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상(李端相: 1628~1669)


이단상(李端相: 1628~1669)                               PDF Download

 

관이 연안(延安)인 그의 자는 유능(幼能)이며, 호는 정관재(靜觀齋)  또는 서호(西湖)이다.  그는 좌의정 이정귀(李廷龜)의 손자이며 대제학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자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외손이다.

1648년(인조26)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이듬해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에 설서(說書)· 대교(待敎)· 봉교(奉敎)· 부수찬(副修撰)·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면서, 서연(書筵)에 나아갔다.  여러 차례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정랑(正郎)을 지내고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기도하였다.

1655년(효종6)에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만전념케 했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거친 뒤 대간(臺諫)에 들어가 구애됨이 없이 정론(正論)을 폈다.

김홍욱(金弘郁)이 강빈(姜嬪)의 신원(伸冤)을 청하였다가 장살(杖殺)된 일에 대하여 그의 억울함을 극언(極言)하여 효종(孝宗)의 탄식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훗날 결국 김홍욱을 복관(復官)시키게 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던 일도 그 일환이며,  조정에서 영녕전(永寧殿)을 수개(修改)하려 하면서,  정전(正殿)을 10실(室)로 하는 제도를 신설하여 협실(夾室)에 있는 여러 조위(祧位)를 일체 정전에 봉안하고, 협실에 신주를 모시는 제도를 폐지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하여,

“이렇게 할 경우 고제(古制)를 조금이나마 남겨 준 조종조(祖宗朝)의 유의(遺意)에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조위에 계신 열성(列聖)의 위령(威靈)들께서도 필시 정전의 합사(合祀)하는 반열에 끼이게 되는 것을 스스로 불편하게 여기 실듯합니다.”

라고 극언 했던 일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겠다.  이 사안에 대하여는 응교(應敎) 남구만(南九萬)과 한 동안 격론을 벌인 일이 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또 그는 일찍이 전라도 지방을 두루 살펴 기근이 심한 고을을 구제하게 한 바 있거니와, 효종(孝宗)의 승하(昇遐)로 정국(政局)이 변하자,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잠시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낸적이 있으며,  이어 응교를 거쳐 인천 부사(仁川府使)를 역임한 일이 있다. 훗날 공교롭게도 그의 아들이 동보(李同甫)가 인천현감(仁川縣監)으로 부임하게 되자,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송별하는 서문을 써주면서 그의 선친이 이곳을 맡아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일을 언급한 바 있다.

“그분이 이 고을을 다스리자 1년이 되기도 전에 백성들이 덕스러운  정사를 노래하고 사모하여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인(仁)을 행 한효과는 이처럼 신속하고 오래 보존되는 것이다.”

라고 하여 그의 선정을 기리는 한편,

“이제 동보가 이 고을에 가면 지난날 정관(靜觀) 선생의 교화를 받았던 부로(父老)들 중에 아직 살아있는 자가 있어 동보의 의표(儀表)완연히 똑같음을 보고는,  모두 기쁜 마음으로 서로 말하기를, ‘우리를 어루만져 주겠네! 선대부(先大夫)의 유업을 실행하겠네! ’라고 할것이다.”

하면서 그를 격려하였다.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하면송준길(宋浚吉)은그를천거하면서,“경연(經筵)을열때에문학(文學)을한선비가없어서는안됩니다.”라고하였고, 또“이단상은학문이해박하고식견이있는사람인데지금먼시골에서지내고있으니아까운사람입니다.”라고하였으며,예조판서조복양(趙復陽)도“조정의신하들중에경학(經學)이이단상만한사람이없습니다. 마땅히불러들여시강(侍講)하는자리에있게해야합니다.”라고한기록이《실록(實錄)》에까지수록되어있는것을보면그의학문과덕성이어느정도였는지짐작하고도남음이있다.

