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즙(高用楫)-1


고용즙(高用楫)-1                                                        PDF Download

1672년(현종 13)∼1735년(영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미상(未詳)이며, 자는 제경(濟卿), 호는 죽봉(竹峯)이다. 임피(臨陂) 술산(戌山)의 죽봉(현재 전북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탑동마을)에서 출생하였으므로 호를 ‘죽봉’이라고 하였다. 죽봉은 창강(滄江)이 앞에 흐르고, 율포(栗浦)가 둘러 있으며, 패향(전주)과 인접해 있는데, 고용즙은 이곳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늙었으며 이곳에서 노래하다 죽었다. 할아버지 고이원(高而遠)과 아버지 고필(高佖)은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고용즙은 탐라국(耽羅國, 제주의 옛 이름) 고을나(高乙那)의 후예로 45대를 군주로, 16대를 신하로 내려온 명문가문이다. 고려에 이르러서는 벼슬이 혁혁하여 문충공(文忠公)과 문영공(文英公) 두 분이 가장 뛰어났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으니 생원인 고견(高堅), 선전관인 고몽진(高夢辰), 통정인 고이원(高而遠) 등은 모두 고용즙의 고조․증조․조부이다. 어머니는 영월 신씨로 신경녕(辛慶寧)의 딸로 어질고 규범이 있었다. 특히 부친은 용모와 언행과 문장이 뛰어났고, 가족이나 사회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고 한다.

광산(光山) 김낙현(金洛鉉)이 지은 행장에 따르면,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슬픔이 무너져서 예에 넘쳤으며, 장사와 제사지내는데 정성을 다하고 친척들과 화목하고 가난을 구휼하였으며, 은혜와 의리 두 가지를 강론하고 도리를 밤낮으로 토의함에 꺼리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친한 사람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이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모두가 존경하였다”

라고 하였다. 또한 평강(平康) 채정억(蔡廷億)의 만장에 따르면,

“문장과 덕행 둘 다 어기지 않으려 노력하였으니, 사람을 보면 반드시 사랑을 베풀고, 글을 대할 때는 밥 먹는 것도 잊었으며, 화락하고 조용한 얼굴은 항상 봄날이었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고향의 유림들과 협의하여 스승인 김집(金集)과 김구(金絿) 등이 배양되어 있는 봉암서원에 사액할 것과, 정읍에 송시열이 배양되어 있는 고암서원을 창건할 것을 소청하였다. 봉암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임금께서는 두 신하의 도학과 덕행을 깊이 살피시어, 후인들이 보고 감동하여 떨쳐 일어나는 바탕이 되게 하여 주소서. 특별히 은액을 하사하시어 서원을 치장하고, 두 신하의 도와 덕을 천하 후세에 더욱 빛나게 하옵소서. 그렇다면 국가에도 퍽 다행하고 사문(유림)에도 퍽 다행한 일이겠나이다.”

이처럼 고용즙은 임피지역에 학문적 영향을 크게 끼친 조속(趙涑)․김구 등과 같은 명유들을 숭상하는데 노력하였고, 노론세력으로서 송시열․김집 문하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학문과 대의를 중시 여겼던 유학자였다. 유고로 「죽봉집」을 남겼다. 「죽봉집」은 고용즙의 시문집이다. 3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고용즙의 6세손인 고동화(高東華)에 의하여 200여년이 지난 1938년에 갈운동의 영모재(永慕齋)에서 간행되었다.

죽봉집」의 편찬 경위에 대해서는 고동화가 「죽봉집」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죽봉이 남긴 주옥같은 글이 책상에 쌓이고 상자에 넘치기에 이르렀으나, 중간에 유실되고 화재를 만나 남은 것이 겨우 금 부스러기나 깃털 조각 같은 약간 뿐이었다. 고동화의 조부인 고천종(高千鍾)께서 좀먹은 문서와 먼지에 쌓인 책을 순서대로 엮어 간행하고자 하였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조부께서 돌아가실 무렵에 손자인 동화에게 ‘너는 마땅히 생각하여 할애비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종형들과 뜻을 모아 자구를 손질하고 교정을 보아 이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

 

「죽봉집」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권1의 「민기부(悶己賦)」는 상중에 쓴 작품으로,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주가 된 고용즙의 심정을 그리고 있다. 부친은 특히 용모․언행․문장이 뛰어났고 가족이나 사회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과거에는 실패하였으나 전원에 뜻을 두어 정자를 짓고 못을 파며 국화와 버들을 심어 은자답게 살아가다가 고용즙이 28세 때인 1699년 9월에 병석에 눕게 되고, 온갖 약에도 효과가 없어 다음 달 10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슬픔이 극에 달하여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고 여러 풍수(風水)를 맞아 묘지를 정하여 다음 해 2월 14일에 안장하는 효자 고용즙의 심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때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글 한 구절을 소개한다.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까. 하늘에 부르짖으니 삼광(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고, 땅을 치니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하고, 가슴을 치니 뼈가 부러지는 듯하며, 눈물을 뿌리니 피가 흐르는 듯하는구나.”

