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신(黃愼, 1560-1617)


 

황신(黃愼, 1560-1617)                                            PDF Download

 

황신(黃愼, 1562-1617)의 초상화
황신(黃愼, 1562-1617)의 초상화
신(黃愼, 1560-161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진주부사(陳奏副使), 공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명나라를 왕래하면서 외교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계축옥사가 일어난 뒤에 황해도 옹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1560년(1세, 명종 15)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공조판서 황형(黃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황원(黃瑗)이고, 아버지는 정랑 황대수(黃大受)이며, 어머니는 곽회영(郭懷英)의 딸이다.
황신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582년(23세, 선조 15)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다음해 성혼(成渾)의 문하에 들어갔다.

1588년(29세, 선조 21)에 알성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파직되었으나 바로 성균관 학관으로 차출되었으며, 이어서 호조 좌랑이 되었다.

1589년(30세, 선조 22), 임금에게 간하는 일을 담당한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에 대동계를 조직하여 반란을 꾀했다고 의심받은 정여립(鄭汝立)을 김제군수로 추천한 이산해(李山海)를 추궁하였다. 이산해는 동인이었다가 나중에 북인의 당수가 된 인물인데 황신은 서인 쪽에 가까웠다. 또 황신은 정여립의 옥사에 대해 직언하지 않는 대신을 논박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듬 해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91년(32세, 선조 24)에 왕세자 책봉 문자가 일어나자 정철(鄭澈) 일파로 몰려 파직을 당하였다. 정철은 서인의 리더 중 한사람이었다. 강화도의 마을로 퇴거하였다.
1592년(33세, 선조 25), 여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다시 조정으로 불려와 사서, 병조좌랑, 정언 등을 지냈다. 그 다음 해 지평으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접대하였다. 당시 송응창이 임금에게 학문이 높은 선비들을 맞이하여 함께 강학(講學)하자고 요청하였는데, 황신이 선택되었다. 송응창은 육구연(陸九淵)과 양명학만을 주장하자 황신이 대학강어(大學講語)를 지어 정주학(程朱學)을 논의하도록 하였다. 그 뒤 세자였던 광해군이 군대를 위무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내려갈 때에 체찰사 종사관이 되어 광해군을 수행하였다. 뒤에 병조정랑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이 해에 명나라에서 일본과 화친하려고 작정하고 우리나라에 화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황신은 “왜놈들은 우리와는 하늘을 함께할 수 없는 원수이다. 차라리 나라와 함께 죽을지언정 의리상 화친을 말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한번은 왜군의 병영에서 잔치를 베풀어 명나라 사신을 초청하였다. 황신도 같이 갔었는데, 왜군 장수가 황신을 왜나라 승려의 아랫자리에 앉히려고 하자, 황신은 그대로 서서 앉지 않았다. 결국 왜나라 장수가 포기하였는데, 선조는 이 이야기를 듣고 특별한 포상을 내렸다.

1596년(37세, 선조 29)에 변방 백성들을 위무하는 방법을 제안하여 절충장군이 되었다. 통신사로 명나라 사신 양방형(楊邦亨)과 심유경(沈惟敬)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다녀와서 선조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이 일부 이렇게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선조 : 중국 사신과 우리나라 통신사를 일본의 관백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모두 죽이려고 하였다는데 과연 그랬는가?
황신 : 저희 일행을 죽일 뜻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역관 박대근이 저에게 와서 “관백이 우리 일행을 모조리 죽이고 책사까지도 쫓아내려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의 세 봉행(奉行, 고급관료)이 “예로부터 사신을 죽이는 나라는 없었다.(중략)”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의 풍신수길이 조선과 명나라 사신을 모두 죽이려고 한 것은 강화협상에 나선 중국 측과 일본 측의 대표들이 거짓말을 하였다는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1597년(38세, 선조 30) 7월에 전라감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남원의 복구에 공을 세워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해 8월에 일본군이 화친회담의 결렬을 핑계로 다시 조선을 침공하였다.(정유재란) 황신은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에서 왜군을 포위하였다가 그들이 퇴각하자 돌아왔다. 다음해 스승 성혼(成渾, 1535-1598)이 사망하였다.

1599년(40세, 선조 32)에 공조 참판, 호조 참판이 되었다. 모친상을 당했다. 이후 공조·호조의 참판, 한성부우윤·대사간 등으로 승진하여 인재등용과 기강확립 등을 골자로 하는 12조의 시무차자(時務箚子)를 올렸다.
1601년(42세, 선조 34) 10월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은 문경호(文景虎)가 스승인 성혼을 비난하자 이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어 강화도로 돌아갔다. 이때 선조는 성혼과 정철에 대해서 “간사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싫어했기 때문에 성혼을 두둔한 황신을 파직한 것이다.

