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립(洪南立: 1606~1679)


화곡 홍남립(洪南立: 1606~1679)                    PDF Download

 

그의 자(字)는 탁이(卓爾)이고, 호를 화곡(華谷)이라 하였다. 그는 일찍이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과 교우(交友)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나아가 육경(六經)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1633년(인조11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하였으며, 그 뒤부터 벼슬길에 올라 의정부 사록(議政府司錄)을 거쳐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과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비롯하여 학정(學正)과 박사(博士)와 전적(典籍)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임금의 특별 배려에 힘입어 자기의 집에서 쉬면서 책을 볼 수 있는 사가호당(賜暇湖堂)을 명받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통훈대부(通訓大夫)의 작위를 받았으며, 연서도 찰방(延曙道察訪)을 거쳐 광양현감(光陽懸鑒)과 만경현령(萬頃縣令)과 평안도사(平安都事)와 보성군수(寶城郡守)와 서산군수(瑞山郡守)와 덕산군수(德山郡守) 등등의 외직(外職)을 역임하였으며, 형조좌랑(刑曹佐郎), 병조좌랑(兵曹佐郞), 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결국 화의가 이루어지자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면서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의병(義兵)을 모아 활동하면서 군량을 모아 조달하기도 하였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는데 그의 부모가 돌아가자 묘소 옆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복(三年服)을 입는 기간 동안 여막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또 친구와도 우의가 매우 깊었다. 그는 친구 백석(白石) 유즙(柳楫)과 함께 과거시험을 보러가서 시험 답안지를 일찍 썼지만 백석이 미쳐 답안지를 작성하지 못하자, 그가 답안지를 완성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제출 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형제간에도 우의가 돈독하여 그에게는 두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들이 밖에 나가 저녁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을 때에는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다 이들 동생들이 일찍 죽자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거두어 주며 보살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계모가 계셨는데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똑같이 모셨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자신의 생모와 똑같이 3년 동안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상례를 마쳤다고 한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그의 문인(門人)들과 더불어 자녀들의 강학(講學)에 힘썼다. 또한 그는 문인(文人)들을 아끼는 마음이 지극하여 문인들이 시(詩)와 문장(文章)을 지을 때는 항상 그들의 글을 읽어보고 잘못된 부분에 대하여 올바른 지적을 해주었고, 잘된 곳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문인(門人)과 자녀들을 강학하는데 힘쓰다가 1679년 세상을 뜨게 되니 그의 나이 74세였다. 그의 묘소는 완주 대승동(大勝洞)에 위치하고 있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의 덕행(德行)과 학행(學行)을 기리기 위하여 학천사(鶴川祠)와 대승사(大勝祠)를 짓고 여기에 그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서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가 저서인 《화곡집(華谷集)》 5권이 문집(文集)의 형태로 전해 오고 있다.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승리 대승서원(大勝書院) 앞에는 ‘일심공자시심명비(一生公字是心銘碑)’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진 돌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이 돌비는 대승서원에 주벽으로 모셔진 그가 임종 당시에 문인 제자들과 자손들에게 유훈(遺訓)으로 남긴 말을 2005년 9월에 세운 것으로 일종의 유훈비(遺訓碑)라고 한다.

그가 벼슬길에 나가서나 향리에 물러나 있거나 후학 문인들이나 자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은 오로지 공심(共心)과 공지(公志)이었다는 것을 이 유훈을 통해 알 수 있을 듯하다. 공(公)자 하나만을 마음에 새기라는 당부가 지금도 귀에 들려오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특별한 유훈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가 한 편생 공(公)이라는 글자 하나만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다는 것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는 점에서는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게다가 당대에 명망 높았던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 만암(晩庵) 이상진(李尙眞),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등과 같은 분들이 평소 화곡의 인품에 대하여 품평한 것을 보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태산처럼 높으심이여

대하처럼 넓으심이여

달과 같이 밝으심이여

물과 같이 맑으심이여

진솔하신 성품이시여

고결하신 조행이시여

이 글이 돌비의 전면 왼쪽에 새겨져 있어 보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여운으로 남는다.

 

<참고문헌>
《사계전서(沙溪全書)》, 문인록(門人錄).
《월주집(月洲集)》, 소두산(蘇斗山).
《심석재집(心石齋集)》, 송병순(宋秉珣).
《국조방목(國朝榜目)》
《홍씨문헌록(洪氏文獻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