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黃璡: 1542~1606)


서담 황 진(黃璡: 1542~1606)                              PDF Download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미(景美), 호는 서담(西潭)이다. 황징(黃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준원(黃浚源)이고, 아버지는 황탕경(黃湯卿)이며, 어머니는 오결(吳潔)의 따님이다.

진사(進士)에 급제한 뒤에 1574년(선조7)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주서(注書), 공조정랑(工曹正郎)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재직하면서, 의주로 몽진해 온 선조(宣祖)를 잘 공양하고 모신 연유로 그 해 8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그 이듬해에 의주목사로서 명나라 원병(援兵)을 접대하는 소임과 병량(兵糧)을 수운(輸運)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다. 그 해 7월에는 공조참판(工曹參判)의 재임 중에 주청사(奏請使)의 신분으로 명나라에 가서 진병(進兵)과 철병(撤兵) 등을 요청한 바 있다.

그리고 11월에는 사은사(謝恩使)로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주청(奏請)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는 국경에서 배회하다가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러 임의대로 사행(使行)길을 바꾸어 용천(龍川)에서 머물렀다. 그러던 중 조정의 독촉을 받고 경략지(經略地)에 도착함으로써, 명나라 원병이 늦게 파병되는 실책을 범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하여 잠시 문책을 받았으나 1594년 6월에 다시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전주수비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1595년에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또다시 명나라 원병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었다.

그 뒤에 1599년에는 행호군(行護軍)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정헌(正憲)으로 승계한 뒤에 부호군(副護軍), 형조판서(刑曹判書), 공조판서(工曹判書), 우참찬(右參贊),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인망(人望)은 다소 부족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에 선조가 의주(義州)로 몽진하였을 때 극진히 대접했다는 것 때문에, 중대한 실책이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력(官歷)은 비교적 평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임진왜란 당시에 대명관계(對明關係)에서 전반적으로 활약이 컸다는 일반적인 평가를 받는다. 평안도 안주(安州)와 의주의 선위사(宣慰使)로 재임할 때 지은 38수의 시(詩)가 수록된 《서담공서정록(西潭公西征錄)》이 후세에 전해오고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네이버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