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희(金益熙)


김익희(金益熙)                                                              PDF Download

 

김익희(金益熙, 1610-1656) 조선시대에 대사관,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고위 관리였다. 그는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이며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 맞서 결사 항전한 김익겸(金益兼)의 형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를 반대하고,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가서 전투를 감독하고 독려하는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었다. 평생의 지기인 우암 송시열과 함께, 명나라를 존숭하며 청나라를 배척하자는 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스러운 조선사회를 주자학과 그 명분론으로 재건하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다. 저서로 『창주유고(滄洲遺稿)』가 있다.

1610년(1세)
광해군 2년, 11월 20일(음력)에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洲), 지재(止齋)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버지 김반(金槃)은 송익필의 제자로, 자가 사일(士逸), 호는 허주(虛舟)이다. 문원공 김장생의 둘째 아들이며, 문경공 신독재 김집(金集)의 아우이다. 김반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김익희는 차남이다.

1627년(18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이 시험은 소과(小科) 혹은 감시(監試)라고 불리는 과거시험으로 생원진사시를 말한다. 이 시험에 합격한 자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관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대과를 준비해야하는데 성균관에서 그런 준비를 할 수 있었다.

1633년(24세)
소과에 합격하고 6년만에 문과(增廣文科, 병과)시험에 급제하였다. 처음에 승문원에 들어갔다, 10월에 예문관 사관(史官)인 검열(檢閱, 정9품의 관직)이 되었다.

다음해 12월에 승진하여 예문관의 정7품 관직인 봉교(奉敎)가 되었다.

 

1635년(26세)
7월, 수찬에 임명되었다. 8월경에 재이(災異)를 당하여 상소문을 올렸다. 여기에서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10가지 건의를 하였다.

첫째, 성스러운 뜻을 세울 것. 둘째, 성학(聖學)을 발전시킬 것. 셋째, 무너진 기강을 다시 세울 것. 넷째, 검소한 덕을 밝힐 것. 다섯째, 대신을 공경할 것, 여섯째, 언로를 열 것. 일곱째, 벼슬길을 맑게 할 것. 여덟째, 선비들의 기풍을 바르게 할 것. 아홉째, 백성들의 고통을 돌볼 것. 열째, 군사 업무를 잘 정비할 것.

그리고 그는 이 상소문에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를 건의하였다.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는 이미 1623년(유백증과 이경여), 1625년(해주 진사 오첨 등 40여명), 1635년(송시형 등 270명)에 건의가 있었다. 송시형은 송시열의 사촌 형이다.

이후, 종사관(從事官)으로 관서지방에 다녀왔으며,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초상 복제에 대해 논하였다. 한 때, 감시(監試) 시험관(試官)으로서 일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9월에 수찬, 12월에 부수찬으로 임명되었다.

1636년(27세)
2월, 정언이 되다. 부수찬이 되었다가 다시 정언이 되다. 3월에 청나라와 화의를 주장하는 주화파 우부승지 구봉서에 대해, ‘그가 추잡하고 야비한 일을 많이 행하였고, 국상을 당하였을 때 상복을 입고서 기생을 끼고 있었으며 축첩을 하였다’고 파직을 건의하였으나, 임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해, 5월경에 수찬의 자격으로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상소문을 올렸다.

“쉽게 터지고 또 쉽게 억제하기 어려운 것으로 다른 것보다도 성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내지 않을 일에 성을 내면 그 해가 가장 큽니다. 전하께서 티 없이 순수한 자질로서 마음을 밝게 가지시기에 노력한 지도 꽤 오래 되셨지만 말을 하고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화평한 기상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마음의 원천에 대한 함양 공부가 아직 미진한 점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잘못을 살피고 바로잡아 위아래가 다 허물이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삼사(임금에게 직언하는 세 곳의 관아,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가 해야 할 일인데 삼사는 그것을 모르고 오직 환심을 사려고 알랑거리며 구차스러운 행동만 하니 전하께서 그것을 개탄하시고 때로 그들을 격려하시는 것은 물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역시 전하가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전하의 뜻에 맞춰 주는 것을 좋아하고 거스르면 싫어하시며 부들부들한 것을 좋아하고 과감하거나 예리한 것은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수용하거나 버림으로써 싫고 좋고를 눈에 띄게 나타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각(臺閣, 즉 삼사)의 풍채가 날로 시들해져서 다만 미세한 것이나 지적하고 묵어빠진 것이나 주워모아 그때그때 책임이나 면하려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그 마음 그 자세를 완전 바꾸시고 바른말이면 지성으로 받아들여 언로(言路)를 활짝 열고 갈고 닦고 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성상의 덕화에 도움이 되도록 하십시요.”