또한 지은 년대를 알 수 없으나 부채의 여덟 가지 덕목을 읊은 「팔덕선부(八德扇賦)」가 있으며, 천지의 운행과 질서에 따라 사람들에게 길일과 흉일을 가려서 때를 살피고 경계할 것을 알리는 「역서부(曆書賦)」가 있다. 또한 호남지방을 다니면서 지명의 이름에 얽힌 의미를 낱낱이 풀이한 「남정부(南征賦)」도 있다.

권2의 ‘흥학당(興學堂序)’에는 선비를 양성하고 학문을 부흥시키는 흥학당의 설립 취지를 고을 군수를 대신하여 지은 것으로써, 여기에서 고용즙은 서당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족한 자금을 빈민 구휼을 위해 비축해 둔 창고의 곡식 일부에서 활용할 것을 제의한다. 「필묵계서(筆墨契書)」에서는 붓과 먹의 서로 도와주고 유익함을 주는 관계를 들어서 이웃이나 친구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비유하고 있다. 「제영지지서(題瀛州誌序)」에서는 제주 고씨가 동방의 유명한 문중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족보가 만들어지지 않음을 지적하고, 후에 고도열(高道說)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고씨의 문중의 자료를 모아 족보를 만들게 되는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봉암서원서(鳳巖書院序)」에서는 봉암서원에 배향된 김집과 김구의 도학의 연원을 그리고 조정에 사액을 청하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이들은 김장생의 근원이고 조광조의 문하에서 덕행을 이었으니 삶에서는 종장이요 국가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초당서(草堂序)」는 고용즙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쓴 말년의 작품인데, 여기서는 저자가 거처하는 초당의 주위환경을 그린 것이다.

또한 「취취당기(就就堂記)」는 죽봉의 동생 고윤경(高潤卿)이 서당을 열고 이름을 청하기에 ‘취취당’이라고 이름 지으니 ‘취취(就就)’는 나아가고 나아가라는 뜻이다. 즉

“배우되 그 넓은 데로 나아가고, 묻되 살피는 데로 나아가고, 변론하되 분명한 데로 나아가고, 행동하되 독실한 데로 나아가고, 아침에도 나아가고 저녁에도 나아가고 어제도 나아가고 또 오늘도 나아가고, 한치 한치 나아가고 자꾸자꾸 나아가서 만개 삼태기의 흙을 쌓아 그 높이를 이루듯 하고, 아홉 길이나 되게 땅을 파서 그 깊이를 이루듯 하라. 그런즉 때때로 익히는 힘을 쓰면 날로 늘어나는 효과를 장차 거둘 것이니 어찌 취취하는 공로가 아니겠는가?”

 

상소문은 주로 경종(景宗)을 지지하던 소론의 주요 인물들을 처단하라는 내용이다. 즉

“신등이 이 애통한 울음과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서 위험을 피하지 아니하고 다시 이렇게 부르짖으며 엎드려 비나이다. 조정에서는 김일경(金一鏡)․유봉휘(柳鳳輝)․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 등 모든 역적들을 속히 나라의 형법으로 바루어 만고의 강상을 잡아주시면 매우 다행함을 이길 수 없겠나이다.”

상소의 내용에는 스승인 송시열과 김집을 사사한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의 유봉휘․이광좌 등이 주장한 세제책봉 및 대리청정의 반대에서부터 신임사화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을 담고 있다. 또 소론 일파가 일으켰던 반란행위를 엄벌에 처할 것을 건의하고 있어, 당쟁이 심화되었던 당시 노론․소론의 갈등과 대립상을 엿보는데 참고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한글판 죽봉시문집「(죽봉시문집편찬위원회, 2016), 「죽봉 고용즙의 南征賦에 대한 고찰」(柳在泳, 「한국언어문학「제22집, 한국언어문학회,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