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호(兪彦鎬, 1730-1796년)


유언호(兪彦鎬, 1730-1796년)                           PDF Download

 

언호는 자는 사경(士京)이고 호는 칙지헌(則止軒)으로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아버지는 우윤 유직기(兪直基)이다. 형이 은일로 이조참의에 천거된 유언집(兪彦鏶, 1714-1783)이다.

1761년(영조 3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 해 한림회권(翰林會圈)에 선발되었다. 이후 주로 사간원 및 홍문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771년에는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이라 공격해 이를 배척하는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을 만들자, 권진응(權震應)·김문순(金文淳) 등과 함께 상소해 경상도 남해현에 유배되었다.

다음 해에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척신 정치의 제거가 청의(淸議)와 명분을 살리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정치적 동지들의 모임인 이른바 청명류(淸名流)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의 타파를 탕평으로 생각한 영조의 엄명으로 흑산도로 정배의 명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춘궁관(春宮官)으로서 열심히 보호했으므로 정조 등극 후에는 홍국영(洪國榮)·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지극한 예우를 받았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자신의 이름이 ⌈명의록⌋에 올라 있기도 하다.

그 뒤 이조참의·개성유수·규장각직제학·평안감사를 거쳐, 1787년(정조 11)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경종과 희빈장씨(禧嬪張氏)를 옹호하고 영조를 비판한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이를 신임의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정조의 탕평을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다. 이후 향리에 칩거했다가 1795년 잠시 좌의정으로 지낸 후 다음 해 사망하였다.

정조 즉위년에 왕과의 대담에서 김구주·홍봉한 양 척신의 당을 모두 제거하려는 정조의 뜻을 잘 보좌하였다. 또, 영조 때 탕평책 하에서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고 개정한 한림회권법을 회천법(會薦法)으로 되돌리려는 논의에서도 소시법(召試法)의 중요성을 인정해 정조의 청의와 의리를 우선해 조제하는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김우진(金宇鎭)·심환지(沈煥之)·김종수와 친하게 지내고, 홍봉한의 당을 공격함이 의리라는 김구주 당의 견해에 동조했으므로, 순조대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시파(時派)로부터 정조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외유내강의 인물로서 평가된다. 저서로는 ⌈칙지헌집⌋이 있다.

정조실록⌋ 20년 조에 유언호의 졸기가 실려 있는데, 정조의 남다른 마음과 유언호의 인품이 잘 드러난다.

사관이 다음과 같이 총평을 하였다.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죽었다. 언호는 자가 사경(士京)이며 영의정 유척기(兪拓基)의 족질이다. 젊어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영종(英宗) 신사년에 등제하여 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주연(胄筵)에서 지우를 받았다. 상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그에 대한 총애와 발탁이 다른 신하들과 아주 달라서, 몇 년 동안에 화요직을 두루 거쳐 정경(正卿)에 뛰어 올랐고 정미년에 정승이 되었다.

무신년 조덕린(趙德隣)을 복관(復官)시킬 때에는 상의 노여움이 대단하였으나 뜻을 크게 지키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로 인해 비록 외진 섬으로 정배되는 엄한 견책을 입었으나 오래지 않아서 사면을 받아 다시 정승에 임명되어 상의 권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죽자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이어서 정조의 하교를 기록하였다.

“지우를 받음이 동료들 가운데 가장 앞섰고 칭찬을 받은 것도 끝내 변함이 없었으니 같은 사람을 어디서 다시 찾아오겠는가. 이제는 죽었는지라 다시 볼 수 없게 되어 애석하고 불쌍한 마음에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의 행적과 나를 정성으로 섬긴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속일 수 없는 공의가 있다. 그러니 포장하는 것은 지나친 칭찬에 가깝고, 하지 않으면 또한 사실을 매몰시키게 되는데 어찌 명정(銘旌)을 쓸 때까지 늦추겠는가.

의당 사관으로 하여금 군신 간에 서로 잘 만난 전말을 갖추 기술하여 징신할 증거로 삼아야 한다. 시호를 내리는 은전은 시장(諡狀) 짓기를 기다려서 속히 거행할 것이요, 조문하고 자손을 녹용하는 일은 관례에 의해서 거행하라.”

다시 시장과 관련하여 정조가 하교하길,

“듣건대, 갑오년 이후에 주대(奏對)한 것과 그 사실들을 대신이 손수 기록하여 한 책으로 만들어서 가묘(家廟)에 보관해 두었는데, 비록 집안사람이라도 열람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니,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거행하라.”

하였다.
또 정조가 그를 두고 말하길,

“외모는 비록 청수하고 허약한 듯하였으나, 마음속의 지조는 아주 확고하였었다. 연전에 탐라로 귀양 보낸 일은 내가 부득이해서였다. 어찌 털끝만치라도 그를 손상시키려고 했겠는가.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은 자신의 실수였으나 제우의 융숭함은 시종 변함이 없었다.”

라고 했다.

장례 때에 유언호 집에서 유계(遺戒)가 있다 하여 예장(禮葬)을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조가 하교하길,

“시호를 청하지 말고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했더라도 조정의 명령이 있으면 으레 모두 받는 법인데 더구나 예장이겠는가. 상주의 집에 유시하여 관례에 따라 받도록 하게 하라.”

라고 했다.

1802년(순조 2)에 김종수와 함께 정조묘(正祖廟)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순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