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용(南有容, 1698-1773)


남유용(南有容, 1698-1773)                                  PDF Download

 

유용은 본관은 의녕(宜寧)으로 자는 덕재(德哉)이고 호는 뇌연(雷淵)·소화(小華)이다. 할아버지는 대사헌 남정중(南正重)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남한기(南漢紀)이고,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영의정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아들이다.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급제하여 강릉참봉(康陵參奉), 영춘현감(永春縣監)을 지냈다. 1740년(영조 1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1754년(영조 28) 원손보양관으로 있다가 다음해 『천의리편(闡義理編)』의 찬집당상(纂集堂上)을 겸하였고 이후 예문관제학, 좌부빈객, 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752년 가선(嘉善)으로 승계한 뒤 승문원제조·대사성·예조참판·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 등을 거쳐, 1754년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뒤에 정조가 된 세손을 세살 때 무릎에 앉혀놓고 글을 가르쳤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는 그 은덕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1757년(영조 33) 원손사부(元孫師傅)를 거쳐 예조참판으로 옮겼고 1764년(영조 40) 우빈객, 1767년 봉조하가 되었다.

1772년 ⌈명사정강(明史正綱⌋을 편찬했으나, 서법이 존주지의(尊周之義)에 심히 어긋난다고 하여 영조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는 그의 역사관이 성리학적 역사인식 방법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로 말미암아 장차 조선사기(朝鮮史記)를 편찬할 인물이라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영조 33년(1757) 남유용이 원손사부로 있을 적에 영조가 원손을 불러 몇 가지를 시험하여 보고는 만족하면서, 하교하길,

“눈앞의 급선무 중에 원손을 보도하는 것보다 큰 것은 없다. 사부 남유용은 교도(敎導)하기를 잘하여서 성취(成就)시킬 희망이 있다. 마땅히 가장(嘉奬)하는 뜻을 보이기 위하여 호피 한 벌을 특별히 내린다.”

이어서

“지금 이것을 경에게 주는 것은 경으로 하여금 고비(皐比)를 깔고 앉은 스승이 되라는 것이니, 경에게 포장하려는 것이 아니고 종사(宗社)를 위한 것이다.”

라고 했다.

영조실록⌋ 49년에 남유용이 졸기가 기록되어 있다. 남유용이 담박하고 순정한 인물이라고 적고 있다.

“봉조하(鳳朝賀) 남유용(南有容)이 졸하였다. 남유용은 고 대제학 남용익(南龍翼)의 손자인데, 자(字)는 덕재(德哉)이고, 호는 뇌연(雷淵)이다. 형 남유상(南有常)과 더불어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과거에 올라 승문원 부제학을 경유하여 세손보양관(世孫輔養官)·유선(諭善)을 거쳐 벼슬이 정경에 이르고 대제학을 지냈으며, 70세에 상소하여 물러가 쉬기를 청하니 봉조하를 제수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졸하였다. 사람됨이 탄이(坦夷) 하고 순실(純實)하여 세상 일에 담연하였다.

정조는 남유용이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으로 글을 가르친 공덕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정조 16년 남유용의 아들 남공철이 과거에 합격하자 검교직각(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와 남공철(南公轍)을 불러 보았다.

남공철에게 이르기를,

“네가 보양관(輔養官)의 아들로서 지금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내 마음이 감격스럽다. 고 재상 서문청공(徐文淸公)은 너의 아비와 더불어 같이 내가 어렸을 때의 스승이었는데, 네가 서영보와 동시에 조정에 서게 되었으니, 매우 귀한 일이다.”

하고 전교하길,

“남 보양관(南輔養官)은 내가 3살 때부터 수학(受學)하였는데 무릎 위에 앉히고 성심으로 가르쳤으니, 내가 문자에 처음으로 향방을 안 것은 바로 남 보양관이 훌륭히 가르친 공로였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비록 그 자손을 보살피기는 하였으나 어찌 그 공로를 보답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다행히도 그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그 가문을 위해 다행스러움이 적지 않다. 고 정승 서지수(徐志修)는 바로 남 보양관(南輔養官)과 더불어 같은 때 보양관의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 손자가 과거에 급제하던 날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으니, 지금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 봉조하(故奉朝賀) 남유용(南有容)의 집에 검교 직각(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짓겠다. 옷과 음식을 가지고 가서 그 부인의 안부를 물으라고 명하였다.”

 

남공철은 1780년(정조 4) 초시에 합격하고, 1784년에 아버지가 정조의 사부였던 관계로 음보로 세마를 제수 받았고, 이어 산청과 임실의 현감을 지냈다. 그러다 179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초계문신에 선임되었으며, 친우이자 후일의 정치적 동지인 김조순(金祖淳)·심상규(沈象奎)와 함께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 운동에 동참했고 그 뒤 순정한 육경고문(六經古文)을 깊이 연찬함으로써 정조 치세에 나온 인재라는 평을 받았다.

정조 때에는 주로 대사성으로서 후진교육 문제에 전념했다. 순조 즉위 뒤 『정종실록』 편찬에 참가했으며, 아홉 번씩 이조판서를 제수 받고, 대제학을 역임했다. 1807년(순조 7)에는 동지정사로서 연경에 다녀왔고, 1817년에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간이나 재상을 역임했으며, 1833년 영의정으로 치사해 봉조하가 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안순태, 「뢰연(雷淵) 남유용(南有容)의 삶과 한시」,「한국한시작가연구」 17권, 2013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