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전(申翊全, 1605-1660) –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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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전은 자가 여만(汝萬)이고 호는 동강(東江)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증조부는 우참찬 신영(申瑛)이고, 조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다. 부친은 영의정 신흠(申欽, 1566-1628)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신흠은 1586년 승사랑(承仕郎)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

고 하였다.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黨與)라는 배척을 받아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23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다.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오른 후 죽었다.

벼슬에 나가서는 서인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 바른 종통)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 月沙 이정구, 象村 신흠, 谿谷 장유, 澤堂 이식을 일컬음)으로 칭송되었다.

공은 1628년(인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郎)이 되고, 이어 검열·정언·지평 등을 지냈다. 163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부응교·사인(舍人)·사간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1639년에는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때 상사(上使)인 상국(相國) 최명길(崔鳴吉)과 기자묘(箕子廟)에 들러 제사를 지내면서 크게 강개하여 기휘(忌諱)하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후 이때 한 말이 명나라를 부지하려 했다는 것이라는 이계(李煃)의 고변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

인조 19년(1641) 이계(李煃)가 선성부사(宣川府使)로 있을 때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의주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청나라 장군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을 받고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최명길(崔鳴吉), 이경여(李敬輿), 신익성(申翊聖), 신익전(申翊全), 이명한(李明漢) 등이 명나라와 밀통한다고 무고했다.

신익전을 엮을 적에 최명길과 기자묘에서 기휘를 언급한 것으로 했다. 또한 공의 나이 52세 때인 효종 7년(1656)에는 청나라에서 사신이 나와 다시 이 일을 사문(査問)하자, 체직되어 청나라 사신이 머무는 곳에서 심문에 답해야 했다.

공의 나이 47세가 되던 효종 2년(1651)에 사위인 숭선군과 그의 조카 신면(申冕)이 김자점(金自點)의 옥(獄)과 조귀인(趙貴人)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었으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논자들이

“이때에 능히 충신으로서 스스로를 보전한 이로는, 공이 충익공(忠翼公) 이시백(李時白)과 함께 아름다움을 나란히 할 수 있다.”

하였다. 이시백은 그의 아우 이시방이 김자점과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았다.
박세채는 「신도비명」에서

“만일 쉬움과 어려움을 따진다면 또 분별할 바가 있으니, 이는 어찌 공이 평소에 겸공(謙恭)하고 근확(謹確)했던 증험이 아니겠는가? 아! 훌륭하도다.”

라고 했다.

이어서 신익전이 “염정(恬靜)을 숭상함에 뜻을 두어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왕실(王室)과 인척 관계를 맺기에 미쳐서는 더욱 삼가하여, 비록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으면서도 담담하기가 마치 초야(草野)에 거처하고 공허(空虛)한 데로 도피하는 것 같았으며, 기미(幾微)를 보고 간략함을 지켜 한결같이 옛 전적(典籍)에 종사하였으므로, 무릇 속세의 현회(顯晦)ㆍ장부(藏否)는 족히 그의 마음을 얽매지 못하였다.”라고 평했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년 조에 신익전의 졸기가 적혀있다.

“전 참판 신익전(申翊全)이 죽었다. 익전은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집안 대대로 유아(儒雅)했는데, 익전 역시 문사(文辭)에 뛰어났다. 사람됨이 순박하고 겸허하였으며, 명가(名家)의 자제로 화현직(華顯職)을 역임하였는데, 권요(權要)의 직책에 당하게 되면 사양하며 피하고 처하지 않았다. 형의 아들 신면(申冕)이 권력을 좋아하여 패거리를 끌어 모으자 마음속으로 매우 싫어하며 늘 이 점을 자제들에게 경계시켰다.

신면이 이미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고 딸이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시집갔어도 화복(禍福)의 갈림길에서 전혀 오염을 받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고들 인정하였다. 만년에 더욱 염정(恬靜)한 생활로 일관하며 세상일에 참여하지 않고 끝까지 아름다운 이름을 간직하다가 죽었다.”

 

<참고문헌>
『현종실록』
『효종실록』
『국조인물고』
윤재환, 「東江 申翊全의 詩文學 硏究 : 戰亂 經驗의 詩的 對應 樣相 檢討」,「동양학」 제56집, 2014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