답장이 <남당집>에 실려 있다. 〈심여기질변(心與氣質辨)〉과 〈심여기질동이문답(心與氣質同異問答)〉 또한 한원진의 이론을 비판하며 심과 기질을 분별하여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글이다.

참고문헌

<병계집(屛溪集)>
<연주현시대동보(延州玄氏大同譜)>
<한국문집총간해제: 관봉유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