임금은 그것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고 특별히 길들인 말을 하사하여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7월에 부수찬, 헌납 등을 거쳐 다시 부수찬이 되었으며, 10월에 수찬, 11월에 교리로 임명되었다.

12월 2일, 청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수도 심양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 장군이 의주 백마산성을 지켰으나 청나라 군대는 길을 피해 서울로 들어왔다.

12월 14일 청나라 군대가 개성을 통과하였다. 궁궐의 일부 군대와 관료들을 강화도로 보내고, 이날 밤에 인조 임금도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고 하였으나 청나라 군대가 이미 길을 막고 있어서 소현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청나라와 화해를 반대하며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던 김익희 역시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督戰)어사가 되어 전투를 독려하였다.

같은 달 16일, 청나라 선봉부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1637년(28세)
1월 1일, 청나라 태종이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도착하여 20만 청나라 군대를 집결시켰다. 남한산성 안에는 임금을 비롯하여 1만 3천명의 군사가 있었으며 50일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다. 명나라에 연락하여 부탁한 구원병이나 의병들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김익희는 당시 대사간이었던 부친 김반 등과 함께 강화를 반대하고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저들에게 꺽이고 말 것이나, 차라리 바른 도리를 지키다가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끝까지 항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고 어머니(徐氏夫人), 동생 김익겸, 그리고 누나가 사망하였다는 비보를 접하였다.

이달 말, 인조는 결국 성에나 나가 항복하였다. 그는 청나라 태종(숭덕제)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三跪九叩頭,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를 올렸다. 청나라와 조약(朝淸和約)이 체결되었으며 청나라에서 인질을 요구했다. 소현세자는 자진해서 인질로 나섰다.

4월 10일경, 소현세자는 부인 강씨와 봉림대군(나중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 효종임) 부부, 그리고 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가서 볼모로 억류되었다.

1639년(30세)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쳤다. 3월에 홍문관 교리, 5월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이조좌랑은 관리 인사권을 가진 중앙의 핵심 관직이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마음의 즐거움이 없어, 겨울에 스스로 외임(外任)을 요청하여, 영광(靈光) 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부친의 병환 때문에 관직을 버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다음해 4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후 큰아버지 김집에게 가 있으면서 지인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학문 공부를 하였다.

1642년(33세)
삼년상을 마고,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 성균관 사성(司成, 종 3품), 군기시(軍器寺) 등을 역임하다.

다음해 사간, 응교, 집의 등에 임명되었다.

 

1644년(35세)
5월에 부응교, 6월에 사간, 7월에 응교에 각각 임명되었다.

8월, 집의가 되어,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그 안에서 어진 인재를 얻을 것, 벼슬길을 밝힐 것, 장물죄를 엄히 할 것, 수령을 골라 임명할 것, 대동법을 시행할 것, 군사 제도를 정비할 것, 제사를 근엄히 할 것, 공도(公道)를 넓힐 것, 도학(道學)을 숭상할 것 등을 제안하였다. 아울러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을 등용할 것을 진언하였다. 이에 임금은 이를 모두 수용하였다.

11월경, 송시열ㆍ송준길 등이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2월에 김익희는 사간에 임명되었다.

이즈음, 김익희는 병조 정랑 성초객(成楚客, 1605-미상)의 문제를 논하여 파직시켰다. 성초객의 자는 봉혜(鳳兮), 호는 이력(履歷),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1633년 증광시에 생원 2등 19위로 합격하였고, 같은 해 증광시에서 병과 15위로 문과 급제한 인물이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어가를 호위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다음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1639년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후에 사간원과 사헌부의 정언과 지평, 헌납(獻納) 등에 임명되어 대간으로 활동하였다. 1645년 초에 병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경솔하고 천박하며 급하게 승진을 도모하였다. 이에 사간원에서 근무하게 된 김익희가 탄핵하여 파직시킨 것이다.

1645년(36세)
2월, 소현세자가 9년만에 귀국했다. 하지만 4월경에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6월에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이 귀환하여, 세자에 책봉되었다.

10월, 세자 책봉과 관련하여 책례도감(冊禮都監, 책봉 의례를 주관하는 임시 기구) 도청(都廳)의 직책을 잘 수행한 공로로 임금으로부터 말을 하사받았다. 다음 달에 사간, 집의에 임명되었다.