1602년(43세, 선조 35), 사은사(謝恩使)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도중에  대북파 정인홍에 의해 자신의 관직이 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인홍은 황신이 파직한 대사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605년(46세, 선조 38)에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되어 호성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607년(48세, 선조 40)에 복관(復官, 관직에 복귀)이 되었으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시행하지 않아 부여로 내려가서 살았다. 다음해 선조가 사망하여 궁궐에 들어가 조문을 하고 곡을 하였다.

1609년(50세, 광해군 1)에 다음해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스승 성혼이 아직 죄인으로 되어 있다는 이유로 사직하였다. 하지만 사신(陳奏副使)으로 차출되어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광해군의 책봉(策封)을 청하였다. 귀국하여 북쪽 오랑캐, 즉 여진족의 움직임이 걱정된다고 보고하고 방어책을 세울 것을 청원하였다. 이후 공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상소하여 스승 성혼의 무고함을 호소하였다.

1612년(53세, 광해군 4)에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을 모시고 따른 공로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613년(54세, 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정협(鄭浹)의 무고로 쫓겨나 유배되었다. 계축옥사란, 대북파 관료들이 영창대군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자 꾸민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비롯한 서인 세력과 남인 세력이 대부분 몰락하고 대북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황신도 그 와중에 유배된 것이다.
광해군 일기 5년 10월 4일 기록에는 황신과 이이첨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황신은 본래 명망이 있었다. 임진년 난리 때 궁궐의 각료로 왕(광해군)이 감무(監撫)하는 것을 보좌하여 성실과 근면으로 왕의 인정을 받았다. 왕이 즉위한 뒤에는 또 주청사(奏請使)로 가서 책봉을 허락받은 공로로 지위가 상경(上卿)에 이르렀다. 호조판서가 되어서 5년 동안 청렴한 일처리로 공적이 있었으므로 상하가 모두 믿고 의지하였다. 황신이 이이첨과는 젊어서 서로 친했는데, 함께 조정에 선 뒤에 황신이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이조와 병조의 관원에게 사적으로 말하였다. 이이첨이 그 말을 듣고는 원망하고 노여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틈을 타 죄를 얽어 공격하고 탄핵하기를 매우 심하게 하였다. 또 친한 사람을 보내 황신을 꼬이기를 “그대는 비록 나를 저버렸지만, 나는 그대를 저버릴 수 없다. 상께서 자주 나에게 황신이 실제로 죄가 있느냐 없느냐 물으시니, 이것은 실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다. 그대가 지금부터라도 나와 일을 함께 할 것 같으면, 내가 마땅히 상께 아뢰어 해명해 주겠다. 이렇게 한다면 처벌도 면할 것이고, 관작도 그대로 지닐 것이다.”라고 하니, 황신이 사양하기를 “친구를 구해주려는 생각에 크게 신세를 졌네. 그러나 몸이 죽을 죄에 빠졌으니 어찌 감히 다시 세상일에 뜻을 두겠으며, 또 그것을 바라는 말을 하겠는가. 이익을 도모하여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친구인 자네도 역시 천하게 여길 것일세.”라고 하였다. 이이첨이 크게 노하여 드디어 절교하고 죄를 더욱 급하게 논박하였으나, 황신은 왕의 보호에 힘입어 멀리 귀양가는 것을 모면하였다.

1617년(58세, 광해군 9)에 황해도 옹진(翁津)의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양주(楊州)의 서산(西山)에 안장되었다. 후에 인조가 즉위하자 1623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가 1629년에 문민(文敏)의 시호를 받았다. 공주의 창강서원(滄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막부삼사수창록(幕府三使酬唱錄)⌋, ⌈추포집⌋, ⌈대학강어⌋ 등이 있다.
송시열은 황신의 비명에 이렇게 적었다.

공은 관직에 임하여 일을 처리할 때, 이해관계나 화복(禍福)에 일체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처음에 (대북세력의 지도자로 가짜 역모사건을 조작하여 계축옥사를 주도한) 이이첨(李爾瞻)의 명성이 자자하였을 때 공은 그의 속셈을 환히 짐작한 터라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또 그의 청선(淸選)을 저지시켰으므로 자제들이 위태롭게 여겨 공에게 그의 노여움을 어느 정도 풀어 주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았다. 계축년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이이첨이 친한 사람을 보내어 공을 달래고 위협하였으나 공은 “나는 죽고 사는 것 따위는 이미 도외시한 바이다.”라고 하였으므로, 흉악한 무리들이 모두 이를 갈아 가장 혹심한 화를 당하게 되었으나 공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