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기(金鎭基)  


김진기(金鎭基)                                                             PDF Download

 

181863(철종 14)~1944. 근대말 현대초의 유학자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성옥(聖玉)이며, 호는 운곡(雲谷)으로 부안에서 출생하였다.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의 유고는 「운곡사고(雲谷私稿)」라는 이름으로, 최선(崔璿)의 서문과 아들 김종희의 발문을 붙여 1944년 목활자본 2권 2책으로 간행되었다. 내용으로 권1에는 서(書)․잡저(雜著)가, 권2에는 축문(祝文)․제문(祭文)․묘갈(墓碣) 행장(行狀)․어록(語錄)조(操) 시(詩), 부록으로 되어 있다.

김진기는 구한말 및 일제강점기의 개신교 신자이다. 다만 1876년 이응찬(李應贊)·이성하(李成夏)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최초의 개신교 신자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의주에서 활동했는데, 이들이 활동한 의주란 곳은 한국 개신교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뜻 깊은 고장이다.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신자인 백홍준(白鴻俊)․이성하(李成夏)․김진기(金鎭基)․이응찬(李應贊) 등이 의주 사람이며, 그 후 뒤따라 신자가 된 서상륜(徐相崙)과 서경조(徐景祚) 형제도 의주 사람이다.

초창기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에 남쪽으로는 인천, 즉 당시 이름인 제물포를 통해 많이 들어왔다. 서울에서 가까운 항구였으니까 당연히 그랬다. 또한 북쪽의 경우는 의주를 통로로 해서 기독교가 들어왔다. 의주의 경우는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이 아니고, 의주의 청년들이 중국대륙 동북지역에 갔다가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에게 전도를 받고 고향에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는 활동을 한 것이 특징이다.

이 청년들은 중국대륙 동북지역에서 세례를 받고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도 하였다. 남쪽의 경우는 외국 선교사들이 중심이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동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의주를 통로로 한 북쪽의 경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심이었고 선교의 주체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 교회 초기의 기둥이었고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백홍준․이응찬․이성하․김진기․서상륜․서경조 등이 모두 의주 출신이다.

이들은 1876년(고종 13) 행상으로 만주 우장(牛莊)에 갔다가, 로스(Ross,J.) 선교사의 전도로 김진기․이응찬․백홍준 등과 함께 기독교 신자가 되어 세례를 받았다. 1882년 선양 고려문에서 로스 선교사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나 그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는 일을 하다가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이응찬․백홍준․이성하․김진기는 1876년에, 서상륜은 1879년에, 김청송은 1883년 세례를 받았다. 이 여섯 명의 의주 청년들은 한민족 개신교의 선구자들인 것이었다. 지금 황량하고 작은 도시로 바뀌고 존 로스목사가 머물던 여관 등은 자취조차 없지만, 변문진으로 바뀐 고려문은 아직도 한민족 개신교의 시작이었고 우리민족을 사랑한 하나님이 존 로스라는 푸른 눈의 서양선교사를 통해 전해진 곳이기도 하다. 1882년 로스 선교사와 함께 최초로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만주 흑룡강성(黑龍江省)에 사는 동포에게 전도하였다.

여기에서 기독교 「신약전서」의 한글 번역서와 관련된 내용을 소개한다.

로스(Ross,J.)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의 목사로서 1872년 이래로 만주에서 선교하였고, 특히 한국의 선교를 구상하여 만주 동북지방에 있던 한국인들의 촌락을 다니면서 전도하여 최초의 한국인 신자들을 얻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유식한 한국인들의 도움으로 1877년부터 신약성서의 한글 번역을 시작했는데, 그들은 김진기․서상륜․이응찬․백홍준․이성하 및 이익세 등이었다. 로스는 성서의 한글 번역을 위해 우선 자신이 이들에게서 한글을 배워야 했고, 이들은 우선 한문 성서를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다. 김진기를 비롯하여 한국 젊은이들을 확보한 로스는 한국선교를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성경 번역이라고 보고, 그때부터 성경 번역을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이다.

먼저 이들은 한문성경의 우리말 번역작업에 착수하여 1882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심양(瀋陽)의 문광서원에서 최초로 간행되었다. 1883년과 1884년에는 「사도행전」·「마가복음」·「마태복음」, 1885년에는 「로마서」·「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에베소서」가 간행되었다.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라는 제목으로 신약성서 전권이 출간되었는데 흔히 ‘로스 번역 성서(Ross version)’라고 불린다.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가지고 만주 서간도(西間島)의 한인촌에 전도, 75명의 신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1883년에는 국내전도를 위하여 잠입, 의주·삭주·강계 등지에서 전도한 끝에 10여 명의 신자를 얻고 주일마다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조직교회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최초의 개신교 집회를 만들었다. 1887년 9월에 언더우드(Underwood, H.G., 元杜尤)가 14명의 세례교인을 모아 놓고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창립할 때 서상륜과 더불어 최초의 장로로 추대되었다. 1889년에는 의주에 언더우드를 초빙하여 압록강에서 33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 동안 계속해서 로스와 연락을 취하여 1890년 의주에 와서 한 달 이상 신앙을 지도하도록 하였고, 다음 해에는 목사 마페트(Moffett,S.A., 馬布三悅)와 게일(Gale,J.S., 奇一)의 순회전도를 주선하는 등 외국선교사들의 길잡이 구실을 하였다.

그리하여 1882년 가을에 처음으로 「예수성교누가복음전서」와 「예수성교요안나 복음전서」를 각각 낱권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인쇄기는 상해로부터 사들였고, 한글 활자는 그의 한국인 도역자들이 만든 목활자를 일본에 보내어 4만여 자의 아연활자로 만들어서 1881년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에 설치하였다. 출판소는 심양의 문광서원이었다. 로스는 그와 매부관계인 선교 동역자 매킨타이어(MacIntyre,J.)의 협력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하여 번역한 낱 복음서들을 만주의 한국인 교회에 널리 반포하면서 계속 번역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1883년에는 「예수성교전서말코복음」을, 그 이듬해에는 「예수셩교젼서마⋅복음」을 간행하였고, 서상륜은 이 성서들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와 고향인 황해도 솔내에서 전도함으로써 1884년 최초의 한국인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 뒤 번역을 계속했는데, 로스가 안식년으로 본국에 귀국한 동안에 매킨타이어는 번역 원고들을 네 차례씩 원어 성서와 대조해가면서 번역을 수정하였다. 드디어 「신약성서」가 완역되었을 때 로스는 영국 성서공회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재정 원조를 얻어서 이를 발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한글 성서로는 최초로 간행된 것이요, 한국에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이 성서의 한글 번역을 시작하여 「신약전서」를 발행한 해(1900년 5월)보다 13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로스 역의 「예수성교전서」가 한국에 일찍 들어와서 널리 읽히게 되었고, 외래 선교사들의 한글 공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 이 책은 한글 연구의 한 역사적 자료로도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기독교가 선교되는 곳에는 어디서나 성서의 국역이 반드시 이루어져 그 나라의 국문학 발달에 기여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였다. 성서의 한국어 번역으로 생긴 새 어휘들도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들이 보급되어 통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