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온(鄭溫, 1652-1707)


정온(鄭溫, 1652-1707)                                            PDF Download

 

온(鄭溫, 1652-1707)은 조선시대 후기에 활동했던 문신이자 유학자로,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다.  집안의 여러 형들과 함께 송시열(宋時烈)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48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운은 없었다.  그의 형들 가운데 정호(鄭澔)는 송시열이 사망한 뒤,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는데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3정승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정온은 잠시 순릉봉사(順陵奉事)로 근무한 뒤 56세 때 병으로 사망하였다.

1652년(1세,효종3년) 음력 10월 7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중(和仲)이다.  어려서 초명(初名)은 순(洵) ,후에 유피(有避)라 하였다가 ‘따뜻할 온’(溫)으 로바꿨다.  아버지는 통훈대부행사헌부감찰(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 정경연(鄭慶演, 1604-1666)인데,영의정 정철(鄭澈)정직(鄭稷)의 아들이다.
정온의 부친은 둘째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 민광환(閔光煥)의 딸을 맞이하여 그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다.  정온은 그 중 넷째인데,  큰 어머니가 낳은 아들들까지 포함하면 일곱째이다. 형으로 통덕랑(通德郞) 정주(鄭澍)정인(鄭潾), 정비(鄭泌), 정섭(鄭涉)과 영의정, 좌우정, 우의정을 두루 지낸 장암(丈巖) 정호(鄭澔, 1648-1736), 정진(鄭津)이 있으며 동생으로 정영(鄭泳)이 있다.
정온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단아하고 수려 하였는데,  장성하여 신이 중(愼爾中)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 하였다.

1666년(15세,현종7년) 부친이 사망하였다.  정온의 부친 정경연 은정온이 태어나기 전인 1643년(인조21년)에 지방관리의 추천을 받아 영릉참봉(英陵參奉)에 기용되었다. 그 뒤 여러 지방의 수령으로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는데,  생활이 검소하고 매사에 부지런하여 현지 주민들에게 찬사를 들었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워서 홀어머니를 50여년이나 모셨는데,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외지에 부임 할 때에도 항상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뒤에 평릉도 찰방(平陵道察訪)이 되었으나 지난해(1665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해 어머니 상을 당해 너무 애통하고 상심한 나머지 병을 얻어 한달 만에 별세하였다.

1671년(20세,현종12년) 우암 송시열 선생이 화양동(華陽洞)에 있음을 듣고 찾아가그문하에들어갔다. 당시 학비를걱정하였으나그가배움에뜻을두었음을기뻐하면서어머니가이렇게말했다.“네가스승을따라도를배우고자한다면내머리카락이라도잘라주겠다.”고하며노잣돈을마련해전송해주었다. 그뒤어머니는병에걸려수년뒤에사망하였다.

1675년(24세,숙종즉위년)스승 송시열이 귀양을 갔다. 친형 정호는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힘썼다.  하지만 이후에 주위의 권유로 1682년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으로 승진하였다.

1689년(38세,숙종15년) 6월 8일, 송시열이 유배지 제주에서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조문을 가서 제문을 지어 영전에 올렸다.  친형 정호는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 성문 바깥으로 쫓겨남) 당하였다가 경성(鏡城, 함경도)으로 유배되었다.

1694년(43세,숙종20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권되어 다시 궁중으로 돌아왔다.  형 정호도 유배형에서 풀려나 지평, 수찬, 교리 등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하지만 1696년에 소론파 이사상(李師尙)을 비판 등 과격한 발언으로 파직되었다.  2년 뒤 다시 정호는수찬, 집의, 사간을 거쳐 동래부사로 임명되었는데,  근무 중에 신은(新銀) 약 12만냥을 왜인에게 판매한 일로 파직되었다.  하지만 형 정호는 일생을 늘 가난하게 지내면서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였다.

1699년(48세,숙종2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통훈대부행순릉봉사(通訓大夫行順陵奉事)에임명되었다.

1701년(50세,숙종27년) 3월 충청도(忠淸道)에서 다른 유생들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이희정(李喜鼎)이 어진이를 근거 없이 모함한 일과, 호남․영남의 유생들이 함께 일어나 그런 모함에 호응한 일,  그리고 박명의(朴明義), 임수간(任守幹) 등이 번갈아 소를 올린 상황을 설명하고 이희정에게 내린 죄율(罪律)로 그들을 모두 처벌하기를 호소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미 태학(太學)의 여러 유생에게 타일렀고, 호남과 영남의 유소(儒疏)없다.”

고하였다.
이희정(李喜鼎)은 1656년 생으로 숙종17년, 1691년 증광시(增廣試)에 진사(進士) 3등(三等) 21위로 합격한 충청도 출신의 진사로 다른 유생들과 함께 이 해 2월에 상소를 하여 김장생(金長生)을 헐뜯고 배척하였으며, 나아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등 두 학자에 대해서도 비난하였다.  이에 승정원에서는 그가 방자하고 꺼림이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숙종은

“김장생을 업신 여긴 것은 지극히 무엄(無嚴)하고,  또 이이, 성혼 등 두현인을 방자하게 추한 욕설을 하고 있으니, 더욱 놀랄 만한 일이다.  이희정(李喜鼎)은 배소(配所)를 정하여 유배보내고 지금 이후로는 이와같은 상소문을 받아들이지 말라.”

고지시하였다.

1707년(56세,숙종33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대소원면 영평리에 있다.  습재(習齋) 이직신(李直愼)이 묘표를 쓰고,  또 친형 장암 정호(鄭澔)가 묘표와  행장을 지었다.
친형 정호는 1710년에 대사간으로 복귀 하였으며 이후  대사헌이 되었다가 당론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다시 1713년에 대사성으로 복귀하여 송시열의 묘정배향을 건의하였고,  1715년 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또 소론 윤증(尹拯)이 송시열을 배반하였다는 주장을하여 파직되었다가,  노론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대사헌으 로승진하였다.  하지만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에 효종에게 불손한 내용을 썼다는 이유로 윤선거 부자와 함께 관작을 박탈당했다. 1717년에 다시 예조판서로 복귀하여 다음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1721년에는 ⌈숙종실록⌋의 편찬에 관여하였다가 신임사화를 당하여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가,

1725년(영조1년)에 노론이 재집권하자 우의정에 승진되어 좌의정을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2년 뒤,  정미환국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729년에 영중추부사로 재직하던 중 사망하였다.

<참고자료>
⌈장암집(丈巖集)⌋ ⌈(권18, 墓表亡弟奉事遺事)⌋
⌈정온(鄭溫)⌋,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현정,  ⌈정온, 디지털충주문화대전⌋, http://chungju.grandcultur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