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집(金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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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金集, 1574∼1656)은 형조 참판을 지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아들로 부여 현감,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한 조선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이황, 이이, 송시열 등과 함께 문묘와 종사에 동시에 모셔진 학자이며 부친의 예학을 계승하고 보완하여 더욱 체계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선조, 광해군 시대에 서인의 지도자였으며 인조 시대에는 서인과 산림 세력의 중추로 활동하였다. 소현세자의 복권운동을 하였으며 북벌론을 제창하고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박세채 등을 배출하였다. 율곡 이이의 사위이기도 하다.

1574년(1세)
선조 7년 6월 6일(음력, 이하 별도 언급이 없는 날짜는 모두 음력임), 서울 황화방(皇華坊) 정릉동제(貞陵洞第, 지금의 중구 정동) 집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본관은 광산(光州 光山)이다. 할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金繼輝)이며, 부친은 형조참판을 지낸 김장생(金長生)이다. 모친은 창녕조씨(昌寧曺氏) 조대건(曺大乾)의 딸이다.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581년(8세)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과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송상현은 부친 김장생의 친구이며, 송익필은 부친의 스승이다. 송상현은 이후 주로 지방에 가 있거나 외국에 나간 기간이 많고 임진왜란 때에는 동래부사로 임명되었다가 현지에서 전사를 하였다. 송익필은 나중에 집안 가문의 문제로 도망을 다니는 신세가 되어 김집은 이들에게서 장기적인 교육은 받지못했다.

1585년 경 부터는 우계 성혼의 문하에 출입을 하여, 성리학을 배웠다.

 

1586년(13세)
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정성을 다해 초상을 치루면서 잠시 병을 얻었다. 이에 부친 김장생은 김집이 ‘예를 너무 곧게 행하다가 병을 얻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을 하였다.

1591년(18세)
이해 봄에 진사시(進士試)에 2등으로 합격했다. 이즈음부터 부친을 모시고 가정에서 성리학 공부를 하였으며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후 임진왜란, 당쟁 등 세상의 변고를 여러 번 목격하고 벼슬에 대한 욕심을 갖지 않아, 대과에 큰 뜻을 두지 않았다.

1592년(19세)
봄, 좌의정을 지낸 기계 유씨(杞溪兪氏) 유홍(兪泓)의 딸과 결혼하였다. 정실인 유씨 부인에게 병이 있어 자손을 얻지 못하였는데, 나중에 율곡 이이의 서녀를 측실로 들였다. 4월 경(4월 13일, 양력으로 5월 2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부친 김장생이 현감으로 근무하던 정산(定山)으로 피난하였다. 이때 형과 형수, 조카가 왜군에게 살해당했는데, 이 때문에 김집은 집안의 장남 역할을 하였다.

1593년(20세)
이해 8월(음력) 명나라가 일본군에게 휴전협상을 제안하여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다음해 그는 파산(坡山)으로 가서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년∼1598년)을 만났다.

1596년(23세)
측실(側室, 副室)로 율곡 이이(李珥)의 서녀(庶女) 덕수 이씨(德水李氏)를 들였다. 이 부인과는 2남 2녀를 낳았다. 그동안 가족과 함께 전란을 피해 있다가, 다음해 4월경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9년(26세)
구봉(龜峯) 송익필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다음해 광해군이 등극하였다.

1610년(37세)
성균관 유생들의 추천으로 헌능(獻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 당시는 광해군이 권력을 잡고 있던 시기로 북인들이 득세하였다.

1613년(40세)
5월, 철원(鐵原)부사에 임명된 부친을 모시고 임지로 갔다. 이 때 북인세력에 의해 아버지가 근거 없는 모함으로 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계축癸丑 옥사사건) 서울로 왔다가 연산(連山, 지금의 논산)으로 돌아갔다. 부친은 다행히 혐의가 없어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김집은 ‘천지는 암흑세계로 접어들고 윤리는 두절되어, 종적을 숨기고 뜻을 기르면서 평생을 마무리할 생각을 하였다.’(송준길의 「愼獨齋諡狀」) 이후 10여 년간 부친을 모시고 성리학 연구에 침잠하였다.

1622년(49세)
12월, 정실 유씨 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다시 정실부인을 얻을 것을 권하였다. 김집은 이에 “사람이 각각 운명이 있는 법인데, 운명이 좋지 않아서 먼저 사람과 평생 동안 고행을 하였는데, 이제 다시 장가를 든다고 해서 꼭 먼저 사람보다 났겠습니까?”하고, 정실부인을 다시 들이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전념을 하였다.

1623년(50세)
이해 인조가 반정으로 등극하였다. 이로써 그는 부친과 함께 신변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새로 집권하게 된 서인의 집권세력은 부친 김장생의 동문이나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3월, 조정에 천거되었다. 다음 달,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곧 6품관에 임명되었으며, 5월, 부여 현감(縣監)에 임명되었다. 김집의 첫 관직이었다.

