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익(李顯益: 1678∼1717)


이현익(李顯益: 1678∼1717)                             PDF Download

 

의 자는 중겸(仲謙), 호는 천산재(天山齋)· 낙오헌(樂吾軒)· 정암(正菴)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조부는 이시휘(李時輝)이며 부친은 이홍(李泓)이다.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주부(主簿)인 박선(朴銑)의 딸이다.  그는 반남 박씨(潘南朴氏)인 박태하(朴泰夏)의 딸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그가 활동 했던 조선 후기는 호락논쟁(湖洛論爭)이 한창이었다. 호락논쟁은 노론(老論) 계통의 학자들 사이에서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벌였던 논쟁이다.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한원진(韓元震:1682∼1751)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호서(湖西:지금의충청도일대) 지방에 거주하였고,  사람과 사물의 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이간(李柬:1677∼1727)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낙하(洛下:지금의서울일대) 지방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호서와 낙하의 논쟁’ 이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이현익은 노론에 속하는 유학자로서 송시열(宋時烈:1607∼1689), 김창협(金昌協:1651∼1708),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계통을 이어 예론(禮論) 등 에서도 송시열을 적극 변호하였고 호락논쟁에서도 스승인 김창협을 이어 호론을 지지하였다.

우선 그가 평소에 추구해 온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의 호(號)가 주목된다.  그의 문집인《정암집(正菴集)》7권에는 <정암기(正菴記)>가 실려있는데,  자신의 호를‘ 정암(正菴)’ 이라 지은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람의  한 몸은 마음이 주인이 되니, 이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세상의 모든 법칙이 공허하게 된다. 의(意), 지(志), 식(識) 또한 이 마음속의 물(物)이니 마음이 더욱 바르지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자사(子思)가 말한 존덕성(尊德性) 존덕성(尊德性): 《중용장구(中庸章句)》 27장에 보이는 구절이다. 주자의  주(註)에 의하면, “하늘로부터 받은바른 이치가 덕성(德性)이고, 이를 공경하고 받들어서 지키는 것이 존(尊)이다.”라고 하였다.이며, 맹자(孟子)가 말한 존심양성(存心養性) 존심양성(存心養性): 존양이라고도 한다. 《맹자 》 <진심(盡心)상(上)>에서 “자기의 본심을 간직하고 자신의본성을 기르는 것이 바로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비롯하였다. 여기서 심은 측은·수오·사양·시비의4가지 마음으로 사단이라 하며, 성은 천부의 선한 성을 가리킨다. 존심양성이란 인간의 본심인 사단의 보존을통해 인간이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본성인 인의예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말한 거경(居敬) 거경(居敬):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덕성을 닦음을 이른다.   공부가 이것이다. …중략…

지금 심(心)을 근본으로 삼고 의(意)를 긴요하고 절실하게 하며 지(志)와 식(識)을 입문하는 곳[入門處]으로 삼아서 공부를 하여 매일 새롭게 한다면 몸도 역시 자연스럽게 바르게 될 것이고 언행도 한결같이 바른 데에서 나올 것이니, 이와같이 한다면 성인(聖人)과 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몸이 위주가 되고 의(意)와 지(志)와 식(識)을 포괄하는 심(心)을 바르게하여성인의경지에이르겠다는의지를‘정(正)’이란한글자에담고있으니,이를통해그가평소에무엇을추구해왔는지를충분히짐작할수 있겠다.
그리고 그는 40세의 짧은 삶을 사는 동안 관직(官職) 생활보다는 학행(學行)으로 더 이름이 알려졌으며,  문장(文章) 보다는 경술(經術)에 더 명성이 있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조선왕조실록》영조 34년 11월  6일조의 기록에 보인다.

“지금 강(講)하는 《대학(大學)》은 바로 임진년에 사부(師傅)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공부를 끝내지 못하고 7년 동안 시탕(侍湯)하다가 신축년에 저군(儲君)이 되어서비로소 강을 끝마치게 되었다.” …중략…

또 하교하기를,

“옛날에 이곳에서 내가 가르침을 받은 것은 바로 고인이 된 사부 이현익(李顯益)으로부터였는데, 오늘 일어나는 감회때문에 내 마음이 서글프다. 그 아들을 해조(該曹)에서 특별히 채용하도록 하라.”

