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석(李僖錫, 1804-1889)


 

이희석(李僖錫, 1804-1889)                                  PDF Download

 

희석(李僖錫, 1804-1889)은 전라도 장흥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수많은 한문 고전을 섭렵하고 기정진의 문하에서 성리학 공부를 했다. 젊어서는 과거 합격의 기회를 놓쳤는데, 77세(1880) 되던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특별히 우로(優老, 덕이 고상한 노인)의 대우를 하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수여하였다.

1804(1세, 순조 4) 5월 15일 전라남도 장흥(長興)에서 이중즙(李重楫)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평강 채씨(平康蔡氏) 채석후(蔡錫垕)의 딸이다. 이희석의 자는 효일(孝一)이고, 호는 남파(南坡)이며,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원래 이희석의 집안은 인천에 거주하였으나 1550년경에 율정공(栗亭公) 이두우(李斗宇) 때에 장흥으로 내려왔다.

1814(11세, 순조 14). 이 무렵 그는 이미 수많은 한문 고전을 섭렵하였다. 특히 사서오경(⌈논어⌋․⌈맹자⌋․⌈대학⌋․⌈중용⌋․⌈시경⌋․⌈서경⌋․⌈역경⌋․⌈춘주⌋․⌈예기⌋)은 주석도 암기할 정도가 되었다.

그 뒤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공부했다. 이희석의 나이는 기정진보다 6살이나 어렸으나 기정진은 그를 친구로 대하였다. 하지만 이희석은 스승으로 섬겼다. 중년이 되어서는 나주로 거처를 옮기고 장성을 왕래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자주 받았다. 후배들이 의심나거나 어려운 곳을 질문하면 세심하고도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1866(63세, 고종 3). 정월에 전국에 천주교 탄압령이 내려졌다. 천주교도 8천여 명이 학살되고, 프랑스 선교사 9명도 함께 처형되었다. 이해 9월에 프랑스 선박 3척이 인천항에 들어와 조선 정부에 항의하고 강화도를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소위 병인양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기정진은 이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7월에 척사위정(斥邪衛正), 즉 ‘사악한 천주교를 배척하고 올바른 유교를 지키자’는 논리를 설파한 상소를 올렸다.

이희석은 당시 3월 2일부터 6월 13일까지 서울, 강화, 금강산, 대구를 거쳐 진주 일대를 여행하였다. 이 때 4개월간, 약 3,360리에 달하는 여행기록은 그의 문집인 남파집에 들어있다. 그는 당시 대구의 서계서원(西溪書院)과 토동(兎洞)의 뇌룡정(雷龍亭)을 방문하였으며, 진주에서는 10여일을 머무르면서 동료인 조성가(趙性家, 1824-1904), 하달홍(河達弘) 등과 시문을 주고받았다. 조성가는 진주 출신으로 일찍이 그가 28세 되던 1851년에 기정진이 강학활동을 하고 있던 전라도 장성까지 300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달려가 당시 기호학파의 영수격인 기정진을 스승으로 모셨다. 기정진은 그런 조성가를 남달리 아끼고 지도했는데, 날로 그의 학문이 성장하여 동료들 사이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이희석은 이러한 조성가에 대해서 20살이나 어렸지만 동문으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진주를 방문한 것이다.

1880(77세, 고종 17),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나이 들어 과거에 합격한 점을 높이 평가해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임명되었다. 통정대부는 정삼품 당상관의 문관에게 수여하는 품계로, 사간원의 대사간, 홍문관의 부제학, 성균관의 대사상, 승정원의 도승지 등 고위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위치였다.

과거 합격 후 8월 28일, 4년 전에 사망한 스승 기정진(奇正鎭)의 묘소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제사를 모시고 영전 앞에서 애도를 표한 뒤 제문을 올렸다. 이 때 올린 제문은 현재 장성의 고산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이희석은 제문에서 젊어서 망령되게 입신양명하는 일에 뜻을 두었는데,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뜻을 이루지 못한 부끄러움에 과거를 포기하려고 한 일을 회상했다. 그때 스승은 그에게 ‘내게 있는 도를 다할 뿐이다’라고 격려하였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할 일을 할 뿐이라는 스승의 격려에 힘을 얻고 다시 과거에 도전을 하게 되었으며, 결국 70이 훨씬 넘은 나이에 병든 몸을 이끌고 과거 시험장에 나가 합격하였다. 그리고 지금 스승의 영전에 절하고도 차마 길을 떠나지 못하고 황산(凰山)에 들어가서도 떠나지 못하는 애통함을 표현하였다. 황산은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의 황산(凰山)마을로, 기정진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1889(86세, 고종 26) 7월 17일 묵동의 집에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장흥군 관산읍에 위치한 천관산(天冠山, 723m) 자락 선영들의 무덤에 묻혔다. 용산면(蓉山面) 어산리(語山里) 당곡사(唐谷祠)에 배향되어 있다. 유시(遺詩)로 432개의 시가 있으며 유집으로 남파집(南坡集, 南坡先生集)이 있다.

⌈남파집⌋은 목활자본으로 8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희석이 사망한 뒤 손자 이선원(李善遠) 등이 이희석의 시문을 모아 편집하고, 기정진과 이항로의 제자들로부터 행장이나 발문을 받아 1898년에 간행하였다. 서문은 1897년에 스승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썼다. 기우만은 화순에서 출생하여 참봉 벼슬 까지 올랐는데, 1895년 민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의하여 장성향교에서 의병을 이끌고 궐기하였다. 서문은 그로부터 2년 뒤에 쓴 것이다.

이 문집에는 430여수의 시와 34편의 문장이 실려 있다. 문장은 스승인 기정진과 주고 받은 글, 기타 동문이나 장흥 지역의 인물 혹은 지방 관리들과 주고받은 글들이다. 아울러 누추하게 살더라도 뜻은 커야 한다는 「거려설(蘧廬說)」 등 주위 사람들을 경계하거나 스스로를 경계한 글이 8편 정도 실려 있다. 또 생활과 관련되는 여러 문장과 행장, 묘지명, 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 문집의 제8권에는 기우만(奇宇萬)이 쓴 행장, 기삼연(奇參衍)이 서술한 「남파이선생전(南坡李先生傳)」, 이승욱(李承旭)이 지은 묘지명, 그리고 김평묵(金平默), 최익현(崔益鉉), 송기로(宋綺老), 조성가(趙性家) 등의 발문이 들어있다. 이 문집은 현재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김봉곤, 「이희석의 남파집」, 한국학중앙연구원

권수용, 「1880년 이희석의 제문」,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