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행(金元行, 1702-1772)


김원행(金元行, 1702-1772)                                  PDF Download

 

원행은 자가 백춘(伯春)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호는 미호(渼湖) 또는 운루(雲樓)인데 미호가 널리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승지 김제겸(金濟謙)이다.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김창협의 수제자인 이재(李縡)의 문인이자 조선 후기 집권 계층인 노론 가문의 후손으로 학통을 잇는 존재가 되어 조야(朝野)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의 지위에 있었다. 당시 유수한 산림(山林)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다.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옥사 때 조부 김창집이 노론 4대신으로 사사되고, 생부 김제겸과 친형인 김성행(金省行), 김탄행(金坦行) 등이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25년(영조 1) 조부·생부·형 등이 신원된 후에도 시골에 묻혀 살며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 후 여러 중책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호학 내부에서 한원진(韓元震, 1682-1751)과 이간(李柬, 1677-1727) 간의 논쟁이 구체화되고, 이후 호론과 낙론이라는 지역적 대립 구도가 뚜렷해지는 상황 하에서, 김원행은 낙론의 학술적 입장을 대변하였다. 본래 낙학의 연원이 되는 김창협을 비롯한 가학적 전통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 낙론의 중심인물인 이재 문하에서 여러 학자들과의 학술 교류를 펼치며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을 구체화하였다. 호락논쟁의 전면에서 학술논쟁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18세기 중반 이후 낙론의 성리학적 입장을 구체화하는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낙론계의 학문을 주도하였다.

김원행의 성리설 형성과 관련하여 가장 교유의 폭과 깊이가 깊었던 학자로는 송명흠(宋明欽, 1705-1768), 송문흠(宋文欽, 1710-1752) 형제와 임성주(任聖周, 1711-1788)를 꼽을 수 있다. 송준길의 현손이자 김원행과는 고종사촌 간이었던 송명흠·송문흠 형제, 송명흠 형제와 이종사촌이었던 임성주, 이들은 모두 이재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다. 이들은 당시 호락논쟁의 주요 쟁점은 물론, 예학과 경학 등 다양한 학문적 주제에 대해 활발한 학술토론을 전개했다.

김원행의 인물성론(人物性論)을 비롯하여 심설과 명덕설 등은 그의 문인 박윤원(朴胤源, 1734-1799)을 거쳐 19세기 초반 낙론을 주도한 오희상(吳熙常, 1763-1833), 홍직필(洪直弼, 1776-1852)에게 이어졌고, 20세기 초반 낙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전우(田愚, 1841-1922)에게 계승되었다. 한말 영남학계의 중심 학자였던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은 「서김미호인물성설후(書金渼湖人物性說後)」에서 ‘김원행의 성설은 대체로 지극히 정당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영조 38년에 영조가 주강(晝講)에서 ⌈대학⌋을 강하면서,

“문왕(文王)이 아들 노릇을 한 것은 효(孝)에서 그쳤는데 나도 효를 하고자 한다. 어제 진전(眞殿)에 전배하고 높은 곳에 올라 명릉(明陵)을 바라보고 왔다.”

또 영의정 홍봉한에게 말하기를,

“세손의 관대(冠帶)와 의양(衣樣)이 꼭 나와 같으니 참으로 귀엽다. 내가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해야 한다는 말로 가르쳤는데, 비록 장래에 학문의 성취함이 어떠할지는 모르겠으나 반드시 후덕(厚德)한 군자(君子)가 될 듯하니, 어찌 기특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홍봉한이

“왕손(王孫)이 이미 장성하였으니, 마땅히 봉작(封爵)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라고 하자 전지를 내리겠다 하고, 왕손 교부(王孫敎傅) 김이안(金履安)에게

“네 아비는 교목세신(喬木世臣)인데, 어찌 와서 나를 보지 않는가? 네가 모름지기 내 뜻을 가서 전하여 반드시 와서 보게 하라.”

했다. 김이안은 김원행의 아들이다.
영조 48년(1772) 조에 김원행의 졸기가 나온다. 간략하지만 김원행의 학문과 인품을 잘 설명하였다.

“성균관 좨주 김원행이 졸하였다. 김원행의 자는 백춘(伯春)으로 안동(安東) 사람이다.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손자인데, 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의 후(後)로 출계하였다. 출생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고 기개와 도량이 빼어나니 선배들이 모두 국기(國器)로 허여하였다. 임인년(경종 2년, 1722) 후부터는 산골에 물러가 살면서 오로지 위기(爲己)의 학문에 마음을 썼으니, 대개 문간공의 유서(遺緖)를 소술(紹述)한 것이다. 성명(性命)의 근본을 통견(洞見)하고 이기(理氣)의 묘(妙)를 깊이 탐구(探求)하였는데, 조용히 깊고 깊이 생각하더니 각각 그 극(極)을 이해하였다. 평소에 하는 사업이 평정(平正)·적실(的實)하고, 의리(義理)를 변별함이 엄확·명쾌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한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초선(抄選)이 되어 벼슬이 공조 참의·좨주·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성상의 권우(眷遇)가 융숭하여 정초(旌招)를 자주 내렸는데, 매양 그 정초가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의리로써 사양하며 종신토록 일어나지 않으니,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는데, 나이는 71세였으며 <미호집(渼浩集)>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미호집⌋은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 연대는 알 수 없다. 서(書)에는 저자의 종장(宗丈)인 김시관(金時觀)과 성리설(性理說)에 관해 논란한 것, 유척기(兪拓基)와 예설에 대해 논한 것, 송명흠(宋明欽)·임성주(任聖周)·김종후(金鍾厚)·이완(李浣)·홍대용(洪大容) 등 당시의 많은 학자·문인들과 주고받은 서한들이 있다.

이 서한들에는 경의(經義)·심성(心性)·이기(理氣)·예설·사론(史論) 등에 관한 내용이 많아, 훈고학(訓詁學) 및 성리학에 관한 저자의 학문적인 영역이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이간의 낙론(洛論)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며, 예론은 김장생·송시열의 예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박학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성리설(性理說) 연구(硏究) -18세기 중반 낙론(洛論)의 심성론에 유의하여」, 「민족문화연구」 71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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