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홍(蔡之洪, 1683-17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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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홍은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났다. 자는 군범(君範)이고 호는 봉암(鳳巖), 삼환재(三患齋), 봉계(鳳溪), 사장와(舍藏窩) 등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채영용(蔡領用)이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동문인 한원진, 윤봉구, 이간, 윤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강론하였다.

8세(1690) “달이 동산 위에 떠오르니 그 모습이 태극과 같구나[月出東山上 形如太極初]”라는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0세(1692) 『주역(周易)』의 뜻을 이해하였고, 『서전(書傳)』의 ‘기삼백(碁三百)’까지 물었다고 한다.

16세(1698)부터 권상하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권상하의 문인인 한원진, 윤봉구, 이간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아 성리학으로 크게 이름을 떨쳐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강문팔학사란 차이는 있지만 권상하 문하의 채지홍, 한원진, 윤봉구, 이간, 화암(華巖) 이이근(李頤根), 관봉(冠峰) 현상벽(玄尙璧) 매봉(梅峰) 최징후(崔徵厚), 추담(秋潭) 성만징(成晩徵) 등 학문적 명성을 얻은 여덟 제자를 가리킨다. 강문팔학사는 권상하가 청풍(淸風)의 황강(黃江)에서 이들을 가르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36세(1718) 암행어사 황구하(黃龜河)와 관찰사 등이 학행으로 추천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39세(1721, 경종 1년)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老論)이 실각하자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少論)의 죄를 논척(論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화가 권상하·송시열 등에게까지 미치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구운산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43세(1725, 영조 1년) 노론이 다시 기용되고 권상하의 관작이 회복되면서 채지홍도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 경연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면서 상소를 올려 송시열의 무옥(誣獄) 사건을 통렬하게 논했다. 이후 여러 차례 관직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마지못해 빙고별제에 취임하였다가, 수개월 후 부여현감으로 나아갔다.

45세(1727) 영조가 희정당에서 채지홍과 나눈 대화다. 영조가 “성인이 ‘어려서 학문하는 것은 장성하여 뜻를 펴고자 함이다.’라고 하였으니, 산림의 처사 역시 세상을 저버릴 수 없다. 내가 경연관을 불러서 오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실로 성의가 얕은 데 연유한 것이지만, 지금 (부모를) 봉양하기에 유리하여 부임한다고 하니 지방이 비록 좋으나 서울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장차 아버지를 서울에 모셔두고 경연을 출입하는 것이 바로 나의 소망이다.” 하니, 채지홍이 사양하면서 아뢰기를, “과거에 한원진이 경연을 출입하여 보익함이 매우 많더니 지금은 이미 내려가 버렸습니다. 지난 신임사화 때 신의 스승이 무고를 당하였는데 우리 성상께서 특별히 복관(復官)과 증시(贈諡)를 명하셨으니 누가 흠앙(존경하여 우러러 사모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참소하는 사람이 여태껏 집안에 있는 까닭에 한원진 같이 임금의 덕을 보필할 수 있는 사람도 역시 서울의 집이 불안하여 끝내 내려가기에 이르렀으니, 하물며 신과 같은 자가 어찌 감히 서울에 머물어 감당할 수 없는 소임을 맡겠습니까?”
채지홍이 또 말하길, “신이 선사에게 듣건대, 임금으로서 학문의 요체와 치국평천하의 길은 ‘성의정심(誠意正心)’ 네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성실하지 못하면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을 반드시 모름지기 좋은 색을 좋아 하는 것처럼 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처럼 한다면 성학은 밝고 환하게 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더라도 자연히 밝고 환해질 수 있습니다.” 하니 영조가 “말한 것이 간략하면서도 곡진하니 각별히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했다.

46세(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고을 선비들과 함께 격문을 써 붙여 도적들에 가담하는 자들을 회유하였고, 의병을 모집하던 중에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그 해 가을 청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58세(1740) 형조좌랑, 공홍도도사(公洪道都事) 등을 잠시 지내다가 사퇴하고 귀향했다. 59세(1741) 세상을 떠났다. <영조실록> 17년 기사에 채지홍의 졸기가 있다. “전 경연관 채지홍이 졸하였다. 채지홍은 선정신 권상하를 사사하였는데, 추천에 의해서 왕자사부와 시강원 자의에 임명되었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금상이 즉위하자 경연관에 선발되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와서 벼슬하지 않았다. 부여 현감에 제수됨에 어버이가 늙은 관계로 관직에 부임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경서를 궁구하고 책을 저술하며 후생을 훈회가르치니 원근의 학자들이 종유하는 이가 매우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59세였다.”

사후 1825년(순조 25년) 지역 유림들이 문백면 봉죽리 봉암마을에 사우인 봉암 향현사(鳳巌鄕賢祠)를 세워 제향했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경학·예학을 비롯하여 역사·천문·지리·상수(象數) 등에도 두루 통달하였다. 저서로는 『봉암집(鳳巖集)』·『성리관규(性理管窺)』·『세심요결(洗心要訣)』·『독서전보(讀書塡補)』·『천문집(天文集)』 등이 있다.

학문에 전념하여 당대 성리학 대가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고, 친소귀천(親疎貴賤)의 구별이 없이 가르쳐 따르는 제자가 매우 많았다. 당대 성리학의 일대 논쟁이었던 인물성동이론과 관련해서는 스승인 권상하와 한원진의 의견을 좇아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즉 호론(湖論)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채지홍은 성(性)은 이와 기의 합성이라는 원칙 아래 천명(天命)의 성 역시 기를 떠날 수 없다고 보는 한편, 인간과 물은 타고난 기에 따라 각각 이를 받아 성을 형성하게 되므로 인간만이 오행의 기 중에서 정통(正統)한 것을 얻었으므로 인성과 물성은 다른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또한 리는 기 중에 있게 되므로 기를 따라 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음양오행의 정기(精氣)인 기의 정통과 편색의 차이로 인성과 물성이 달라진다고 하였다. 기질지성(氣質之性)이 다르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현상 중에서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기질 중에 타재(墮在)한 것이므로 기질지성을 극복함으로써 본연지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