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주(任聖周, 1711-17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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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주는 본관은 풍천(豐川)이며 자는 중사(仲思)이고 호는 녹문(鹿門)이다. 충북 청풍(淸風)에서 태어나고 만년에는 공주의 녹문에서 살았다. 조부 임의백(任義伯)은 송시열과 동문이다. 부친은 함흥판관(咸興判官)을 지낸 임적(任適)이며 모친은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호조정랑(戶曹正郎)을 지낸 윤부(尹扶)의 딸이다. 5남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아우인 임정주(任靖周), 임경주(任敬周)와 함께 낙론의 대표자인 이재(李縡)에게 배웠다. 누이 윤지당(允摯堂) 임씨도 여류학자로 유명하다.

3세(1712) 사랑채 벽에다 “임사동임사동(任獅同: 사동은 임성주의 아명이다) 뱃속에 글자 오백 자가 들어있다.[任獅同腹中書五百字入]” 썼다.

16세(1726) 이율곡의 글을 읽고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어 〈자서(自序)〉를 썼다. “열여섯 살 때 율곡의 글을 보고 깨달음이 있었고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합치하는 묘리를 알았으며 큰 뜻을 세웠다.”

17세(1727) 이재의 문하에 나가 수학했다. 임성주가 이재와 20세부터 24세까지 약 5년 동안 함께 질문하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 <한천어록(寒泉語錄)>이다. 학문의 자세와 사서삼경에 대한 부분적 토론과 <심경(心經)>의 칠정(七情)에 관한 견해 등이 실려 있다.

18세(1728) 봄에 부친상을 당하고 19세에 백씨와 함께 모친을 모시고 청주(淸州) 옥화대(玉華臺)로 들어가 학업에 힘썼다.

22세(1733) 모친의 뜻에 따라 형 임명주(任命周)와 함께 사마시에 응시하여, 〈대귀신문(對鬼神問)〉으로 입격하였다. 당시 고관(考官) 조명리(趙明履)가 “큰 선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칭찬했다.

25세(1736) 겨울에 회덕(懷德)의 옥류각(玉溜閣)에서 송문흠(宋文欽) 등과 <대학>을 강했다. 이때의 논의를 〈玉溜講錄〉으로 남겼다.

26세(1737) 겨울에 모친을 모시고 여강(驪江)으로 거처를 옮기고, 여주에 살던 민우수(閔遇洙), 김원행(金元行) 등과 강학하며 도의를 연마했다.

32세(1743) 여강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39세(1750) 처음으로 세자익위사세마를 제수 받고, 41세에는 익위사 시직(侍直)에 올랐고 이듬해 종부시로 자리를 옮겨 종 6품의 주부를 맡았다.

44세(1754) 임실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46세 동생, 47세 형을 잇달아 여의자 사직하고, 48세에 공주 근방의 녹문(鹿門)에 은거하였다. 이 해 겨울에 모친상을 당했다.

49세(1759) 김원행에게 편지하여 이제까지 주장해 오던 낙론의 인물성변이 잘못되었음을 설파하고, 〈녹려잡지(鹿廬雜識)〉를 지어 자신의 바뀐 생각을 기술했다.

58세(1768)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여 임성주 외대(外臺: 도사(都事)의 별칭으로, 도사는 외관직(外官職)으로서 경관직(京官職) 대관(臺官)인 사헌부(司憲府)의 직임을 수행한다는 뜻으로 이 말이 생겼다.)로 추천하였다.

63세(1773) 전주 판관이 되었으나 정사에 서툴다는 이유로 체임(遞任)되어 영천 군수로 옮기고, 이듬해 사도시 첨정과 군자감 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64세(1774) 성천 부사가 되었을 때 문장은 잘하지만 사무에 서툴고 병치레만 한다는 무소(誣疏)로 체직되었다. 장령 경재관(慶再觀)이 아뢰기를, “성천 부사(成川府使) 임성주(任聖周)는 경학은 참으로 잘하지만 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본래부터 잘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지난번 전주로 제수되어서도 대신이 체직을 청하기에 이른 적이 있으니, 그가 사무에 서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지에 간 뒤부터는 관아를 닫아걸고 병치레만하여 고을의 일이 쌓였으니, 파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 일 후에 대사간 이석재(李碩載)가 아뢰기를, “며칠 전 장령 경재관(慶再觀)이 임성주를 논하면서 경학은 잘한다고 하면서 수령의 직책은 맡길 수 없다고 하니,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또 성천은 본래 사무가 많은 고을이 아닌데도 부임한 지 10여 일도 지나지 아니하여 공무를 폐지하는 폐단이 있다는 따위의 말은 모두 여기저기서 주워 모아 나온 것이니, 경재관을 파직하시기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2세(1782) 봄에 온 집안이 여동생 임윤지당(任允摯堂)이 있는 원주(原州)의 산호(山湖)로 이사했다.

78세(1788) 녹문동에서 졸했다.

사후 1845년(헌종 11년) 좌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주청에 따라 대사헌 겸 성균관좨주(大司憲兼成均館祭酒)를 추증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녹문집>은 동생 임정주(任靖周)가 주도하여 녹문 사후 6년인 1794년(정조 18년에 간행하였다. 위의 저작들 가운데 <서연강의(書筵講義)>는 녹문이 경연관의 임무를 수행할 때 강연한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한 책이고, <녹려잡지(鹿廬雜識)>는 녹문이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서 상이론(相異論)으로 관점을 바꾼 뒤 저술한 책이다. 여기에는 성리학의 중심 이기심성론이 들어있다.

<소학>의 본주(本註)는 하씨(何氏)의 집성(集成)으로 나타나 있는데도 읽는 사람들이 살피지 못하여 주자가 쓴 것임을 모르고 있었는데, 임성주가 송문흠과 더불어 고증하고 점검하여 그것을 새롭게 정리하여 세상에 유포시켰다. 주자의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 <소학>의 본주를 여씨본(呂氏本)에 따라, 고경(古經)의 12편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런데 <영락대전(永樂大全)>에는 왕필본(王弼本)과 합쳐서 전의(傳義)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임성주는 후학들이 주자의 참뜻을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주자의 여러 학설을 고증하여 다시 이를 바로잡았다.
<주서차의(朱書箚疑)>는 송시열의 저작이나 그 초고가 아직 손질되지 않았는데, 권상하 등이 미처 수정하여 완성하지 못한 것을 녹문이 손수 <송자대전(宋子大全)>에서 본차(本箚)를 베껴 미비한 내용을 보충하고 미진한 것을 바로잡아 10여 년 동안 공을 들인 끝에 제목을 <차의보(箚疑補)>라고 했다.

참고자료

<녹문집(鹿門集)>
<임성주의 생의 철학>(한길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해제 고전번역서: 녹문집>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