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호(兪彦鎬, 1730-1796년)-2


유언호(兪彦鎬, 1730-1796년)-2                       PDF Download

 

유언호는 자는 사경(士京)이고 호는 칙지헌(則止軒)으로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아버지는 우윤 유직기(兪直基)이다. 형이 은일로 이조참의에 천거된 유언집(兪彦鏶, 1714-1783)이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교분이 깊었다.

박지원은 서울 명문가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박필균이고 박지원보다 12세 위의 팔촌 형 박명원(朴明源)은 영조의 사위였다. 영조는 가장 귀여워했던 딸을 박명원에게 시집보냈다. 딸이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위를 총애했다.

 

박지원은 1778년에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금천군 연암골로 숨어들었다.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홍국영의 눈 밖에 났던 게 화근이었다. 박지원을 아꼈던 유언호는 서울을 떠나 있을 것을 권유하였고 박지원은 그의 말대로 연암골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이 바로 박지원의 서재 연암산방(燕岩山房)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아주 길지는 않았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박지원은 죽을 때까지 연암이란 호를 썼다.

그로부터 2년 뒤,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중국에 다녀왔고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쓰게 된다. 이 책이 등장하자 젊은이들은 그의 문체를 따라 썼고 박지원의 명성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유언호의 형 유언집은 자는 사호(士鎬)이고 호는 대재(大齋)로 권상하(權尙夏)·이재(李縡)의 문인이다. 부친 유직기가 『소학』의 「가언」과 「선행」편의 내용을 정리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유언집이 『대동가언선행』을 편집했다. 『대동가언선행』은 아동 교육서이긴 하지만 누구나 본받을만한 훌륭한 일들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은 대체로 『격몽요결(擊蒙要訣)』·『성학집요(聖學輯要)』·『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 등에서 해당 내용을 뽑아 정리하였다.

유언집은 학행이 있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정조 1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1778년(정조 2) 경연관이 되었으며, 1783년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어 원자를 보도(輔導)하였다. 그 뒤 이조참의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1761년(영조 3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 해 한림회권(翰林會圈)에 선발되었다. 이후 주로 사간원 및 홍문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771년에는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이라 공격해 이를 배척하는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을 만들자 권진응(權震應)·김문순(金文淳) 등과 함께 상소해 경상도 남해현에 유배되었다.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에 대한 내용은 ⌈영조실록⌋40년 조에 그 대략이 나온다.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인정전 월대에서 지영하였다.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다. 고금 당론(黨論)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이유에 대해 두루 서술하고 또 어진 사람과 사특한 사람이 진퇴하는 의의에 대해서 언급하였는데, 무릇 1백여 글자가 되었다.

이는 대체로 신경의 상소에 조화시켜 보려는 신하를 배척하여 산림의 선비가 또 하나의 당을 이루고 있다고 여겨 만약 근원을 통렬히 깨뜨리지 않으면 그 해가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를 책자로 만들어 《엄제방유곤록(嚴隄防裕昆錄)》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간행하여 사고에 넣어두라고 명하였다.”

 

유언집은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춘궁관(春宮官)으로서 열심히 보호했으므로 정조 등극 후에는 홍국영(洪國榮)·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지극한 예우를 받았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자신의 이름이 ⌈명의록⌋에 올라 있기도 하다. 본 편찬사업은 정조 1년 3월에 마무리되었는데, 김치인(金致仁) 등이 올린 차자(箚子)에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신 등은 명을 받고 삼가 두려워하여 주야로 편찬하면서 먼저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를 권수(卷首)에 드러내어 그 체단(體段)을 높였고 다음에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의하여 일·월(日月)을 차서(次序)하였으며 사실을 뽑고 문자(文字)를 조절하여 시종(始終)을 다 실었으며 금오(金吾)의 문안(文案)을 참고하여 국정(鞫情)을 다 실었고 간간이 조정의 계사(啓辭)와 소장(疏章)을 실어 국론(國論)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단락(段落)마다 번번이 논단(論斷)을 붙여 옛날 사신(史臣)의 주폄(誅貶)한 뜻을 모방하였습니다. 편집(編輯)한 규모는 한결같이 ⌈천의소감(闡義昭鑑)⌋에 의거하였고 범례(凡例)와 대의(大義)는 모두 예재(睿栽)의 품지(稟旨)를 거쳤습니다. 국(局)을 설치한 지 4개월 만에 비로소 끝마쳤는데 책이 모두 3편(編)입니다. 신 등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봉진(封進)합니다.”

 

그 뒤 이조참의·개성유수·규장각직제학·평안감사를 거쳐, 1787년(정조 11)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경종과 희빈장씨(禧嬪張氏)를 옹호하고 영조를 비판한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이를 신임의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정조의 탕평을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다. 이후 향리에 칩거했다가 1795년 잠시 좌의정으로 지낸 후 다음 해 사망하였다.

 

정조 즉위년에 왕과의 대담에서 김구주·홍봉한 양 척신의 당을 모두 제거하려는 정조의 뜻을 잘 보좌하였다. 또, 영조 때 탕평책 하에서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고 개정한 한림회권법을 회천법(會薦法)으로 되돌리려는 논의에서도 소시법(召試法)의 중요성을 인정해 정조의 청의와 의리를 우선해 조제하는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외유내강의 인물로서 평가된다. 저서로는 ⌈칙지헌집⌋이 있다. 1802년(순조 2)에 김종수와 함께 정조묘(正祖廟)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