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중(閔維重, 1630~1687)


 

민유중(閔維重, 1630~1687)                               PDF Download

 

유중(閔維重, 1630년~1687년)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외척으로 인현왕후의 친정 아버지이며 숙종의 장인이다.  명성황후의 6대 조할아버지이기도한 그는 예문관검열,  사헌부감찰, 병조정랑, 성균관대사성,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는데,  사위인 숙종의 지원으로 권력을행사하다 조야의 비판을 받고 실권하였다.  송준길과 송시열에게 배웠으며,  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들의 예론(禮論)을 지지했으며,  경학에 매우 밝았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민유중의 신도비(神道碑
경기도 여주에 있는 민유중의 신도비(神道碑

1630년(1세, 인조8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호조참의,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민광훈(閔光勳)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며,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다.  대사헌 민기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이며,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다.  송준길(宋浚吉, 1606∼1672)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배웠으며,  서인(西人)에 속했다가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나뉘자 노론(老論)에 속했다.

1651년(22세,효종2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였다.  이후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세자시강원  설서, 성균관전적 등을 거쳐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656년(27세,효종7년)에 병조정랑, 지평 등에 임명되었다.  9월 19일 재해에 대처하는 일에 대해서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처음 시작하는부분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요즘 재이(災異)에 대한 보고가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가운데 큰 것을 열거할 것 같으면,  사나운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가 옥을 무너뜨리고 들판을 진동시키고 사람과 물건이 날렸다고 합니다. 또 우박이 갑자기 내려 백성이 죽거나 다친 이가 백여 명이라고 말한 것도 있고,  큰 비로 강물이 불어 농민이 빠져 죽은 자가 40여명 이라고 말한 것도 있습니다.  밭에 쌓아둔 곡식이 저절로 발생한 화재로 모두 탔다고 말한 것도 있고, 심지어 천둥이 치고 바람이 불며 벼락이 쳐서 성묘(聖廟)가 무너지고 부서졌으며,  방파제가 무너지고 뱃사공이 떠내려가 실종되기도 하였답니다.  그 동안에 목숨을 잃은 자를 따져보면 이미 수천여 명에 이른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을 듣자니 마음이 놀라고 말하자니 뼈골이 오싹합니다.  이는 실로 지난 역사에 없었던 바이고 국조(國朝)  3백 년간 듣지 못했던 바이며,  전하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이래 재앙이 일어나지 않은 해가 없었지만 또한 오늘날처럼 참혹한 경우는 없었습니다.(중략)
하늘이 바야흐로 노여워하여 갖가지 흉포함이 이르게하니,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근심과 보전하기 어렵다는 염려는 밝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전하께서는 구중궁궐에서 묵묵히 계시면서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계십니다.  군신들은 전하를 우러러 받드는 것이 풍조를 이루어 답답하고 비굴하게 굴면서 끝내 하늘을 감동시킬 한마디 말이나 재앙을 그치게 할 한가지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하지 않은 업무와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역사를 날마다 경영하여 힘쓰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아,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염려하는 것은 진실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며 수양 반성하는 것이 바로 그 실질이고,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 바로 그 형식입니다. 실질을 보존하지 못하고 형식 또한 따라서 폐지하시어 이 양자를 잊어버리고는 조금도 경계하거나 조심하는 뜻이 없으니, 신이 감히 모르기는 하지만 천재와 시변이 정말 두려워하기에 부족하단 말입니까?”

효종은 이러한 상서문에 “말을 올린 정성이 가상하다” 고 답하였다.

1665년(36세,현종6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몇 달 뒤에다시 중추부첨지사가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이어 사간원대사간, 승정원승지,  이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즈음에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과 다툰 끝에 관직을 떠나 광주에 은거하였다.

1671년(42세,현종12년) 이해에 형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 등에 임명되었다.

1674년(45세,숙종원년) 이해조선의 제19대 왕숙종(肅宗,1661-1720)이 14세의 나이로 등극하였다.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나 송시열과 그 당파인 산당(山黨)이 실각하였다.  민유중의 당색은 크게는 서인으로, 송시열과 송준길이 주축이 된 산당(山黨)에 속했다.  산당은 서인의 한 당파인 한당(漢黨)과 대립하고 있었다.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사직하고 충주로 내려가 지냈다.  이후 탄핵을 받아 흥해(興海, 지금의 경상북도 영일군)에 유배되었다.

1680년(51세,숙종6년)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허적(許積)이 왕이 사용하는 천막을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사용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일로 남인의 고위관료들이 실각되고,  마침 역모사건까지 발생하여 숙종이 남인들을 대거 몰아내고 서인들에게 권력을 넘기는 일이 발생하였다. (경신환국庚申換局) 민유중은 이 일로 다시 등용되어, 송시열의 측근이었던 친형 민정중을 도와 남인을 추방하는데 앞장 섰다.  공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인정권을 주도하였다.  서인은 이후에 노론(노장파) 소론(소장파)로 분열되었다.

1681년(52세,숙종7년) 이해병조판서 의직에 있었는데,  둘째 딸이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었다. 숙종은 원래 즉위한 뒤에 김만기(金萬基)의 딸을 왕비(인경왕후仁敬王后)로 맞이했다.  이해 10월에 왕비가 사망하여 다시 부인(계비繼妃인현왕후仁顯王后)을 맞이한 것이다.
숙종의 부인이 된 인현왕후은 민유중의 둘째 딸로 민유중이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송준길의 딸은 진송씨가 낳은 딸이다.  송시열과 김석주가 적극 추천하여 숙종의 두번째 부인이 된것이다.  덕분에 민유중은 국구(國舅,왕의장인)이 되었으며,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에 임명되었다.