그러나이단상은이를사양하고양주동강(東岡)으로은퇴하였다. 그뒤
승지(承旨)와 병조참지(兵曹參知)에임명되었으나모두사양하였고, 1669년에부제학(副提學)으로서연관(書筵官)을겸했으나곧사양하고물러났다.

그는또시문(詩文)에도능했던듯하다. 《일성록(日省錄)》1797년(정조21)조를보면, 반열에참석했던조관(朝官)과유생의응제시권(試券)을채점하여내리고, 입격(入格)한사람들에게차등을두어상을내린기록이있다. 이때부제(賦題)로삼은“붉은구름한뭉치가태양곁에펼쳐졌네[紅雲一朶日邊開]”는부제학이단상이지은“남쪽나라귀한손이바다를건너오니[南國星槎渡海來], 붉은구름한뭉치태양곁에펼쳐졌네[紅雲一朶日邊開], 천추의큰의리를아는이없어[千秋大義無人識], 석실산앞에서통곡하며돌아오네[石室山前痛哭廻]”라는시에서인용한것이다. 이글은김수흥(金壽興)을풍자하여지은것으로, 명(明)나라의관상선(官商船)에타고있던임인관(林寅觀) 등95인이1667년(현종8)에일본으로가던도중표류하여제주(濟州)에상륙하게되었는데, 김수흥이이들을청나라로압송할것을주장하자, 이를안타깝게여겨지은것이다. 그의작품자체도그렇거니와그의작품중한구를부제로삼아임금이직접글을짓게하였다는것은주목할만한사실이아닐수 없다.

그리고《송자대전(宋子大全)》을보면,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친구였던그에대하여“정관재가세상에있던날에는[靜觀臨世日], 사람들이봉황새를양지에서본듯했고[人覩鳳朝陽] 나무를칠 때꾀꼬리가벗을구하듯했건만[伐木鶯求友], 산에묻히자이젠구슬이빛을감추고말았네[埋山玉掩光]”라고읊고있다. 이글은그의아들동보(東甫)의부탁으로그의묘명(墓銘)을지어주면서그의요청에따라오언율시(五言律詩)로화답한것인데,
“평생을추억하니감개의눈물을금할수 없다.”라는설명이곁들여져있다.
그와의교분관계를충분히알수 있는부분이기도하다.
그는1680년(숙종6)에민정중(閔鼎重)의건의로이조참판겸경연,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과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추증되고, 다시이조판서(吏曹判書)에증추되었으며, 그의문하에서는아들희조(喜朝)와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임영(林泳) 등의학자가배출되었다. 일련의기록을보면비교적평탄한삶을살았던인물로여겨진다.

끝으로《현종실록(顯宗實錄)》에는“신병(身病)을이유로사직하고양주(楊州)에물러나살면서여러차례불러도벼슬을사양하고나아가지않으니, 사람들이명리(名利)에담박하다고하였다.”라고적고있는데반해《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1669년(현종10) 조에는<전부제학이단상의졸기(卒記)>라는제목하에,“전부제학이단상이졸하였다.”라고쓰고,“그가강론한견해는대부분명확하고투철하였으므로한때의사류(士類)들에게존중을받았으나, 불행하게일찍졸하였으니, 애석하다. 임종할때유소(遺疏)로훌륭하고덕있는이를초치하고큰사업에더욱 힘쓰라고주상에게권하였으며, 또장식(張栻)의말을인용하여남을믿고맡길때는일신의편견을막고, 남을좋아하고미워할때에는천하의이치에공변되게할것을주청하였다. 이어약을하사(下賜)한은전(恩典)을사양하였다.”라는기록에서도그의인간상을엿볼수 있다.

그는양주의석실서원(石室書院)과인천의학산서원(鶴山書院)에배향되어있으며, 저서로는《대학집람(大學集覽)》, 《사례비요(四禮備要)》, 《성현통기(聖賢通紀)》, 정관재집(靜觀齋集) 등이있다.시호는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