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李縡, 1680-1746)-2


이재(李縡, 1680-1746)-2                                      PDF Download

 

이재는 김창협의 수제자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다.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이다.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다.

김창협은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에 출사하였다. 이어서 병조좌랑·사헌부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교리·이조좌랑·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이조정랑·집의·동부승지·대사성·병조참지(兵曹參知)·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였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었으며, 시는 두보(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김숭겸표(金崇謙表)」·「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의 작품을 남겼다.

이재는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그의 문하에 김원행, 송명흠, 임성주 등 출중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재는 숙종 경신년(1680) 9월 28일에 태어났다. 임신 중에 민 부인이 달이 수중에 드는 꿈을 꾸었는데 광채가 방에 가득하였다. 5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작은아버지인 충숙공이 열성적으로 지도하였고 안으로는 민 부인의 인도가 또한 엄격하였다.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가주서·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어 ⌈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학·정언·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이조좌랑·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1711년 이조정랑으로 승진, 이어 홍문관의 수찬·부교리·응교·필선·보덕 등을 지내고 집의로 옮겼다. 1715년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 가례원류(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싸고 시비가 일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신축년(1721) 겨울에 경종이 왕세제인 연잉군(훗날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소론 측에서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대신들이 백료를 이끌고 명을 거두기를 정청(庭請)했는데 참여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신임옥사에서 중부 충숙공 이만성(李晩成)이 조옥(詔獄)에 유폐되어 죽자 예로써 염장(斂葬)하고 인제 골짜기로 들어가 더욱 경전에 힘써 날마다 과정을 두었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되었다.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예학(禮學)에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 ⌈도암과시(陶菴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 ⌈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사례편람⌋은 예학에 관한 깊은 조예를 토대로 편술되었다. 당시 거의 맹목적으로 시행하던 주자 ⌈가례⌋의 허점을 보완하면서 이를 현실적으로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요령 있게 엮었다. ⌈가례⌋는 원칙만의 편술이기 때문에 사용할 적에 어려움이 있었다.

상례(喪禮)는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주로 참고하고 현실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관행을 많이 수용하였다. 제례(祭禮) 역시 시속(時俗)의 예제(禮制)를 도외시하지 않았다. 관례(冠禮)와 혼례(婚禮)의 경우는 마땅한 준칙이 별로 없어서 ⌈가례⌋의 고례(古禮)와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대폭 보충하여 서로의 차이점을 찾고 그 옳고 잘못됨을 그 나름으로 고석(考釋)하여 판별하였다.

사례편람⌋은 이재가 죽은 뒤 그 자손들에 의해서 다시 수정되고 정사되어 비로소 완벽한 체제가 이루어졌지만 바로 간행되지 못했다. 이재의 증손인 광정(光正)이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있던 1844년(헌종 10)에 간행되었다. 이때 도록을 부록으로 붙였다. 그 뒤 황필수(黃泌秀)·지송욱(池松旭) 등이 ⌈사례편람⌋에 보정을 더해서 ⌈증보사례편람⌋이라 하여 1900년에 다시 간행하였다.

사례편람⌋은 편술자인 이재의 명성도 있었겠지만 특색 있는 편술방법, 그리고 요령 있게 꾸며진 여러 학자들 주장의 이동(異同)과 그 고정(考正)이 있어서 사례를 행용하는 데 도움이 컸다. ⌈가례⌋의 원칙을 지키되 시속과의 묘미 있는 절충과 예의 보편성의 추구가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기 마련인 예속의 당위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되고 세상에 보급된 후에 편술된 많은 사례관계의 예서는 거의 이 책에 기준하여 편술되었고, 사회에서 시용되는 예속 역시 여기에 기준하여 행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되고 이용된 예서 가운데 ⌈사례편람⌋의 이용도가 가장 영향력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실록⌋ 22년 조에 이재의 졸기가 실려 있다. 사관의 기록을 통해 그 대강을 살필 수 있다.

“지중추부사 이재(李縡)가 졸(卒)하였다. 이재의 자는 희경(熙卿)이요, 본관은 우봉(牛峯)이니, 고 상신(相臣) 이숙(李䎘)의 손자였다. 품성이 맑고 순수하며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인망이 당대에 뛰어났었다. 신축년·임인년의 화가 일어났을 적에 그의 숙부인 판서 이만성(李晩成)이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죽자 어머니를 모시고 인제(麟蹄)의 설악산으로 은퇴하여 벼슬길에 생각을 끊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을사년 경화(更化, 바꾸고 새롭게 함) 이후에는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단 한 번 서울에 들어와서 임금을 뵙고 만언(萬言)의 봉사(封事)를 올려 입을 다물고 어물어물하기만 하는 시론(時論)의 폐단을 진술하였다. 하지만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탕평책에 뜻을 기울이고 있는 참이어서 그의 말을 등한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자 드디어 용인(龍仁)으로 물러나 살았다.

이에 사방에서 배우러 찾아온 자가 매우 많았고 근세의 모든 선비들이 그를 종장(宗匠)으로 삼았다. 한원진(韓元震)은 선정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인데 그가 심성(心性)을 논한 말이 이재의 말과 합치되지 않아서 이재가 시를 지어 변론하기도 하였다. 이때에 와서 죽으니 나이 67세였다. 학자들이 도암 선생(陶菴先生)이라고 일컬었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