1646년(37세)
이해 소현세자 빈 강씨가 인조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모함을 받고 사약으로 사망하고 그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 갔다.

2월, 관직 후보자 추천을 잘못하였다고 대사간 목성선 등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해임되었다.

4월 안익산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반란 주동자들이 잇달아 체포되어 난이 평정되었다.

6월, 임경업 장군이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심문을 받다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이즈음 김익희는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우부승지 등에 임명되었다. 7월에 문사랑청(問事郞廳)으로 안익신 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포상을 받았다.

9월, 과거시험의 시제(試題)에 소현세자빈 강씨를 옹호하는 내용이 들어있어 이에 관여된 시험관 전원이 처벌되었다. 김익희는 이들 중 일부를 용서해주도록 건의하다 처벌을 앞장서서 방해한다는 이유로 파직되다.

 

1647년(38세)
승문원 제조를 겸하게 되었다. 다음해 관직에서 은퇴하고자 태안군수를 자청하여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내 향리로 돌아와 숲속에 집을 짓고 독서를 하며 스스로 즐겼다.

1649년(40세)
인조임금이 이해 5월에 사망하고, 효종이 등극하였다. 김익희는 호서지방(지금의 충청남북도)에서 올라가 대궐에 들어가 곡을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우부승지로 임명되었다.

이즈음 장령으로 있던 송시열이 임금과의 면담을 허락받지 못해 사직하였다. 이에 김익희는 왕명을 따라, 사직하고 떠나는 송시열을 만류하였다. 이일에 대해서 『효종실록』(6월 26일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임금이 ‘내가 병으로 접견하지 못하여 송시열이 갑자기 돌아갈 계획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누가 나를 위하여 그를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평소 송시열과 친한 동부승지 김익희(金益熙)가 성지(聖旨)를 가지고 뒤쫓아가서 타이르겠다고 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기뻐하면서 허락하였다. 송시열은 임금의 뜻이 매우 간절하다는 것을 듣고 돌아와 성 밖에 당도해서 상소하여 사죄하였다. 그러나 디시 또 돌아가기를 강력히 청했다. 임금은 다시 이렇게 분부하였다.

‘현자를 대우하는 나의 마음이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이를 만하다. 평소 존경하여 예우하는 뜻을 스스로 드러낼 방법이 없으니, 승지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를 짓되 나의 지극한 뜻을 효유하여 산림에 있는, 세상에서 높이 뛰어난 선비들로 하여금 조정을 멀리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돌리게 하라.’

그리고 특별히 예조 낭관을 보내 송시열에게 유지(諭旨)를 전하게 하였으나 송시열은 이미 상소하고서 떠나버렸다. 그 상소에 송시열은 이렇게 썼다.

‘슬픔을 절제하여 몸을 보호하고, 예를 강구하여 상사(喪事)에 예를 다하시고, 학문을 밝히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몸을 닦아 집을 가지런히 하고, 아첨하는 신하를 멀리하시고 충직한 신하를 가까이하며, 사사로운 은혜를 억제하여 공도(公道)를 넓히시고, 선임(選任)을 정미롭게 하여 체통을 밝히고, 기강을 진작시켜 풍속을 가다듬으며,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국가의 근본을 견고히 하며, 좋은 스승을 골라 세자를 잘 보호하고 인도하도록 하며, 공안(貢案)을 바르게 하여 백성의 형편을 펴게 하고, 검소한 덕을 숭상하여 사치를 혁신하며, 무비(武備)를 닦아 바깥에서 무시하지 않도록 하십시요.’

임금은 이를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송시열은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예우함이 특별히 융숭했는데 한 번 입대(入對)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관복을 벗어버리고 서둘러 돌아가니, 듣는 이들이 모두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다.”

1650년(41세)
2월 청나라 사신이 갑자기 방문하고, 청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변경에 와서 압박하고 공갈로 협박하였다. 당시 척화파의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던 김익희는 이러한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응하고자 하였으나 별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고 물러났다.

3월 청나라에서 친청파 김자점의 밀고로 조선의 조정내에 척화파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이를 확인하고자 사신을 보냈다. 사신은 ‘왕에게 불충스런 신하가 많다는 말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조사’를 하러 왔으며, 김자점이 쫓겨난 이유에 대해서 묻고 조사하였다.

7월, 김익희는 다시 대사간, 승지 등에 임명되었다.

11월, 청나라 섭정왕 다이곤이 사망하자 조선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이에 척화와 북벌을 주장하던 김익희를 위시한 척화파들이 조정에 나아가 여론을 주도하게 되었다. 12월에 대사간이 되었다.