1682년(53세,숙종8년) 금위영 창설을 주도하여 금위대장에 임명되었다.

1686년(57세,숙종12년) 친인척이 병권과 재정권을 독점 장악하고 국가 대사를 마음대로 처리하며,  관직을 독점한다는 비판의 상소가 쇄도하였다.  소론파 윤증은 숙종이 내린 관직까지 사양하면서 외척의 위세를 비판하였으며,  같은 노론파 이징명도 외척의 세도를 비판하며 인현왕후에게 주의를 주라는 상소를 올렸다.  덕분에 이징명은 국모의 명예를 훼손한 죄목으로 형벌을 받았다.  민유중은 사위인 숙종을 만나 자신을 모독한 자들에 대한 엄벌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일로 그는 모든 관직을 내놓고 자택에서 두문불출하였다.
이해 ⌈숙종실록 ⌋ 8월 6일자에는 민유중이 숙종에게 올린 상소문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이 지난번에 교리(校理)  이징명(李徵明)의 응지(應旨)에 대한 상소를 삼가 보았었습니다.  그가 첫머리에서, ‘과거의 역사에 지진의 재변은 외척이 세도를 부리는데에 말미암은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이어, ‘거처와  봉양이 습관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등의 말로써 신을 지적하면서 심지어는 왕비를 경계시키고 외척을 주의 시켜야 한다고까지 청하였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경계하도록 한 것은 엄격해야하고 또 간절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 글을 보고 놀랍고 두려워서 마음과 뼈가 함께 섬짓 할 정도였습니다.  또 삼가들으니,  윤경교(尹敬敎)가 상소를 올려 ‘총애가 지나쳐서 교만이 생겼다.’고 말했다 하니, 신의 죄는 이지경에 이르러 한층  더 첨가 되었습니다.  신은 진실로 어리석어서 종전의 범죄가 어떠했는지를 스스로알지 못하였으며,  마침내 죽게 된 때에 이르러서 이렇게까지 좋지 못한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숙종은 “이징명이 거짓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참으로안타깝다.  그대에게 무슨 털끝 만큼이라도 인책해야 할 일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직 하지 말라.”고 하였다.   사관은 실록의 중간에 민유중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민유중(閔維重)은 조정에 벼슬한 지30년 동안 한결같이 청렴하고 근신 하였었는데, 국구(國舅)가 되고서는 더욱 더 조심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외척(外戚)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어느 날 숙종이 사적(私的)으로 편전(便殿)에서 민유중을 만나, 외부의 일을 물어보았다.  민유중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늙고 병들어서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이 적으므로 무릇 조정의의논에 대해서는 참여하여 들은 것이 없습니다.  가령 한 두가지 들은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 만약에 신을 통하여 들으신다면 이는 바로 부정(不正)한 길입니다.  어찌 성조(聖朝)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숙종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고 헤어졌다. 이때부터 다시는 민유중과는 사적으로 만나지 아니하였다.
사관은 다시 민유중을 두둔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이징명의 상소의 뜻은 어찌 민유중이 참으로 잘못한 것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겠는가?  대체로 그 말을 엮어갈 적에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문제삼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임금이 이징명을 미워하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장인 어른이 되는 민유중을 위해서 그런 것만은 아닐것이다.”

1687년(58세,숙종13년)에 사망했다.  6월 29일 ⌈숙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졸기가 실렸다.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 졸(卒)했는데,  나이가58세였다.  민유중은 성격이 강직하여 방정하고 총명하여 통달했었는데, 형 민정중(閔鼎重)과 함께 경술(經術)을 가지고 진출하여 사림(士林)들의 두터운 인망(人望)을 받았다.  조정에서 벼슬하면서는 언론이 준엄하고 단정하여 업적이 융성하게 나타났고 , 집에 있을 적에는 행의(行誼)에 독실하여 예법(禮法)으로 자신을 제어하였으니,  임금이 왕비(王妃)를 그의 가문에서 정하였음은 대개 그의 가법(家法)이 올바름을 살폈기 때문이다.  이때 민유중이 바야흐로 서전(西銓)의 장관(長官)으로 있으면서 위계(位階)가 보국(輔國)에 올랐으므로 순식간에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국가의 제도에 얽매여 기밀(機密)한 요직을  모두내놓고 마침내 등용하지 못하게 되므로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었다.”

숙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3년간 녹봉을 주도록 명하였다.
시신은 여주 섬락리에 안장되었으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장흥의 연곡서원(淵谷書院)과 벽동의구봉서원(九峯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민문정유집(閔文貞遺集)⌋ 10권10책이있다.
민유중이 사망한 다음해 인현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던 중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숙종은 새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고 장씨는 희빈으로 승격한 뒤,  인현왕후는 폐비하였다.  송시열과노론계 관리들은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나 숙종은 송시열을 제주도에 유배하고 사약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다.  민유중으로서는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던 주위 사람들이 비참한 상황에 몰리는 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참으로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숙종실록⌋
한영국, 민유중,<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이태진, 기사환국,<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