영조(英祖)가 동궁시절에 이현익으로부터 《대학(大學)》을 배우던 때를 잊지 않고 그의 자식에게까지 벼슬을 내려주도록 명한 것은 대단한 은전(恩典)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현익이 경술(經術)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호(驪湖) 이양행(金亮行:1715∼1779)이 쓴《정암집(正菴集)》의 서문에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선생이 삼주(三洲)에서 강학 하실 때 따르던 선비가 매우 많았으나,  선생의 설(說)을 독실하게 믿어 목표로 삼고 정성을 다하여 생각하고 혼신을 다해 실천[精思力踐]우뚝 명가(名家)를 이룬 자로는 정암이 최고였다.”

라는 평을 보아도 그의 학문적 성취가 어떠 했는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겠다.  다시 서당(西堂) 이덕수(李德壽:1673∼1744)  이덕수(李德壽): 이덕수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인로(仁老), 호는 벽계(蘗溪) 또는서당(西堂)이다. 참판 징명(徵明)의 아들이며 김창흡과 박세당의 문인이다. 가 남긴 그에 대한 만시(輓詩)를 살펴보기로 한다.  제목은 <이중겸을 애도하는 만시[李仲謙挽]>로 되어 있다.

그대 같이 호학한 이 세상에 누가 있으랴
好學如君世孰方

삼주노자 그댈 보고 승당을 허여하셨네
三洲老子許升堂

분석해온 의리들은 명주실처럼 세밀하고 주자의 화상을 그려놓고 <회암선생 주문공 화상찬(晦庵先生朱文公畵像讚)>을 지었다. 이 화상찬에서 주자의 학문을 기리면서 “현묘하고 은미한 의리는, 누에실과 소털처럼 자세히 분석했네. 마음은 넓고 넓어서,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았네. 호걸스런 재주요, 성현의 학문이었도다. 경성과 상서로운 구름이요, 태산과 교악이셨네.
[義理玄微, 蠶絲牛毛. 心胸恢廓, 海闊天高. 豪傑之才, 聖賢之學. 景星慶雲, 泰山喬嶽.]”라고 찬양한 것에 전거를 둔 표현이다.

柝來義理蚕絲細

강학하던 곳 풍류는 고비 고비(皐比): 범의 가죽. 강석(講席). 옛날에 스승이 앉는 자리에는 반드시 호피(虎皮)를 깔았으므로 강석(講席)을일컫는 말로 쓰인다. 가 향기롭네
講處風流臯比香

백리 밖의 현악 현악(絃樂): 노(魯)나라의 자유(子遊)가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어 예악(禮樂)을 가르치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현(絃)을 뜯으며 노래하였다고 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보인다. 소리 무성마을 재상인지
百里絃歌武城宰

오랜 세월 믿기 힘든 수문랑 수문(脩文): 수문은 전장제도(典章制度), 예악교화(禮樂敎化) 등의 문교를 닦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 되더니만
千秋疑信脩文郞

선유동의 하늘에 뜬 마음 아픈 저 달만이
屳遊洞裡傷心月

밤이 되면 맑은 빛이 옥량 위를 비춰주네
夜夜淸輝滿屋梁  《서당사재(西堂私載)》 1권에 실려 있다.

시의 수련(首聯)에서는 이현익이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김창협이 그의 학문적 성취를 인정하여 준 것을 묘사하였다.  함련(頷聯)에서는 주자(朱子)와  같이 의(義)와 리(理)를 치밀하게 고증하였으며 훌륭한 강의(講義)를 하였다고 했다.  또한 경련(頸聯)에서는 그가 예악(禮樂)을 숭상하였음을 언급하고,  미련(尾聯)에서는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 슬픈 작자의 심정을 달에 투영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생애와 업적·있겠다.

<참고문헌>
이현익, 《정암집(正菴集)》.
이덕수, 《서당사재(西堂私載)》.
전재동, 『正菴李顯益의論語 해석연구』자료소개와 「論語說」분석
을중심으로」,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18,2011.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