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지(李徽之:1715~1785)


이휘지(李徽之:1715~1785)                                PDF Download

 

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미경(美卿), 호는 노포(老圃),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조선조 5대 명문가의 출신인 이경여(李敬輿)의 종손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민서(敏敘)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관명(觀命)이며, 어머니는 권중만(權重萬)의 딸이다. 그는 또 3대(代) 째 대제학(大提學)대제학(大提學):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주무 장관으로서 당대의 유림과 학자를 대표하는 수장이다. 관직(官職)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직이며, 청직(淸職)으로서 삼정승 육판서 전부를 배출한 것보다도 더 영광스럽게 여겼다.을 배출한 가문의 출신이기도 하다. 1741년(영조17)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한 뒤 음사(蔭仕)로 목사(牧使)가 되었다가 1766년(영조42)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바 있다. 그 뒤에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으며 성절사(聖節使)성절사(聖節使): 조선시대에 명나라 또는 청나라의 황제와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던 사절 또는 그 사신을 이른다.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제수 받았다.

그의 관직생활의 대략을 《영조실록(英祖實錄)》에 나타난 대화를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의 건강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사현합(思賢閤)으로 이어(移御)하여 다시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균역청(均役廳)과 선혜청(宣惠廳)에 쌀과 포목(布木)과 돈이 얼마나 되는지를 유언현(兪彦鉉)과 이휘지(李徽之)에게 물으니, 각각 실제의 수효(數爻)를 들어서 대답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김치일(金致一) 이후로 이 두 낭관이 가장 잘 직임을 거행하였으니, 결코 다른 데로 이직시켜서는 안 됩니다.”라고 아뢰자, 영조 임금이 이르기를, “

그렇다. 이휘지는 또 성질이 꼼꼼하고 자세하며 모두 쓸 만한 사람들이다.”하였다.

이 내용은 《영조실록》 1761년(영조37) 조의 기록에 보인다.

그는 1755년(영조31)에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를 거쳐, 1779년(정조3)에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이 되었으며,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이 때 정조 임금은 그에게 아래와 같은 오언절구(五言絶句) 한 수를 지어 주었다.

喬木白江宅
교목세신 백강의 가문이며

文衡冢宰孫
대제학 이조판서의 손자로세

出爲關西伯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나가니

休忘二字言《弘齋全書》卷5, 詩1 “贐原任提學李徽之出按關西”
두 글자의 당부를 잊지 마오

 

이 시에서 말하는 백강(白江)은 이휘지의 증조부인 이경여(李敬輿)의 호인데, 그는 인조(仁祖)와 효종(孝宗) 연간의 명재상이었으며, 대제학(大提學)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이민서(李敏敍)는 백강의 아들로 이휘지의 조부이다. 이 시에서 말한 ‘이자언(二字言)’이란?

그가 곧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간다 하여 ‘평안(平安)’이란 두 글자를 취하여 이른 말이다. 정조는 이 시를 통하여 이휘지에게 의미 있는 당부를 한 것이다. 앞의 기·승(起承) 2구에서는 이휘지의 가문이 내역이 있는 집안임을 언급함으로써 다시 한번 선조(先祖)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을 상기한 것이며, 뒤의 전·결(轉結) 2구에서는 관찰사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민생안정(民生安定)을 도모하는 데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당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임금이 신하를 그만큼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임을 알 수 있다.

또 이휘지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우의정 이휘지에게 함께 국사를 돌볼 것을 하유(下諭)하였다.”

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경에게 고굉(股肱)의 직임을 준 까닭은 시끄러운 풍속을 두루 다스리고 도리에 어그러진 의논을 조정하여 우리 세신(世臣)을 보전하려는 데에 있다. 경의 굳은 지조와 변치 않는 덕성(德性)은 사랑과 정성으로 구제할 것이며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마음은 나라가 있을 뿐이고 공(公)이 있을 뿐이었다는 데에 대해 과인(寡人)이 늘 경을 허여(許與)하는 바이니, 이 마음으로 거조(擧措)하면 명에 따라서 보좌하기가 무엇이 어렵겠으며 바로잡아서 보필하기가 무엇이 걱정되겠는가? 대저 이렇게 하면 우리 선왕(先王)께서 50년 동안 탕평(蕩平)하신 성대한 교화를 계술(繼述)할 수 있고, 또 내 일념(一念)으로 보합(保合)하려는 고심(苦心)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니, 경은 나와서 베풀어 함께 우리 국가를 안정시키라.”

 

이는 《정조실록》 제9권 1780년(정조4) 조의 기록이다. 이어서 그는 곧 우의정에 올랐으며, 1781년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官)을 겸하여 《영조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이듬해에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1784년(정조8) 10월에는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 동지를 전후해서 조정에서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니 동지사(冬至使)라 했다.로 청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는 그 이듬해 정월에 건륭제(乾隆帝)의 즉위 50주년을 기념하여 건청궁(乾淸宮) 앞뜰에서 개최하는 천수연(千叟宴)천수연(千叟宴): 천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고위 대신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노인들을 불러 베푸는 연회를 이른다.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70세가 넘은 사신을 파견하라는 황제의 명이 전달되어 조정에서는 평소의 건강과 시문의 역량을 헤아려서 정사로는 70세인 이휘지와 부사로는 72세의 강세황(姜世晃)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한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먼 사행길에 오르는 일은 젊은 사람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70세의 노인에게는 힘든 여정이었다. 사행길에 강세황이 산해관(山海關)을 지나 북경(北京)에 이르기까지 풍경을 화폭에 담고, 이 화폭에 함께 갔던 이휘지가 시를 읊어 시화첩(詩畫帖)으로 꾸민 것이 전해진다. 사행을 다녀와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이해에 그는 별세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