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학(金承學,1881-1965)


 

김승학(金承學,1881-1965)                                  PDF Download

 

1881(고종 18)∼1965. 독립운동가이다.

관 배천(白川). 자는 우경(愚敬). 호는 희산(希山). 일명 김탁(金鐸)이라고도 불렀다. 평안북도 의주(義州) 출생이다.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24세에 상경해 한성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탐구하였다. 졸업 후 2년간 교육계에 종사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자 서울 종로에서 며칠 동안 반대연설을 하다가 체포되어, 평리원(平理院) 구치감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정미7조약은 1907(융희 1)년 7월 24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조약이 체결된 해가 정미년이었기에 ‘정미7조약’이라고 부르며, 제1차 한일협약과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제3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며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불평등조약임을 알리려 하였다.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일본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 경성에 파견, 한국 측이 을사보호조약을 위반했다고 하여 고종에게 압력을 넣어 퇴위시키고 1907년 7월 20일 덕수궁 중화전에서 고종의 양위식을 강행하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7월 20일 양위식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이어 순종이 즉위하고 4일 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김승학은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강무당(奉天講武堂)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뒤에는 의병투쟁에 가담하였다. 1919년 각계각층의 대표 560여 명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할 때 참여하여 독립단총재부에서 활동하였다.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 국내특파원으로 선발되어 백의범(白義範)․백기준(白基俊)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고 88개소에 달하는 독립단 지단(支團)을 설치, 운영하였다.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의 재무부장의 일을 맡아 무장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처럼 많은 군자금을 모금하고 수백 명의 애국청년을 독립군에 가입시키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1921년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사의 사장이 되어 민족정기를 앙양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였고, 그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세계혁명단체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22년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선전부장에 취임하여 양국간의 친선을 도모하였고,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대표의원의 일을 맡아보았다.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학무부차장이 되어 학무부총장의 직무까지 겸임하였다. 192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의로 참의부참의장(參議府參議長)이 되어 참의부의 재건운동에 힘썼다. 1928년 중국 몽강현(濛江縣)에 무관학교를 설치하고 군인 2백명을 육성했으며, 참의부의 기관지인 정로(正路)도 간행하였다. 정로는 1945년 11월 1일 창간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이다.

그리고 길림(吉林)에서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의 삼부통일대표회의에 참의부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인 홍진(洪震) 등과 협의 끝에 한국독립당과 군민의회(軍民議會)를 조직하였다. 이 회의에서 그는 군민의회의 민사위원과 한국독립당의 최고간부직을 겸하게 되었다. 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중일군경합동대(中日軍警合同隊)에게 붙잡혀 신의주와 평양 등의 감옥에서 5년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중국에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광복 후에 귀국해 한때 당정(黨政)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독립신문사 사장․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부위원장․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건국공로자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1920년부터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참교(參敎)․지교(知敎)․상교(尙敎)․정교(正敎)를 지냈고 대형(大兄)의 호를 받았다.

이처럼 김승학은 여러 계열로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애썼다. 독립신문 주필이었던 이광수가 친일로 변절하면서 독립신문도 휘청거릴 때 이를 맡아 정상화하였으며, 김구선생의 권유로 ⌈독립운동사⌋를 집필하면서 당시 항일에서 친일로 변절한 이들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하여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를 바로잡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묘는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으며 봉분 높이는 1.2m이고 둘레는 10m이다. 선생은 돌아가기 전에 유언을 통해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묻혀있는 국립묘지의 안장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당시 국가보훈처에서 서삼릉 지역의 땅을 제공하여 그곳에 묻히게 된 것이다.

저서로는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또한 김승학은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이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지혈사⌋를 쓸 당시 자료를 수집해 저술을 돕기도 했다. 증손자 김병기는

“당시 박은식과 증조부는 나라 잃은 역사, 피 흘린 투쟁의 역사를 쓰면서 나중에 나라를 찾으면 한국독립사를 쓰자고 약속했다”며 “일제의 추궁을 피해 깊숙이 숨겼던 자료는 백범 김구에게 전해졌다가 다시 증조부에게 전달됐다”

고 말했다. 해당 자료는 1965년 김승학이 쓴 한국 최초의 독립운동사인 ⌈한국독립사⌋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이배용 원장은 “김승학선생은 일제의 고문에도 자료가 어디 있는지 실토하지 않고 잘 보존하였다”라고 하면서 “이번 기탁은 그 정신을 후손에게 길이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배용은 “특히 삼의사 국민장 행사요령 등은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은 귀한 자료이다”라고 하면서 “독립운동사의 지평을 넓히고 후손들이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나침반 역할을 할 것이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1964년 발간한 ⌈한국독립사⌋의 서문에서 이승만이 친일파를 다시 중용하는 일에 대해서

“건국 이래 이 국가 백년대계(독립유공자 표창과 친일파 청산)의 원칙을 소홀히 한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운동자를 박해하던 민족의 반역자를 중용하는 잘못을 범했다”라고 하면서, 이것이 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시정 중 가장 큰 과오이니 후일 지하에 돌아가 수많은 선배와 동지들을 어떻게 대할까 보냐”

라고 토로하였다. 그는

“이 중대한 실정으로 말미암아 이승만은 집정 10년 동안 많은 항일투사의 울분과 애국지사의 비난의 적(敵)이 되었다”

고 평가했다. 친일 세력이 해방 후에도 사회의 주도세력이 되면서 역사학계도 조선 후기 노론과 일제 식민사학을 계승한 학자들이 주도해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국가보훈처, 1997), ⌈3·1독립운동(獨立運動)과 임시정부(臨時政府)의 법통성(法統性)⌋(이현희, 동방도서, 1987), ⌈대한민국임시정부사(大韓民國臨時政府史)⌋(이현희, 집문당, 1982),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198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