1627년(54세)
7월, 병으로 부여현감을 사직하였다. 다음해 11월, 임피(臨陂, 지금의 군산시)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그 다음 해 7월에 그만두고 연산으로 돌아갔다.

1630년(57세)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위솔(衛率), 전라(全羅) 도사(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부친이 이미 연로하여 그는 벼슬보다 부친의 봉양에 더 마음을 두었다.

1631년(58세)
부친의 병환이 위독해졌다. 김집은 나이가 이미 쇠로하였으나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음식을 들지 않으며 간호하였다. 그러나 이해 8월, 부친 김장생이 향년 84세로 사망하였다. 곡을 한 뒤, 문 밖에 여막을 설치하고 거적자리를 깔고 잤다. 이후 3개월 동안 죽을 먹고, 조석으로 식사를 올렸으며 상례와 관련된 모든 일을 손수 직접 주관하였다. 이후 3년간 상복을 입고 시묘살이를 했다.

나중에 제자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은 당시 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모든 규범을 준수하여 날마다 관대(冠帶)를 정제하고 새벽에 가묘(家廟)를 찾아가 뵙고, 다음에 서실(書室)로 가서 책상을 대하여 글을 보며 온종일 꿇어앉아 있어도 어깨와 등이 높고 곧았다. 사람을 접대할 때는 넘쳐흐르는 화목한 기운이 흐뭇하게 했으며, 상스런 말은 입에 내지 않고 태만한 기색은 몸에 나타나지 않았다”(『동춘당집(同春堂集)』)

1634년(61세)
선공감(繕工監) 첨정(僉正), 지평(持平)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둔암(遯巖)서원이 설립되어 부친 김장생(金長生)이 배향되었다. 김집은 1658년에 배향되었다.

1636년(63세)
5월,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이후 종친부(宗親府) 전첨(典籤)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사집의소(辭執義疏)」를 조정에 올렸다.

1639년(66세)
5월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임명되었다. 경연에 참석하여 인조 임금에게 『시경(詩經)·상유편(桑柔篇)』을 강의하였다. 이 때 임금에게 올린 말(「經筵奏辭」)이 『신독재유고』권4에 실려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주의 한 마음은 만 가지 변화의 근원입니다. 근본을 맑게 하고 그 발(發)하는 바를 잘 살펴서 반드시 도심(道心)이 주장이 되게 하며, 인심(人心)이 항상 도심의 명령을 듣게 하면 천리가 유행하고 모든 사물이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다스리는 마음에는 경(敬)이 중요한 것이고 위정(爲政)에는 성(誠)이 귀한 것입니다.”

6월에 교체되어 다른 직책을 맡았으나 곧 연산으로 돌아왔다. 12월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다음해 부호군(副護軍), 우부승지 등에 임명되었다가 교체되었다.

이즈음 그는 자신의 호를 ‘신독재(愼獨齋)’라 하였다.

그는 ‘학문하는 요점은 언행(言行)이 서로 돌아보고, 유현(幽顯, 그윽하고 나타남)이 일치하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남송 채원정(蔡元定, 1135∼1198)의 ‘혼자 행동을 하더라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獨行不愧影), 혼자 자더라도 이불에 부끄럽지 않다(獨寢不愧衾)’라는 문장을 좋아하였다.

1643년(70세)
봄에 부친의 저서 『의례문해(疑禮問解)』를 교정하였다. 이어서 부친의 저서를 보완하여 자신의 저서 『의례문해속』을 완성하였다.

여름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해, 제자인 송준길로 부터 다음과 같은 서신을 받았다.

“간이(簡易, 최립崔岦)의 『구결(口訣)』은 돌려드리고자 한 지 오래입니다만, 병으로 인해 직접 베끼지 못하다 보니 아직 다 베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분부를 받았으니 다시 서둘러 베낀다면 수일 안에 다 베낄 수 있을 것입니다. 베끼는 작업이 끝나는 대로 즉시 사람을 시켜 돌려드릴 생각입니다. 병중에 가끔 『주역(周易)』을 열람하고 있으나 의심스러운 곳이 많았는데, 『주역』을 읽으라고 하신 이 편지를 받으니, 깨닫고 계발되는 점이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으니 한탄만 나올 뿐입니다. 『석담고(石潭稿』(율곡의 유고遺稿)는 산재(山齋)에 갖다 두었는데, 며칠 안에 찾아다가 돌려드릴 생각입니다.”(『동춘당집(同春堂集)』)

1644년(71세)
공조 참의,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제자 송준길로부터 다음과 같은 글을 받았다.

“얼마 전에 돌아오는 인편에 주신 답장을 받아, 비석의 일로 과로하신 나머지 몸이 많이 수척해지셨다는 것을 살피고는 자못 염려되었습니다. 비록 불러 주지는 않으셨지만 마음은 그곳에 가 있은 지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을 날씨가 서늘해진 뒤로 풍증(風症)이 더해져서, 왼쪽으로 입이 돌아가는 병과 몸의 한쪽을 못 쓰게 되어서 근심으로 날을 보내고 있다 보니 달려갈 수 없는 신세가 지극히 가엾고도 서럽습니다.”(『동춘당집』제10권)

 

1645년(72세)

10월, 동궁(東宮, 세자가 거처하는 궁궐) 보도(輔導, 도와서 올바른 곳으로 안내하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몇 차례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반려되었다.