이즈음 광양에 유배되어 있는 김자점이 역모를 꾀한다는 고발이 접수되어 조사결과 사실로 판명되어 김자점을 사형에 처했다. 인조의 후궁이 조귀인의 오빠 조인필도 함께 처벌하여 궁궐내의 친청파가 완전히 제거되었다.

1651년(42세)
6월, 대사간이 되었다. 8월에 세자책례(世子冊禮) 교명문(敎命文)을 짓고, 그 공로로 말 1필을 하사받았다. 10월, 강원 감사가 되었다.

다음해 홍문관 부제학(정3품 당상관), 이조 참의 등에 임명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대사간, 부제학, 이조 참의, 대사성 등에 임명되었다.

1654년(45세)
효종 5년 1월, 도승지가 되다.

4월, 참찬관 자격으로 효종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현재 『국조보감』은 문종 시대까지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세조시대 부터 선조 시대까지의 사실을 민간에서 간혹 수집해 둔 것이 있으니, 이번 기회에 담당 기관을 설치하고 연속해서 편찬하여 전서(全書)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러한 건의를 받고 임금이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더니, 대신들이 모두 찬성하였다. 그래서 국(局)을 설치하도록 하고 김수항(金壽恒)을 도청(都廳)으로 삼았지만, 결국 완성은 보지 못했다.

5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며 8월에 동지경연을 겸하였다. 10월, 대사간이 되어 대사성을 겸하였다.

이즈음 동지경연으로 국방업무에 대해서 건의하였다. 병사업무에서 한민(閑民)을 없애고 사대부 자제라도 과거 응시에 부족한 자는 군역을 지게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대사헌 자격으로 양병책, 양반 호포 부과 등 치국(治國)의 방략에 대해서 상소문을 올렸다.

1655년(46세)
1월, 대사헌에 임명되어 대제학 채유후 등과 함께 성균관 유생들에게 제술시험을 보게 하였다. 이즈음 대관들이 함부로 사람들을 가두는 처사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2월에 홍문관 부제학, 9월에 대사간, 부제학 등에 다시 임명되었다.

1656년(47세)
효종 7년 1월, 대사헌이 되었다. 대제학, 동지경연을 겸하였다. 이즈음 어머니가 청나라의 침입으로 병자호란 때 사망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사신을 응대하기가 싫었으며 청나라 외교 문서도 대제학이 작성을 하여야 했기 때문에 사직하고자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외교문서는 결국 다른 사람이 대신 작성하고 김익희는 대제학 직을 계속 맡게 되었다.

2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다. 5월에 대사헌을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다. 7월에 사직을 청하여 이조 판서 직에서 물러났다. 8월에는 대제학의 직에서 물러났다.

이해 12월 8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47세였다. 12월 9일자 『효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그의 졸기(卒記)가 실렸다.

“전 이조 판서 김익희(金益熙)가 사망하였다. 김익희는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이고, 김반(金槃)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총명하여 일찍이 재능과 명망을 지녔으며 문사(文詞)를 잘하였는데 소장(疏章)에 아주욱 능하였다. 붓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완성하였고 주대(奏對)할 때마다 경전과 『사기(史記)』를 인용하였으므로 상이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그래서 1년 내에 차례를 뛰어넘어 총재(冢宰)에 임명되고 겸해서 문형(文衡,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가장 높은 벼슬인 대제학)을 맡았었다. 그러나 지론(持論)이 지나치게 준엄하고 성질 또한 급하고 편협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47세이다.”

그의 묘지는 현재 대전 대덕연구단지내 국립중앙과학관 뒤쪽 야산에 가족들의 묘와 함께 조성되어 있다. 묘 앞에는 그의 업적을 기린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짓고 김진규와 김수증이 글씨를 썼다.

그는 현대에 들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인렬왕후의 장례 때에 일개 사서(司書)로서 고례(古禮)를 들어 복제가 잘못되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 일이라던가, 만언소를 올리어 대동법 실시를 강력하게 주청한 일, 병자호란시 피신하는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使)로 활약한 일, 대사헌의 수장으로 있을 때에 동료들이 법을 어기면 이를 용서치 않고 법대로 처리할 만큼 원리원칙에 충실했던 삶의 자세 등은 척화파의 도의사상과 실천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송인창, 2003, 188쪽)

 

<참고자료>

『국조보감』
지두환, 「창주 김익희의 정치활동」, 『한국학논총』37, 2012
송인창, 「창주 김익희의 도의사상」, 『한국사상사학』20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