1648년(75세)
여름, 우계(牛溪) 성혼의 연보를 교정하였다. 12월에 부친이 지은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다시 간행하였다. 이후 학문 연구에 전념하여 송시열, 윤선거 등과 함께 태극설, 상례 등을 논하였다.

1649년(76세)
5월,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등극하였다. 이해에 가선대부 예조 참판, 공조 참판,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해에 「봉사(封事)」,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 『소학(小學)』」의 주석 등을 올렸다. 특히, 「고금상례이동의」에서 그는 『국조오례의』가 문제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보았는데, 오류가 많고 빠진 것도 대단히 많다고 보고, ‘왕조례(王朝禮)’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가을에 대사헌 자격으로 주강(晝講, 낮에 하는 강연회)에 참석하여 『중용 』서문을 강의하였다.

11월에 관직을 사임하고 연산으로 돌아갔다. 이즈음 김상헌 등과 함께 북벌론을 제창하여 청나라 만주족을 칠 것을 주장했다. 병력을 양성하고 공신들의 지나친 특권을 줄이도록 건의하였는데, 이 때문에 인조를 도와 반정에 성공한 공신들의 반감을 샀다.

1650년(77세)
다시 상경하여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동법(大同法)과 인사권 문제로 조정 내에서 불화가 있어 곧 상소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동법 시행과 관련하여 그는 반대를 하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우선 근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 급하다고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건의를 하였다.

“대동법은 백성을 편하게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의도가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단지 정치의 요체가 서지 않고서 어찌 작은 세목에 대한 일을 먼저 행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법을 졸속하게 행하여 먼저 민심을 잃게 된다면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해 4월, 송시열에게 답한 편지에서 국상(國祥) 변복(變服)의 제도를 논하였다.

 

1652년(79세)
4월, 이조 판서가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후, 정헌대부(正憲大夫), 숭정대부(崇政大夫), 조참찬(左參贊), 판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사양하였다.

이즈음 권세를 잃은 김자점(金自點)에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계획을 밀고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집은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북벌 계획의 영수로 지목을 받았으나 이미 그는 야인이 되어 낙향을 한 상태였고, 조정에서 잘 대응을 하여 사태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1655년(82세)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11권을 하사받았다. 임명된 관직을 사양하는 상소문(「辭判中樞府事第三疏」)을 올렸다.

1656년(83세)
윤 5월 13일에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임금과 왕세자가 측근들에게 제물과 제문을 보내 제사를 지내주었다. 송준길(宋浚吉)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송준길은 또 다음과 같은 제문을 지어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아, 슬픕니다. 3월 그믐께 제가 호상(濠上)에 있을 때 선생님의 신상에 불길한 일이 있는 꿈을 꾸고는 놀라 일어나서 달려가 문안드렸지요. 그때 선생님께서는 이미 병을 앓고 계셨지만 정신이 쇠하지 않으시어 즐겁게 담소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름에 재차 가서 문안드릴 때에는 병이 이미 깊어 의원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한스러운 바는 평일에 그대들과 함께 산수(山水) 사이를 유람하지 못한 것이다. 하늘의 도움으로 병이 조금 나으면 내가 고운사로 가려 하니, 그대도 그때 와서 함께 갔으면 한다.”라고 하시며, 마치 중추(仲秋)로 시기를 정하시는 듯 하셨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 선생께서 사망을 예시(預示)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꿈에 나타나는 길흉의 조짐과 어떤 일에 앞서 나타나는 조짐은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어서 인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바가 아니고 보면 후사자(後死者)는 애통함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도 오래될수록 더욱 애통함을 그칠 수 없는 것은, 진실로 사문의 애통으로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음이 있고, 개인의 애통으로는 또 옛사람이 이른바 ‘무궁한 생각’이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으니 제가 어찌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상하여 지극히 애통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전에는 동기처럼 가엾게 여겨 끊임없이 돌보아 주시더니, 지금은 무엇 때문에 모른 체하고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고 불러도 듣지 않으십니까. 아, 애통합니다. …… 아, 인생이 길어 보아야 백 년이니 누군들 죽지 않겠습니까만, 죽어도 그 명성이 썩지 않고 영원히 전해진다면 누가 그를 죽었다고 하겠습니까? (이하 생략)”

1659년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 송시열(宋時烈)이 문장으로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1710년에 유고집(『愼獨齋先生遺稿』) 15권 7책이 간행되었다.

1658년에 연산(連山)의 둔암서원(遯巖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이후에 임피(臨陂)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沃川)의 창주서원(滄洲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1883년 고종 20년에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참고자료>

『愼獨齋先生遺稿』, 『同春堂集』

김경희, 「김집」, <한국고전종합DB>

한기범, 『沙溪 金長生과 愼獨齋 金集의 禮學思想 硏究』, 충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